예전에 어떤 패션잡지에서 봉준호 감독을 똘똘이 과학자처럼 꾸며놓고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물론 본인은 그 과한 설정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지만, 꽤나 어울리는 콘셉트였다고 기억한다. 현장에서의 꼼꼼한 연출과 준비로 ‘봉+테일’이라는 별명이 붙은 봉준호 감독은 태양 아래 도기를 빚는 세심하고 숙련된 장인보다는, 어두운 지하실에서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오차율 제로의 로봇 만들기에 도전하는 괴짜 과학자의 이미지와 더 가까운 까닭이다.

“초등학교 때 고층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마침 친구 어머니만 계시는 거예요. 지하실로 가봐라, 해서 내려갔더니 그 친구가 경비 아저씨랑 탁구를 치고 있었어요. 핑. 퐁. 핑. 퐁. 핑. 퐁. 넓고 어두운 지하실, 백열등 아래서 나이든 경비아저씨와 초등학생이 아무 말도 안하고 탁구를 치는 광경이라니. 그 장면이 너무 기괴하고 희한해서 잘 잊혀지지가 않았어요.” 그렇게 돌이켜 보면 봉준호 감독의 영화 속에는 단편 <지리멸렬>로부터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까지 모두 인상적인 지하공간이 등장한다. 그 곳은 때로 경비 아저씨가 “보이라- 김씨”의 으스스한 전설을 들려주는 지하 주차장이기도 했고, 분노의 발길질과 숨 막히는 두뇌싸움이 오가는 취조실이기도 했으며, 한강의 돌연변이 괴물이 병들고 뒤틀어진 몸을 숨기고, 채집한 인간을 숨기던 참혹한 은신처이기도 했다.

“지하공간은 어둡고 음산하고 무섭고 기괴하잖아요. 저 그런 게 되게 좋아해요. (웃음) 뭔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것 같잖아요. 외국 아이들은 보통 나무 위 둥지 같은 곳에 비밀 일기장을 숨겨두지만 우리들에게는 그런 비밀스러운 공간이 지하실이었던 것 같아요.” 여기, 봉준호라는 소년이, 남자가, 아니 감독이 자신만의 지하 방에 숨겨두고 가끔 꺼내본다는 5편의 영화 리스트가 태양아래 펼쳐진다.

1. <언더그라운드> (Underground)
1995년 │ 에밀 쿠스트리차

“이 영화야 말로 ‘지하영화’의 지존이죠. 특히 지하에서 태어나, 지하에서 자란 남자가, 지하에서 결혼식을 올리던 그 장면이 참 좋아요. <모텔 선인장> 조감독 하던 시절, 멀티플렉스로 변하기 전, 대한극장의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 압도당하는 기분으로 봤었는데 다음날 박기용 감독이 “영화 어땠어?”라고 물으시는데, “강호동 같은 기운 센 천하장사에게 3시간 30분 동안 두들겨 맞다가 나온 것만큼 강렬하던데요”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나요. (웃음)”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세상에서 삶은 언제나 축제다. 전쟁이라는 포연을 피해 숨어들어간 맨홀 뚜껑아래 지하 세상에도 때로는 서글프고 때로는 마법 같은 축제가 펼쳐진다. 1941년 독일의 유고 침공을 배경으로 한 <언더그라운드>는 강대국의 파워게임에 자신들의 땅을 박탈당한 채 지하세계로 숨어들어간 사람들의 생생한 표정을 경쾌한 집시 음악과 함께 포착해 낸다. 1995년 칸 영화제는 제 48회 황금종려상으로 이 천재감독의 유쾌하고도 묵직한 세계에 경배를 바쳤다.

2. <양들의 침묵> (The Silence Of The Lambs)
1991년 │ 조나단 드미

“스털링(조디 포스터)이 한니발 렉터(안소니 홉킨스)와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는 그 지하 감방도 소름 끼치지만, 연쇄 살인자 버팔로 빌이 살던 나방이 날아다니던 어두운 공간도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특히 그 은신처에는 지하실에 또 지하공간이 나와요. <괴물>에서 현서(고아성)가 납치된 하수구 공간 옆에 또 다른 공간이 있고 결국 그 작은 공간이 소년을 살리잖아요. 이 지하 속의 또 다른 지하의 이미지는 확실히 <양들의 침묵>에서 영향 받은 것 같아요. 너무 좋아하는 영화라 별다른 이유 없이 1년에 한번 이상, 어떤 시기가 찾아오면 꼭 다시 보게 되요.”

신참 FBI 요원으로 등장한 조디 포스터의 섬세하고 강인한 눈빛과 또 다른 한니발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캐릭터에 빙의 된 안소니 홉킨스의 소름 돋는 연기, 조나단 드미의 한 순간도 쉴 틈을 주지 않는 박진감 넘치는 연출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연쇄살인범 영화의 현대적 교과서. 92년 작품상 감독상 남우, 여우주연상, 각색상등 아카데미 5개 부문을 석권했다.

3. <충녀> (Chungnyeo)
1972년 │ 김기영

“워낙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좋아해요. 대부분 그 분의 작품을 DVD나 비디오로 처음 접했다면 <충녀>는 파리에 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초대되어 대형 화면으로 처음 봤어요. 악몽과 판타지가 뒤 섞인 김기영 감독 특유의 공기는 여전한데 특히 갓난아이가 쇠뚜껑을 열고 하수구로 들어가는 장면은 말 그대로 ‘초 쇼킹’한 순간이었어요. 충격의 강도로 치자면 아마 영화사상 최고이지 않나 싶을 정도로. 프랑스 관객들도 아연 실색하던 하더라고요.”

가부장적 사회, 가정이라는 불가침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뒤틀어진 비극을 김기영만의 그로테스크한 붓질로 그려낸 괴작. 파워풀한 부인(전계현)의 등쌀에 기를 펴지 못하는 무력한 남자(남궁원)는 꿈과 현실 사이를 부유하며 살아간다. 부인의 계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난 하녀 명자(윤여정)는 기묘한 분위기로 남자의 잃었던 욕망을 자극한다. 71년에 만들어진 <화녀>의 속편으로 김기영감독의 각별한 애정아래 ‘명자’라는 기괴한 캐릭터로 태어난, 앳된 얼굴의 윤여정을 만날 수 있다.

4. <펄프 픽션> (Pulp Fiction)
1994년 │ 쿠엔틴 타란티노

“두 번째 세그먼트 중에 권투선수로 등장한 브루스 윌리스가 내용 흐름과 전혀 상관없이 오토바이 가게 아래 지하실로 끌려가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리고 그곳에서 정말 어처구니없는 봉변을 당하는데 마치 히치콕의 <사이코>의 ‘모텔’에 대한 오마주랄까. 마치 ‘항문’같은 이상한 나라랄까. 이 뜬금없는 장면과 더 뜬금없는 이 공간과 최악으로 뜬금없는 이 이야기는 정말 기억에 남아요.”

비디오 가게 점원으로 일하며 할리우드 고전영화부터 B급 영화까지 모두 섭렵한 독특한 이력의 비디오 키드, 할리우드의 악동 쿠엔틴 타란티노를 <저수지의 개들>에 이어 세계 관객들에게 알린 낙인 같은 영화. 단발머리의 우마 서먼과 존 트라볼타가 함께 추는 ‘손가락 V춤’은 인상적인 장면으로 이후 여러 영화에서 패러디되기도 했다.

5. <공동경비구역 JSA> (Joint Security Area)
2000년 │ 박찬욱

“보통 지하공간이 조금은 어둡고 공포스러운 곳이라면 <공동경비구역 JSA>의 지하벙커는 남북병사들이 쌍쌍이 애정행각을 벌이는 유일하게 로맨틱한 공간, 멜로드라마의 무대죠. (웃음) 남자들이, 그것도 군인들이, 게다가 남과 북의 병사들이, 작은 벙커에서 소꿉놀이 하듯 우정을 쌓아나가는 그곳은 정말 마법 같은 지하세계예요. 그 좁은 곳에서 숨죽여 술잔을 나누던 네 사람의 순간들은 재미있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고, 특히 벙커 틈새로 내려온 빛이 송강호의 짝짝이 눈을 비추던 장면을 정말 좋아해요.”

분단의 땅, 한반도의 허리에 가운데 놓인 남북공동경비구역. 북측 초소에서 어느 날 총상을 입고 죽은 북한 병사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아무도 몰랐을 남과 북 네 병사의 이야기가 서서히 세상에 드러난다. <달은… 해가 꾸는 꿈> <삼인조>등 전형적인 영화광에 독특한 취향의 감독으로만 인식되던 박찬욱을 일약 대한민국 대표 흥행감독으로 발돋움 하게 만든 작품으로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분에 진출했다.

“감독이 아닌 관객의 한 사람으로 즐거웠던 작업이었어요.”

<괴물>의 화려한 기억이 잊혀지기도 전에 발표된 봉준호 감독의 신작 <마더>는 김혜자와 원빈의 조합만으로도 캐스팅 시점부터 관심을 모았다. “김혜자 라는 배우의 미친 듯 한 연기를 화면이 아니라 육안으로 지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독이 아니라 관객의 한 사람으로 즐거웠던 작업이었어요.” 지난겨울부터 올해 초까지 촬영이 이루어진 <마더>는 현재 마지막 CG작업 중이다.

“여긴 지하실도 안 나오고, 변희봉 선생님도 안 나오고, 김뢰하씨도 안 나와요. (웃음)”라는 봉준호 감독의 농담은 그렇게 익숙한 많은 것들을 버리고 시작한 영화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신작은 형태가 좀처럼 가늠하기 힘든 동시에 새로운 기대를 품게 만든다. “제가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이라 뜨거운 사람도 뜨거운 공간도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마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뜨거운 영화예요. 기대해 주세요.” 오는 5월 말이나 6월 초 개봉 예정이라는 <마더>.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이 계절에 그 ‘어머니’의 뜨거운 포옹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벌써 여름이 온 것 같다.

글. 백은하 (on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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