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자면 이런 느낌이다. 故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에서 죽기 전 자신이 입은 옷 그대로 묻어달라고 말했던 조숙하고 잔망스러운 소녀가 인터넷 검색을 배우고 아이돌과 한류스타에 푹 빠져 연예계에 눈을 돌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아이들. 이들은 곁에 있다면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던 영화 <집으로>의 유승호나 어려서부터 왕가의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믿어질 KBS <대왕세종>의 이현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등장한 연기파 아역이다. 90년대 초 <우리 아빠 홈런> 같은 어린이 드라마의 아역배우가 <소나기>의 순박하고 부끄럼을 잘 타던 소년처럼 마냥 귀엽기만 했다면 현재의 아역배우들은 역시 귀여우면서도 귀여움보다는 배역으로 기억되는 연기력을 갖췄다. 그래서 아역배우라는 호칭에 대해 과거엔 ‘아역’에 방점이 찍혔던 것과 달리 현재엔 ‘배우’에 방점이 찍힌다. 이들 중 최근 가장 눈에 띄는 건 MBC <내조의 여왕>에서 정원이를 연기하는 방준서와 얼마 전 종영한 SBS <아내의 유혹> 니노 역의 정윤석이다.

“코디 이모들이랑 ‘쎄쎄쎄’ 하면서 놀아요”

한 살 터울의 남녀 연기파 유망주인 준서와 윤석이 만나자 스튜디오에선 작은 신경전이 벌어진다. 사진 촬영을 하며 은근슬쩍 반말을 하는 윤석에게 “내가 누난데 왜 ‘야’라고 그래?”라고 똑 부러지게 말하는 준서가 사장 앞에서 덩크슛을 했다는 아빠에게 “나 다니던 유치원에도 그런 애가 있었거든, 뭐 좀 피곤한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지”라고 말하던 정원이를 꼭 닮았다면 “알았어, 누나. 그런데 한 살 차이는 반말해도 되지 않아?”라고 슬쩍 눙치는 윤석이는 니노보단 본인 말대로 “코믹한 면이 있는” 소년이다. 하지만 화해랄 것도 합의랄 것도 없이 카메라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사진기자의 주의 한 번에 방금 일은 까맣게 잊은 채 이를 잔뜩 드러내며 미소 짓는 아이들의 모습은 마냥 귀여울 수밖에 없다.

사실 클로즈업되어 브라운관에 가득 찬 얼굴을 보며 짐작하는 것보다 7살 소년과 8살 소녀의 몸은 참 작고, 그래서 귀엽기만 하다. 햄버거 하나를 반으로 잘라 그나마도 빵이나 패티, 토마토 따로 어머니가 집어 주는 걸 작은 입과 볼로 오물거리며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 아이들이 SBS <왕과 나>와 MBC <태왕사신기>, MBC <신돈> 같은 대하사극부터 MBC <내조의 여왕>과 SBS <아내의 유혹>처럼 높은 시청률의 현대물까지 다양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작품들에 출연했다는 걸 믿기란 쉽?지 않다. “우주에서 (별을 따기 위해) 로켓 문을 열어도 되는지” 궁금해 하고(정윤석), 촬영장에서 “코디 이모들이랑 ‘쎄쎄쎄’를 하며 노는”(방준서) 천상 아이들이라는 걸 알게 되면 더더욱.

조금 미안하지만 좋은 배우가 되어 주겠니

그래서 자기 대사가 없는 순간에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지애가 말하는 걸 주의 깊게 듣는 연기로 프레임의 공백을 메울 줄 아는 준서나, 새 엄마인 구은재의 옷을 찢어놓고선 할머니에겐 아무 것도 모른단 표정을 짓던 윤석이나 어른 못지않은 연기력을 갖췄지만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들은 아니다. 그보다 더 긍정적인 건 어른들이 좋아할 착하고 순진한 아이의 스테레오타입을 흉내 내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카메라 앞에서 외웠던 대사가 차근차근 나오지만 누구나 연습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라는 윤석이의 말대로 이들의 연기 능력은 어느 정도 재능에 기댄 것이겠지만 이 새로운 형태의 아역배우들을 규정하는 가장 큰 부분은 이들이 “얼굴이 예쁘니까 (내) 마음도 예쁜 거”(정윤석)라고, “화장하고 짧은 치마를 입고 싶어서 빨리 20살이 되고 싶다”(방준서)고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뜻과 원하는 걸 말할 줄 안다는 점이다.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한 이 아이들이 무언가를 흉내 내는 건 오직 카메라 앞에서 정원이와 니노, 혹은 반야(<신돈>)와 아직이(<태왕사신기>)가 될 때뿐이다. 그저 건강히 잘 자라기만해도 충분할 아이들에게 조금 미안해도 좋은 배우 역시 되어주길 바라게 되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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