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웃는 얼굴’로 기억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살인적인 스케줄과 삐걱대는 시스템이 정신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드라마 현장에서 웃음을 잃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감독은 실로 희귀한 존재다. KBS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그 성격 좋던 정지오(현빈) 역시 현장에만 나가면 엄한 시어머니로 변신하곤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사는 세상>을 만든 표민수 감독은 현장에서의 웃는 얼굴이 유독 인상적인 감독이다. “왜, 저도 화가 날 때가 있지요. 촬영이 예정대로 안 되면 속이 바짝바짝 타요. 그런데 현장에서 사람들하고 얘기하는 걸 좋아해서 스태프들이 미처 준비를 못 했으면 잽싸게 배우들에게 가서 어제 반응이나 오늘 신의 표현 같은 걸 가지고 수다를 막 떨지요. 그러다 준비 다 됐다고 하면 ‘기다리게 해서 미안. 얼른 시작하자~’ 그러고, 배우들이 늦으면 스태프들에게 가서 ‘오늘 얼굴이 안 좋다. 음료수 좀 마실래?’ 하면서 시간을 때워요 (웃음)” 91년 KBS 입사 후 <거짓말>, <바보 같은 사랑>, <푸른 안개> 등 깊이 있는 멜로드라마와 <풀 하우스>, <넌 어느 별에서 왔니> 처럼 대중적으로 히트한 작품들을 꾸준히 내놓았던 감독이지만 그는 여전히 ‘일 잘 하는 조연출’처럼 현장을 뛰어다니는 모습으로 더 익숙하다.

여섯 형제 가운데 막내로 북적대는 집안에서 자랐고, 대학 시절에는 학교에 가는 대신 영등포 시장, 남대문 시장, 평화 시장을 돌며 혼자 사람 구경하는 걸 더 좋아했던 그가 우연히 연출부로 일했던 뮤지컬을 통해 “해답이 없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얻는 느낌대로 하는 작업”에 대한 매력을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고 누군가와의 소통에서 행복을 얻는다는 표민수 감독이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송혜교, 현빈에게 주문했던 멜로의 표현 역시 “뭔가를 하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것도 할 수 있다. 일에 대한 사랑을 열정이라 하고 동료에 대한 사랑을 동료애라 부르고 국가를 사랑하는 걸 충성이라고 부르며 구분하지만 사실 좋아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려는 마음은 똑같다. 보통 멜로드라마에서처럼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일을 내팽개치고, 일을 사랑하면 사람 따위는 아무 것도 보지 않는 게 아니라 일도 동료도 가족도 애인을 사랑할 때처럼 그 때 그 때 에너지를 쏟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멜로드라마는 보는 것보다 만드는 게 더 재미있고, 멜로를 보면 즐기기보다는 분석하게 된다”는 직업병 때문에 멜로드라마는 잘 보지 못한다는 그가 자신이 만들지 못했던, 그래서 부러움을 가지고 있는 드라마들은 다음과 같다.

SBS <모래시계>
1995년, 극본 송지나, 연출 김종학

“방송국에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는데 비디오테이프에 계속 녹화를 하면서 봤던 기억이 나요. 드라마 OST를 돈 주고 산 것도 처음이었고, ‘백학’이라는 곡을 불렀던 러시아 가수의 앨범도 샀지요. 사실 <모래시계>에 끌렸던 건 꼭 시대적인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대개 산을 보면 나무를 보지 못하고 나무를 보면 산을 보지 못한다고들 하는데 이 드라마는 산처럼 장대한 이야기를 펼치면서 그 안의 나무들, 인간 군상들을 하나씩 보여주는 캐릭터 플레이가 정말 좋았거든요. 제가 갖지 못한 능력에 대한 부러움 같은 걸 느끼기도 했고, 또 그 시절에 이런 드라마를 만들려고 했던 제작진의 뚝심 같은 게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지요”

MBC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1996년, 극본 노희경, 연출 박종

“95년에 저는 문영남 작가의 <바람은 불어도>의 조연출을 하고 있었는데 그 작품에 출연하셨던 나문희 선생님께서 ‘이게 끝나면 MBC 단막극을 하나 할 건데 괜찮은 작가가 있으니 만나 보라’고 하셔서 노희경 작가를 처음으로 만났어요. 그 자리에서 했던 얘기가 한 쪽이 에이즈에 걸린 부부에 대한 드라마를 함께 만들어보자는 거였는데 문영남 작가님이 제 단막극 데뷔작을 써주기로 하시면서 저는 정성모 씨와 강부자 선생님이 출연하신 <깊은 바다>를, 노 작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만들었지요. 이 작품에서는 시어머니 역의 김영옥 선생님과 며느리 역의 나문희 선생님이 반말로 주고받던 대사나, 나문희 선생님이 죽음을 앞두고 주변을 정리하면서 ‘내가 죽으면 여길 열어보면 돼’라고 당부하던 장면 같은 게 기억에 남아요. 박종 감독의 연출과 김영철 촬영감독의 영상도 좋아서 그냥 빠져들었던 작품이지요”

MBC <다모>
2003년, 극본 정형수, 연출 이재규

“학교 다닐 때 저는 영어를 못 하고 국어, 수학을 잘 하는 아이였어요. 그래서 드라마에서도 액션을 못 하니까 멜로를 잘 해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다모> 1회를 보고 액션에 감탄했다가 2회에서 너무나 정확하고 적절하게 들어가는 멜로의 묘사, 감정 플레이에 또 놀랐어요. ‘퓨전사극’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던 때에 <다모>는 정말 새로운 스타일의 드라마였는데 멜로와 액션을 둘 다 이렇게 잘 하다니! 부럽다! (웃음) 저도 노희경 작가도 액션이나 사극을 한 번도 안 해봤는데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손규호(엄기준)가 연출했던 드라마 <천지연>이 사실 약간 <다모> 느낌의 퓨전 사극이었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사극 특유의 의상, 와이어 액션, 검이나 활 같은 무기를 보여주면서 메이킹 필름 같은 느낌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요즘은 <바보 같은 사랑>이나 <푸른 안개> 같은 멜로를 하고 싶어요.”

SBS와 일본 아사히 TV가 함께 제작해 올 하반기 중 방영 예정인 텔레시네마 프로젝트에서 <고교교사>, <장미 없는 꽃집> 등으로 유명한 일본의 작가 노지마 신지와 표민수 감독의 콤비 작업을 기대했던 이들은 다소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 이 작품은 작가의 사정으로 제작 여부가 불투명해 졌다. “99년의 <슬픈 유혹> 이후 10년만의 특집극이고 노지마 신지 작가와 새로운 멜로드라마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기대했지만 지금으로선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표민수 감독의 올해 나머지 계획은 <그들이 사는 세상>을 주제로 한 대학원 논문 집필과 하반기 부활 예정인 KBS 단막극을 한 편 정도 연출하는 것이다. 또, 많은 팬들이 기다리고 있는 노희경 작가와의 공동 작업은 각자 다른 파트너와 작품을 마친 뒤인 내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 같다고 한다. “<풀 하우스> 같은 기획 드라마를 하게 된다면 내 안으로 기획을 끌고 오는 대신 그 뼈대 위에 내 색깔을 입혀야 할 것 같아요. 쉬운 작업은 아닌데 그 과정을 돌파하면서 또 배우는 게 있지요. 그리고 노희경 작가와 다시 만날 때는,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게 될 텐데 요즘은 <바보 같은 사랑>이나 <푸른 안개>같은 멜로를 좀 하고 싶어요. 사랑의 형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것들은 아직도 얘기해보고 싶은 내용이거든요”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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