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유혹>이 독한 드라마라면 인간이란 존재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어디까지 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집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배신한 친구와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두 번째 삶을 사는 구은재부터 정하조에 대한 복수를 위해 은재를 이용하는 민 여사, 그리고 건우를 차지하기 위해 은재를 곤경에 몰아넣는 민소희까지 모두들 독하기 그지없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역시 신애리다. 단순히 그녀가 최고의 악녀라서가 아니다. 인물들의 이합집산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그녀는 오직 자신과 니노, 교빈의 이익과 은재에 대한 보복만을 위해 흔들리지 않고 악행을 벌이고 갈등을 만들어냈다. 그런 면에서 <아내의 유혹>을 이끈 진정한 주인공은 신애리일지도 모른다. 120회가 넘는 시간동안 신애리로 지내고, 인터뷰 도중 전날 방영분(124회)을 떠올리며 애리가 측은하다며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그녀에게 동화된 연기자 김서형에게 신애리와 함께한 시간의 의미에 대해 들어보았다.

마지막 촬영은 언제였나.
김서형
: 지난 주 목요일(4월 23일)이다.

홀가분하겠다.
김서형
: 홀가분하긴 한데… 마지막 회가 방송되지 않아서 그런지 아직 안 끝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뭔가 더 해야 하거나 더 할 수 있다는 느낌? 그 전엔 작품 끝나면 쉬느라 바빴는데 이번엔 지금의 에너지를 가지고 새로운 걸 바로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막장드라마? 거기에 대해 말하는 건 연기자의 몫이 아니다”

이번에야 말로 쉬느라 바쁠 작업 아니었나. 장기 레이스였고, 체력적으로도 힘든 역할이었는데.
김서형
: 쉬고 싶지 않다. 이번 작업을 통해 배운 게 많고 지금 이 기분 그대로 일을 하고 싶다. 그리고 이번 역이 힘들다고 하는데 내가 원래 드라마든 영화든 작품을 할 땐 나 자신을 혹사하는 타입이다. 스스로를 가두고 혼낸다. 사실 그래서 어떤 역을 하든 힘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과거 작품 중 영화 <어느 날 갑자기>나 <검은 집> 같은 호러물은 역할 자체가 힘든 역이었고. 그래서 ‘난 왜 이렇게 힘든 역할만 할까’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물론 이번에는 몇 달 동안 소리를 지르다보니 좀 더 빨리 피곤해지긴 했지만.(웃음)

스스로를 괴롭힌다는 게 최대치를 끌어내는 건가.
김서형
: 그런 의미인 거 같다. 내 옆에 있는 매니저나 코디들이 많이 피곤해 할 거다. 나는 만족을 잘 못하는 사람이다. 만약 내가 이만큼 하면 사람들은 잘한다고 하는데 나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자꾸 확인한다. ‘어땠니, 나는 이런 느낌으로 했는데 어떻게 보였니’ 이런 식으로.

그러면 이번 <아내의 유혹>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는 어떤가.
김서형
: 어떤 경우든 원했던 만큼 그림이 100퍼센트 나올 수는 없는 거 같다. 다만 이번에는 잘했다기보다 내가 열심히 한 게 보였다고 하더라. 난 그 정도면 만족한다. 나 스스로도 이번 작품에선 정말 열심히 했다고 자부하고. 작품 내적으로 외적으로 여러 얘기가 많았지만 그 모든 걸 다 떠나서 내겐 정말 의미 있는 작품이다. 사실 1994년에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지만 그 땐 뭘 모르고 일을 했던 터라 열정과 일을 하고 싶다는 욕구만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나이를 먹고 일을 알아가면서 했던 작품들은 언제나 새롭고, 그 때마다 데뷔하는 기분이었는데 이번엔 유독 더 신인 같은 기분이었다. 예전 작품에서도 연기는 열심히 했었지만 카메라에 대한 시선 처리나 전체적으로 시스템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 너무 어설프게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 금보라 선생님, 윤미라 선생님 등 베테랑들과 일을 함께 하면서 선수까진 아니어도 그 길로 걸어갈 수 있는 프로페셔널한 요소를 얻은 것 같다. 그래서 아까 말한 것처럼 쉬고 싶지 않다.

말한 것처럼 작품의 설정과 개연성에 대해 여러 평가가 있다.
김서형
: 말들도 많고 내게 막장드라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난 연기자기 때문에 <아내의 유혹>은 어쩌고저쩌고 말하는 건 내 몫이 아닌 것 같다. 연기자는 그냥 어떤 캐릭터를 만났을 때 그 역할을 열심히 할 뿐이다. 물론 그 연기에 대해 욕을 먹거나 좋은 말을 듣는 건 연기자의 몫이지만 딱 거기까지라고 생각한다.

결국 연기자가 책임지는 건 배역까지란 건가.
김서형
: 그렇다. 작품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책임을 질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신애리는 어떻게 보면 순수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결국 신애리 얘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겠다. 솔직히 최근 불쌍한 모습을 보이지만 언제든 기회를 포착하면 은재를 배신할 수 있는 인물 같다.
김서형
: 그게 바로 신애리이지 않을까 싶다. 겉모습이 아파서 부드러워 보일 수 있지만 그 와중에도 다른 사람에게 뭔가 위협을 느끼게 했다면 스스로 신애리의 맥락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유지한 것이 아닌가 싶다. 거기서 다르게 바뀐다면 정말… (웃음)

회개하면 실망할 거 같다.(웃음)
김서형
: 이미 애리와 교빈이 바다에 뛰어드는 결말이 공개되었는데 나는 애리가 회개해서 그랬는지는 의문이다. 작가님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연기할 땐 그런 마음가짐이 아니었던 거 같다. 그보단 정리하는 기분이랄까? 그냥 나 한사람이 이렇게 됨으로써 모든 악연들이 정리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연기를 했다. 감정적으로는 뉘우침보다는 허망함에 더 가까웠던 것 같고. 아파서 허무한 게 아니라 그렇게 아득바득 살아온 인생사에 대한 허망함. 어쨌든 마지막에 애리와 교빈이를 그렇게 풀어주셔서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본인이 해석한 신애리의 가장 큰 원동력 혹은 욕망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김서형
: 이젠 너무 흔해서 안 쓰는 말이지만 사랑이 문제였던 것 같다. 사랑이 부족했다. 나도 친척집에서 살아봤지만 남의 집 살이라는 게 쉬운 게 아니다. 피가 섞인 친척이라도 그게 생각 같지 않다. 애리로선 당연히 애정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거다. 나는 현대인들 대부분이 개인주의 사회에서 약간의 정신질환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거기에 애정결핍까지 겹쳐지면 신애리처럼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결국 초지일관하는 인물이라는 건데 그것 때문에 <아내의 유혹>에서 신애리의 존재가 각별한 것 같다. 언제나 변함없는 태도로 은재를 공격하며 갈등을 만들어낸다는 면에서 드라마를 이끈 존재 아닌가.
김서형
: 드라마 게시판을 보다가 누군가 ‘김순옥 작가가 신애리일 것이다’라는 얘기가 있었다. 그 땐 왜 그런 글이 올라왔나 싶었는데 어쩌면 그 질문대로 드라마를 초지일관 이끈 게 신애리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실 신애리라는 역할에만 묶여 살아왔기 때문에 전체 그림에서 신애리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잘 몰랐다.(웃음) 나중에 작가님을 만나볼 기회가 있는데 그 때 좀 물어보고 싶다. 애리를 통해 보여주려 한 게 그것이었냐고.

역할에만 묶였다고 했는데 원래 뭔가를 맡으면 그것만 보이는 타입인가?
김서형
: 시야가 좁아진다. 그래서 내가 나를 많이 괴롭히고, 매번 작품을 할 때마다 힘들다고 생각하는 거다. 특히 이번 작품 하면서는 정말 다른 걸 안 본 것 같다. 어쩌면 그런 면이 신애리와 닮은 것 같다. 굉장히 단순한 인물 아닌가. 자신이 느낀 결핍을 니노에겐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아득바득 가족을 유지하려 하고 그걸 위해선 악행도 서슴지 않고. 어떻게 보면 순수한 인물이다.

순진하진 않고.(웃음)
김서형
: 그렇진 않지.(웃음) 그냥 순수한 거다. 그러니까 사람들과 대화의 단절도 생기는 거고. 다 내 생각,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걸 모르는 거지. 그러니 분노하게 되고.

“나를 악역으로 다시 쓸 대범한 분들이 있을까?”

정말 많이도 ‘버럭’거렸다.
김서형
: 악역인데 어떻게 해야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지 고민하다 그냥 시원하게 지르기로 했다. 그래서 ‘버럭’하게 됐다. 대본에도 처음엔 그런 게 없다가 나중엔 ‘버럭’이란 지문이 생겼다.(웃음) 어느 정도 감정을 눌러서 표현해야 할 필요가 있으면 ‘버럭’하지 않았을 텐데 대사를 볼 때 확 질러야겠다는 감이 왔다. 또 어느 정도 감정을 누르는 톤은 (장)서희 언니가 보여주고 있었고. 사실 ‘버럭’하는 톤을 고수하려 했던 건 아닌데 나중엔 한 단계 낮춰서 화를 내면 감독님이나 스태프들이 애리답게 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어떤 날은 힘들어 죽겠을 때도 있었고.

육체적으로는 당연히 힘들었을 테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 받진 않았나.
김서형
: 그보단 소리를 지르면서 머리가 하얘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땐 스스로를 다그쳐서 더 빨리 무너질 때가 있다. 그러면 그에 대한 실망감이 얼굴에 다 드러난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 모두 맥 빠지고 힘들고. 난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보는 사람들도 힘들었던 거다. 그런 걸 깨닫고 나 혼자만 열심히 하면 끝이 아니라 전체 분위기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걸 배운 게 이번 드라마의 진정한 수확이다.

게다가 더 유명해지기도 했다.
김서형
: 스태프들이 그런다. ‘이제 스타가 됐네요?’ 그러면 나는 ‘예전부터 스타였어요’라고 대답한다. TV에 나오면 스타 아닌가? 어차피 모두들 자신이 연예인이라 생각하고 일을 하는 거니까. CF를 많이 찍는 스타까진 바라지 않는다. 신애리든 뭐든 어떤 역할이 계속 들어오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행복하다.

화려함에 대한 미련이 없어 보인다.
김서형
: 나는 예쁜 배우가 아니다. 게다가 연기를 뛰어나게 잘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대중에게 받는 인기도 중요하지만 그보단 같이 일하는 분들에게 성실하게 일 열심히 하는 배우로 평가 받고 어떤 역할이든 꾸준히 하는 게 더 중요하다.

꾸준히 악녀 연기만 들어오면?(웃음) 물론 ‘이 사람의 악녀 연기는 탁월하다’는 연출자의 판단과 함께.
김서형
: 나밖에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면 좋은 일이다. 물론 나쁘게 생각하면 한 없이 나쁠 수 있다. 이번 작품 하기 전엔 고정된 이미지로 역할이 들어오는 걸 기피했었으니까. 역할이 들어온단 사실을 감사하게 여기기까진 시간이 좀 걸렸다. 어쨌든 지금은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김서형 밖에 없다’고 낙인을 찍으면 기꺼이 일할 것 같다. 다만 이번 신애리가 굉장히 센 캐릭터인데 나를 악역으로 다시 쓸 대범한 분들이 있을지 궁금하다.(웃음)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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