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에선 복수가 쉽잖아요. 적이 아버지를 찌르면 난 무공을 쌓아서 그자의 목을 베면 되고.” 김신(박용하)의 말처럼 강호의 의리가 살아있는 무협지의 세계에선 적도, 복수할 방법도 단순하고 명쾌하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로 돌아가는 KBS <남자이야기>에서는 복수가 제 갈 길을 찾기까지 8회라는 시간이 걸렸다. 채동건설을 향해 날린 첫 번째 주먹이 싱겁게 되돌아온 뒤에야 비로소 김신은 자신의 적과 그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김신과 달리 <남자이야기>가 아직도 모르는 것들이 있다. 본격적인 복수를 향해 브레이크 없는 직진만을 앞두고 있는 이들은 무엇을 놓치고 있을까? 조지영, 김선영 TV평론가가 얘기한다. /편집자주

그 남자, 김신(박용하)은 평범하게 살았다. 특별할 것 없는 그의 일상 속에는, 아버지 같은 형, 누나 같은 형수와 천사 같은 조카들이 있었고 사랑스러운 연인도 함께 했다. 다니던 직장마다 3개월을 버티지 못했다는 게 유일한 약점이었던 그 남자는, 다혈질에 외곬이지만 대체로 유쾌한 성격을 자랑했다. 김신이 살인미수 혐의로 감옥에 들어가기 전, 이 남자에 대해서 시청자에게 주어진 힌트는 여기까지가 전부였다. 감옥에 다녀온 3년 간 무슨 레벨 업 훈련을 받았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옥중에서 전국구 조폭과 인적 네트워크를 쌓은 것, 재야 주식고수와 사적으로 가까워진 것이, 3년이 넘는 감옥생활에서 얻은 김신의 수확이다. 출소 이후 ‘채동 건설의 몰락’이라는 목표가 김신을 움직이게 만든다. 창졸간에 억울하게 형을 잃고 행복했던 시간이 끝장나니, 사람은 얼마든 변할 수 있다.

분노가 사람의 능력치를 끌어올릴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런 심적인 동기가 사람의 능력 자체를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을까? 마음먹은 대로, 못하는 것이 없기로는 김신의 연인이었던 서경아(박시연)도 마찬가지. 김신처럼 평범하게 하루하루 살던 이 여자는, 어느 날 뜻한 바 있어, 소위 말하는 ‘텐프로’의 삶에 진입한다. 수시입학인지 특차전형인지, 그 어렵다는 ‘강남’에서 바로 시작한 경아는, 말하자면 타고난 텐프로 같다. 결심이 어려웠을 뿐, 그녀가 텐프로가 되는 데는 조금도 난관이 없었다. 김신과 서경아는 알고 보면 뭐든지 ‘생각대로’ 실행할 수 있는 능력치를 타고난 사람들인가?

<남자이야기>는 기묘하다. 인물의 전사(前史)가, 능력과 경험이, 약점과 콤플렉스가 설명되는 인물은 김신이 아니라 채도우(김강우)이며, 서경아가 아니라 채은수(한여운)다. 시청자들이 감정이 결핍된 도우에게 이입되고 매혹을 느끼는 것은, 캐릭터 자체의 매력이라기보다는 채도우가 김신보다, ‘경험적으로’ 친절하기 때문이다. 김신이 드라마 전반부에 보여준 것은 절절한 억울함뿐이고, 서경아가 표현한 것은 김신에 대한 안타까움뿐이지만, 그 사이에 채도우-채은수 남매는 복잡한 가족사에, 채동건설을 둘러싼 대립항, 선악을 나눠가진 성격의 극단적 분할과 저마다의 콤플렉스까지 설명해줬다. 채도우가 눈꼬리를 움직일 때 섬뜩한 느낌이 전해지는 것은, 김강우라는 배우가 가진 흡인력도 크지만, 드라마의 디테일한 무게중심에 빚진 바 크다. 시청자는 채도우가 싸이코패스이자 주가조작의 달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 클래식 마니아이며, 술에 절대 취하지 않는 것도 안다. 그러나 김신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그가 굉장한 외곬수이며, 정이 많고, 대단한 맷집의 소유자라는 것이 전부인데, 갑자기 그가 변장에 능한, 자산가치 4천 5백억의 건설회사 하나를 집어삼키는 프로젝트의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니, 어딘지 당황스럽기도 하다.

김신과 채도우의 ‘진짜’ 불리한 싸움

물론 김신의 주변에 대단한 능력가들이 하나 둘씩 포진하고, 그들의 강점이 부각되면서, 극의 흥미로움은 서서히 배가되고 있다. 그러나 박문호(이문식), 안경태(박기웅), 제이미(이필립) 같은 인물들의 특징이나 전사를 시청자가 경험하게 하는, 세심한 배려가 없었다면, 극적 재미도 상당부분 줄어들었을 것이다. 박문호가 변호사 행세를 하고 안경태를 찾아왔던 장면은, 이 두 사람이 앞으로 <남자이야기>에 기여하게 될 영역은 무엇인지 일러주었다. 빠른 호흡으로 이야기의 긴장감은 높아지고 있지만, 정작 김신과 서경아에게 할당되었어야 할 성격의 디테일한 특징이 빠진 채 진행되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 그러나 드라마는 이미 출발선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 가족의 자살, 그 원인을 제공한 대기업에 복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실 새로울 것이 없다. 이 세계는 이미 같은 작가가 대본을 썼던, 허영만 원작의 <퇴역전선>(1987)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리고 저마다 특기 적성을 가진 사람들이 공통의 목적으로 모여서 한바탕 사기 치는 이야기 역시, 영화 <오션즈 일레븐>부터 <범죄의 재구성>까지 널려 있다. 사기의 과정, 치고 빠지는 ‘작전’이 종종 흥미롭기는 하지만, 결국, 이야기의 미묘한 디테일은, 캐릭터의 싸움으로 좁혀진다. 김신이 혼자 힘으로 채도우와 맞붙기 어려운 것은, 능력의 차이이기 보다는, 캐릭터의 볼륨감 때문이다. 김신은 과연 이 불리한 싸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글 조지영

작가 스스로 대한민국 3부작이라 칭하지 않더라도, KBS <남자이야기>는 그 주제의식면에서 MBC <여명의 눈동자>와 SBS <모래시계>를 잇는 일종의 연작처럼 보인다. 두 전작들이 거대이념의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하는 영웅적 개인들의 이야기였다면, <남자 이야기> 역시 그 이념이 사라진 자리를 후기 자본주의가 대체했을 뿐 이야기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심화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대한민국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막강하고 거대한 괴물이어서 그와 대면해야하는 인물들의 모습도 싸움의 방법도 이전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남자이야기>는 송지나 특유의 낭만적 영웅주의가 21세기 대한민국의 서바이벌 게임에 적용된, 이를테면 신자본주의 시대의 영웅담이다.

절대악에 대항하는 인물들

이것은 이미 SBS <쩐의 전쟁>과 영화 <타짜>에서 징후적 서사로 나타난 바 있다. 두 드라마에는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단숨에 승자가 될 수 있는 비범한 재능을 가진 자본주의형 히어로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그늘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사채와 도박의 부조리한 세계를 무대로 사악한 자본가들과 대결을 벌이지만 그것이 종국에 개인적 차원의 이야기로 그친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였다. 이에 비해 <남자이야기>는 개인적인 동기에서 출발해 사회적 성장을 해나가는 인물들을 통해 보다 정확하게 자본주의의 심장부를 겨냥하는 전면전을 전개하고 있다. 이 드라마의 이러한 사회적 의식은 먼저 김신(박용하)의 드림팀이 대결하는 채동건설의 상징성을 통해 확인된다. 채동건설은 그 자체로 한국 자본주의의 폭력적 역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빈 깡통과 빈 박스를 주워 나르며’ 채동건설을 일궈낸 재벌 1세대 채동수 회장은 그가 존경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세계관을 그대로 이어받은 폭압적 경제 성장의 주역이다. 근면과 성실을 미덕으로 내세우는 그는 ‘그깟 종이 쪼가리’인 주식이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요즘 세태를 못 마땅해 하지만 어두운 일을 도맡아했던 도실장(이병준)의 존재처럼 폭력과 뇌물로 회사를 확장시켰다. 그리고 그의 아들 채도우(김강우)는 주식을 조작하고 정보력을 동원하여 기하급수적으로 부를 팽창시키는, 더욱 악랄하게 진화된 형태의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적들에 부여한 이러한 사회적 함의를 통해 이에 대항하는 김신 일당도 자연스럽게 사회적인 인식을 획득하게 된다. 작가는 이미 도우에게 몰락당한 전통적 제조업체의 가족이라는 김신의 배경, 미네르바를 연상시키는 경태(박기웅), 아버지의 죄를 개인적 봉사로 사죄했던 은수(한여운) 등의 사연을 설정해 미리 인물들의 성장의 개연성을 확보해놓았다. 전지전능한 영웅 한 명의 능력이 아니라, 비범하지만 어딘가 조금씩 부족한 인물들의 연대를 통해 절대악에 대항하는 방식은 최근 영웅담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범죄드라마가 줄 수 있는 쾌감의 사각지대

현재 <남자이야기>의 가장 아쉬운 점은 이 드라마가 충분한 장르적 재미를 주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영웅담을 신자본주의 시대에 어울리는 화법으로 창조하면서 영화 <오션스 일레븐>과 같은 범죄드라마의 형식을 가져왔는데 그 의욕에 비해 능숙한 장르적 쾌감을 안겨주는 데는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채회장에게 50억 사기를 치는 드림팀의 첫 작업은 3회에 가까운 분량이 할애됐지만 상대가 허술하게 걸려든 탓에 어설픔만 남겼다. 그 때문에 복수에 앞서 채동건설의 직원들이 걱정된다던 김신의 말 역시 인식의 성장을 의미하는 중요한 대사였지만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사회적 리얼리즘에 가까운 작가의 진지한 주제의식이 아직 장르의 문법 안에 녹아들지 못한 탓일까. 퓨처냉동이 몰락하고 김신이 감옥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을 정통 드라마의 문법으로 그렸던 극 초반이 사회적인 이슈와 시대정신을 자연스럽게 어우르면서 짜임새 있게 전개되었던 점을 생각할 때 앞으로 이 드라마의 숙제는 바로 이 부분에서 풀어야 할 것 같다.
글 김선영

글. 김선영 (TV평론가)
글. 조지영 (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