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연애시대>로 가장 유명하지만 독특한 정서로 마니아들을 열광시킨 KBS <얼렁뚱땅 흥신소>와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 <꽃미남 연쇄테러사건> 등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의 작품들을 써 온 박연선 작가는 “공포물, 액션, 스릴러, 슬래셔 등 드라마가 센 장르물이 좋다. 만화를 좋아해 그림을 잘 그렸다면 만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장르물 마니아이기도 하다. 물론 장르물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사롭지 않은 설정과 남다른 캐릭터, 복잡한 줄거리는 대개 늘어놓을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그 작품을 보지 않은 상대에게는 지극히 김빠지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박연선 작가는 상대를 1분 만에 그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다. 아무리 낯선 이야기라도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물론 각 캐릭터의 성격과 디테일을 눈에 보일 듯 짚어주면서 결정적인 대사까지 인용하는 방식은 사실 그가 대본을 쓰는 방식과도 비슷하다.

“메인 플롯을 중심에 놓고 그 이야기의 재미를 극대화하는 내용들을 구성해요. 여주인공은 한 명인 게 좋을까 두 명인 게 좋을까, 한 명이 더 긴박감 있는 분위기를 만들겠구나. 이 공간에 누군가 들어온다면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그가 만약 사람을 죽였다면 어떤 사람을 죽였을까. 이 사람의 심리 상태가 어떻기 때문에 다른 주인공들을 미워하는 걸까.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방사선처럼 여러 조각들이 퍼져 나가게 하는 방식이 저한테 맞아요.” 그런 그가 고심 끝에 고른 흥미진진한 장르 드라마들은 다음과 같다. 물론 <슬램덩크>와 <기생수>, <지뢰진> 등 수많은 만화와 <프리즌 브레이크>, <번 노티스>, <키사라즈 캣츠아이> 등의 시리즈에 대한 박연선 작가와의 대화 역시 못지않게 흥미로웠다.

MBC <서울 시나위>
1989년, 극본 송지나, 연출 이강훈 오현창

“<서울 시나위>는 로드무비식 드라마에요. 우연히 만난 두 남자(박상원, 변우민)와 한 여자(임미영)가 고물 지프차를 타고 다니면서 전국을 돌며 오늘은 이 마을 가서 이런 일을 겪고, 내일은 저 마을 가서 저런 일을 하는 이야기. 그렇다고 삼각 멜로나 자극적인 내용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극 중에서 박상원 씨가 시를 좋아해서 적재적소에 시 구절이 들어갔는데, 그런 지적인 분위기가 좋았어요.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옛날엔 저런 드라마도 만들어졌구나’ 하는 거죠. 당시가 드라마의 장르에 있어서는 지금보다 훨씬 풍부했던 것 같아요. 홈드라마, 형사 드라마, 전쟁 드라마, 공포 드라마, 스포츠 드라마 등. 그런데 요즘은 장르의 다양성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서 아쉬워요.”

美 <위기의 주부들>시즌 1 ABC
2004년

“평화롭고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마을에서 평범한 주부가 죽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돼요. 그리고 그 죽은 여자의 내레이션으로 이야기를 풀어 가는데 굉장히 냉소적인 시선으로 자기 친구와 이웃들에게 거리감을 주는 방식을 사용하죠. A가 걸어가고 있으면 B가 그를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지만 등 뒤로 총을 들고 있는 상황이나 ‘운명의 수레바퀴는 돌아가지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는 돌지 않는다. 언제나’ 같은 내레이션이 인상적이었어요. 아마 우리나라에서 만들 수 있는 장르 드라마가 이 정도의 선이 아닐까 생각해요. 미스터리만으로는 좀 어렵지만 이 여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주가 되고 치정이라는 소재가 들어가면서 중간 중간 미스터리가 살짝 얹히는 식으로.”

日 <공범자> (共犯者) NTV
2003년

“아주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30대 여자가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면서 독백을 해요.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14년 전, 나는 사람을 죽였다’. 그동안 이 여자는 공소시효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자기 행복을 위해 아무 것도 안 하고 살았어요. 예쁜 옷도 안 입고 맛있는 것도 안 먹고 남자도 안 만나고, 그랬는데 공소시효 만료를 두 달 남기고 어떤 남자가 여자를 찾아와 ‘난 네가 사람을 죽인 걸 알아’ 라면서 아파트에 눌러 살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다가 여자는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데, 이 얘기에는 굉장한 반전이 있어요. 저는 1회를 보면서 눈치 채 버리는 바람에 김이 좀 빠졌지만 그래도 아주 흥미진진한 작품이었어요. 우리나라도 드라마 러닝 타임을 좀 줄이고 미니 시리즈가 12회 정도만 된다면 이런 장르 드라마들이 좀 많이 만들어질 수 있을 텐데”

“자신을 가리기 위해서 살아가는 <백야행>의 주인공들”

박연선 작가는 현재 손예진, 고수 주연으로 촬영에 들어간 영화 <백야행>의 각색 작업을 지난 해 마쳤다.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백야행>의 각색을 맡은 것은 “묘하게 기분 나쁘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특히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두 주인공이 처한 기묘한 상황과 촘촘한 사건을 정리하며 그는 “객관적으로 보면 ‘못된’ 아이들인데, 관객들이 얼마큼 그들을 이해 가능하게 만드느냐가 중요했다. 그래서 그들이 행복하려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 자신을 가리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백야행>에 이어 그가 요즘 올 겨울 정도 방영을 겨냥해 쓰고 있는 작품은 심리 미스터리 스릴러다. “누군가로부터 똑같은 내용의 편지를 받고 학교 기숙사에 남아 있던 8명의 고등학생이 눈으로 고립된 산 속에서 각자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내용이에요. 주인공은 여러 명인 데다가 시간과 공간이 제한되어 있다 보니 굉장히 쓰기가 힘들어요” 드라마 시장이 불황이다 보니 제작 또한 만만치 않을 거라는 게 느껴지지만 박연선 작가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독특한 흡인력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다음엔 조금 더 쉽게 쓸 수 있는 걸 할 거에요. 꿈을 가진 어른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서로 잘 안 맞는 두 사람이 파트너가 되면서…” 본 적도 없는 캐릭터들이 그의 이야기를 통해 눈앞에 등장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무엇이 되었든, 하루 빨리 그의 새 작품을 보고 싶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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