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 직원에겐 피도 눈물도 없다. 아이까지 낳고 사는 부인에게는 관심도 애정도 없다. 오로지 성공에 목숨 걸고 첫사랑에 찌질대는 한심한 남자, 그런데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 MBC 의 한준혁은 신기한 캐릭터다. 수려한 외모와 탄탄한 스펙, 그러나 그가 시청자들에게 사랑받는 순간은 첫사랑의 남편에게 깐죽대다 맞아서 코피를 흘리고도 ‘센 척’ 할 때, 책상에 엎드려 자다 들키고도 위엄을 잃지 않으려 애쓸 때, 냉철한 표정을 무너뜨리며 속마음을 드러낼 때다. 정극과 코미디를 자유롭게 오가며 이 남자, 한준혁을 연기하는 배우는 바로 올해 초 KBS 에서 ‘꽃보다 경종’ 붐을 일으켰던 최철호다. 올해 나이 마흔, 평생의 반을 연기자로 살았던 그가 드디어 ‘대세’가 된 것이다. 에서 그를 만났다. 솔직하고 소탈한 성격으로 이름난 최철호와의 인터뷰는 기대만큼 유쾌했다.

지난 주 <내조의 여왕>에서는 김이사(김창완)와의 사우나 신이 화제였다. ‘40대의 복근이 저 정도라니’라며 감탄하는 시청자들이 많던데. (웃음)
최철호
: 에이, 뭘 그 정도를 가지고. (웃음) 작년 4월 11일에 술을 끊었다. 원래는 술을 정말 좋아했는데 결혼하고 아이가 생겨 보니까 술 때문에 불화가 많이 생겼다. 술 마시다 새벽에 들어오는 일도 많고,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다 아들 얼굴을 보는데 내가 아버지로서 얘한테 기본적인 것들을 지키고 가르치고 사랑을 줘야지 얘가 자라는 중요한 시기에 술 때문에 부모가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될 것 같아서 부인과 약속하고 끊었다. 그러고 나니 시간이 많아져서 틈틈이 운동을 했고, 그래서 얼굴도 좋아지고 건강도 좋아졌다. 한창 운동할 때는 지금 몸보다 1.5배 정도 근육이 있었는데, 내가 덩치가 있는 편은 아니라 지금은 좀 빠져서 왜소해 보인다. 사우나 신 찍던 날도 열심히는 했지만 약간 2% 정도 부족한 느낌이 있었다. (웃음) 사실 이번 주에도 달수(오지호)와 준혁이 사우나 가는 신이 있는데 지호가 몸이 정말 좋으니까 부담된다. 기본 체격도 좋고 근육까지 있으니까 최곤데, 뭐 어떻게 버텨 봐야지. 난 개그로 가던가. (웃음)

“코미디를 하는 건 최고의 경험이라 정말 기분이 좋다”

<천추태후>에 7회까지만 출연했는데도 반응이 뜨거웠다. 차기작이 중요했을 텐데 <내조의 여왕> 캐스팅 막바지에 출연이 결정되었다. 처음에 한준혁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어떤 느낌을 받았나.
최철호
: 시놉시스에 나온 인물 소개에 “야자타임 때 자기에게 반말 한 부하 직원 이름 적어놨다가 나중에 몰래 괴롭힌다”고 써 있는 걸 보고 이 역할이 단선적인 인물은 아닐 거라고 직감했다. (웃음) 한준혁은 지금까지 나온 적이 없는 캐릭터인 것 같다. 진짜 진지한데 쪼잔하고, 자긴 웃기려고 하지 않는데 사람들을 웃게 하는 그런 점이 마음에 든다. 사실 작가님이 워낙 잘 써줘서 따로 연구할 것도 없다. 그냥 대본대로 하면 된다.

주로 사극이나 시대극을 통해 활동했는데 현대극에 코미디 연기는 오랜만인 것 같다.
최철호
: 수퍼액션의 < KPSI >에서 맡았던 형사 캐릭터가 약간 코믹했지만 이번 같은 본격 코미디는 아예 처음이다. 원래 나 자체가 무겁고 점잖은 이미지였고 한준혁도 초반에는 까칠하고 세련되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이런 사람이 망가지니까 웃음의 효과가 큰 것 같다. 정말 즐겁다.

7, 8회에서 한준혁이 자다 깨는 모습이나 음치처럼 노래하는 모습, 봉순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모습 등 다양한 성격 변화를 보여줬는데 상황에 따른 눈빛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최철호
: 6회까지 방송이 나갔을 때 좀 실망스럽다는 시청자들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가볍고 경쾌한 코미디를 하는데 나 혼자 무게 잡고 있는 게 안 어울리고 너무 눈에 힘만 주는 게 아니냐는 글이 올라왔다. 그런데 또 어떤 팬이 대본까지 찾아서, 내 별명이 요즘 ‘처로신’인데, “처로신 잘못이 아니에요. 보세요. 여기 지문에 ‘이글이글 불타는 눈’이라고 써 있잖아요!”라며 나를 옹호해줘서 고마웠다. (웃음) 사실 감독님이 초반 준혁과 달수의 대치 신에서 격렬한 대립을 원하셨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7회부터는 대본에 코믹한 요소가 늘어나서 준혁이 더 인간적인 캐릭터가 되어가는 것 같다. 미니 시리즈나 영화에서 코미디를 하는 건 최고의 경험이라 정말 기분이 좋다.

하지만 코미디는 자칫하면 오버가 될 수 있는데 연기할 때는 어떻게 중심을 잡는 편인가.
최철호
: 일단 대본이 너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맞춘다. 그리고 연기에 임할 땐 ‘이걸로 어떻게 좀 웃겨 봐야지’ 하고 작정하면 위험한 것 같다. 예를 들어 준혁이 책상에 엎드려 자다 깨는 장면에서, 머리가 까치집이 될 수는 있으니까 직접 앞머리 눌러서 뻗친 머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거기서 더 웃기려고 하면 안 되고, 딱 ‘그럴 수도 있다’라고 생각되는 선에서 멈춰야 웃긴 거지. 그걸 지키기가 참 어려운데 고동선 감독님이 정말 꼼꼼하게 잘 잡아 주신다. 오늘 찍은 신은 부부싸움이었는데, 감독님께서 심각하지 않고 편안하게 풀어서 연기하라고 하셨다. 그게 우리 드라마의 매력인 것 같다. 냉철한 사람이라고 밥 안 먹고 안 넘어지나?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건데, 그래서 인물들이 사랑스러워 보일 수 있다.

연기하면서 정말 재미있었던 장면은 뭔가.
최철호
: 초반에 부인 봉순(이혜영)이 준혁의 첫사랑이었던 지애(김남주) 뺨을 때리고 막 몰아세우는데 준혁이 “당신 미쳤어? 지애야, 괜찮아?” 하면서 깜짝 놀란다. 지애 남편 달수가 나와서 “여보 왜 이래? 왜 울어?”라고 나를 쳐다보는 장면에서 원래는 지지 않고 노려보면서 “뭘 봐? 나 아냐!”라고 세게 나가는 설정이었는데 순간적으로 “나 아냐! 왜 이래!” 하면서 당황하는 분위기로 풀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럴 수 있으니까, 게다가 그래 놓고 준혁이 저도 모르게 봉순이를 쳐다본다. 생각해 보면 자기가 피하려고 봉순이가 그랬다는 걸 이른 게 아닌가! (웃음) 그게 너무 웃겨서 김남주 씨도 뒤돌아서 웃느라 대사를 못 할 정도였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이제 눈 부라리는 것만 봐도 웃긴다고 하더라.

“한준혁은 좋게 보면 순수한 거고 아니면 바보다”

그에 비해 한준혁이 봉순에게 냉담하게 구는 태도나 첫사랑 지애의 남편이자 부하직원인 달수를 괴롭히는 행동 같은 것은 다소 극단적이기도 한데 어떻게 이해하려고 하나.
최철호
: 배우가 어떤 역을 할 땐, 설령 악역이라 해도 그 역할을 믿지 않으면 연기할 수가 없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실패한다. 그래서 객관적 판단을 하지 않는 게 속 편하고, 항상 그 역할 입장에서 생각을 한다. 남이 보면 말 안 되는 거라도 이 사람에겐 말이 되어야 하니까. 객관적으로 보면 한준혁의 어떤 면은 오버일 수도 있지만 이건 드라마고 인물의 캐릭터를 극대화시켜서 표현하는 거니까 이해할 수 있다.

한준혁은 남자들에게 첫사랑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인데, 비슷한 또래 남자가 보기에는 어떤 사람인가.
최철호
: 능력 있고 잘 나가고, 단지 흠이라면 아직도 첫사랑을 못 잊는다는 건데, 그래도 지나간 과거는 빨리 받아들이고 현재의 부인과 아이한테 충실해야지. 아마 그 나이 또래 일반 가장이라면 실제로 흔들리거나 가슴 아프더라도 그런 감정을 내색하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같은 남자 입장에서는, 좋게 보면 순수한 거고 아니면 바보다. (웃음) 되게 냉철한 척 하지만 사실은 진짜 냉정하지도 않다.

지금까지는 <야인시대>의 ‘신마적’과 <대조영>의 ‘걸사비우’, <천추태후>의 경종 등 남자다우면서 다소 광기 어린 캐릭터들을 연기할 때의 반응이 좋았고, 그런 것들이 배우 최철호의 이미지 상당 부분을 만든 것 같다.
최철호
: 나는 사실 평소엔 말수도 없고 소심한 성격이다. 술 먹으면 광기가 좀 나왔지만. (웃음) 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끝까지 고민하고 생각하는, A형에 가까운 편이다. 그런데 연극을 하면서 정형화된 인물이나 캐릭터 분석을 많이 하다 보니 편안하게 하는 연기보다 캐릭터가 강한 역할들을 표현하는 게 좀 더 편했던 것 같다. 신인 시절 카메라 앞에 설 땐 특히 긴장이 많이 되니까 상황에 몰리면 내가 잘 할 수 있는 모습들이 나왔던 거고, 그런 게 나한테 맞았다. 그런데 한준혁 같은 경우는 내가 처음으로 편안하게 풀어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의미가 큰 캐릭터다.

현장 스태프나 함께 연기했던 배우들로부터 평가가 좋다. 다른 작품에서도 스태프들이 칭찬하는 걸 많이 들었는데 현장에서의 그런 태도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최철호
: 원래 나서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다. 친해지기 전까지는 별로 까불지도 않고, 그냥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서로 얼굴 붉히는 행동 안 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그렇게 조심하려는 모습이 보이면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대해주니까 현장 분위기가 둥글둥글해지고 일하는 것도 즐거워진다. 마침 <내조의 여왕> 팀 사람들도 다들 성격이 좋다.

참, 프로필을 보면 모 외국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되어 있는데 특이한 이력이다.
최철호
: 맞다. 그 땐 공부 잘 했었다. (웃음)

“나한테 멜로는, 어울릴까? 하하”

그런데 어떻게 연극을 시작하게 된 건가.
최철호
: 대학 들어가고 나서 우연히 김갑수 선생님이 출연하셨던 연극 <님의 침묵>을 보게 됐다. 난 그 때 그 분이 정말 만해 한용운인 줄 알았다. 무대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와, 저게 배우구나!’ 싶어 무조건 워크샵 단원으로 극단 신시에 들어갔다. 포스터 붙이러 다니고 조명 스태프 하면서 시작했다. 집에선 연극하는 걸 반대하셔서 가출하고 1년 동안 극장에서 먹고 자고, 군대 다녀와서 다시 연극을 했다.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으니까.

연극 무대에서 보낸 이십대는 어땠나?
최철호
: 그 기간을 통틀어 번 돈 전부를 해도 삼, 사백만 원이 안 됐다. (웃음) 나중에는 극단 신시 내부 상황이 복잡해지는 바람에 형들이 다 떠나고, 나도 나와서 극단 전설에 들어갔는데 김지운 감독님의 누나인 연극배우 김지숙 대표님이 계신 곳이었다. 그래서 지운이 형이 연출했던 연극 <뜨거운 바다>와 <가마다 행진곡>의 주인공을 연기했다. 그 때 연기에 대해 좀 많이 배울 수 있었는데 또 극단이 망할 위기에 처했다. 다들 극단을 나갔지만 나는 “죽으면 죽었지 또 나가긴 어딜 가냐. 여기 뼈를 묻겠다”면서 다른 친구 하나랑 미친 척 하고 버텼다. 김지숙 대표님 따라다니면서 로드 매니저처럼 운전도 해 드리고, 밥이라도 사먹으라고 돈 주시면 둘이 소주 한 병에 참치 캔 하나 사서 먹고, 반지하 단칸방에 살았다. 그런데 지운이 형이 그러고 있는 날 예쁘게 봤는지 계속 영화 일을 소개해 주셨다. 마침 형의 <조용한 가족>시나리오가 당선돼서 거기도 불러 주셨고, 형 소개로 <접속>에도 출연했다. 한석규 씨 친구 역이었는데 영화가 대박 나서 출연료의 100%를 보너스로 받기까지 했다. (웃음) 그러다 MBC <베스트 극장>같은 데도 나오게 되면서 조금씩 먹고 살 길이 생겼다. 끝까지 버티길 잘 한 거지.

사극이나 시대극에서 주로 활동하다 보니 젊은 층 사이에서는 인지도가 좀 떨어졌던 면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 사극인 <천추태후>로 ‘경종 붐’을 일으켰다.
최철호
: 사실 처음엔 별로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매니저가 <천추태후>의 신창석 감독님은 워낙 좋은 분이니까 꼭 한번 같이 해 보라고 설득하는 바람에 만나 뵙고 대본을 받았는데 와, 경종이라는 역할이 정말 죽이는 거다. 이거 안 하면 큰 일 나겠다고 생각했다. 광기를 그렇게까지 발산하는 역할은 처음이었는데 그렇게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다. 예전 <불멸의 이순신> 때 이순신 괴롭히는 선조로 나오면서 하도 욕을 많이 먹어서 그 뒤로는 시청자 게시판도 안 보고 있었다. 그런데 <천추태후> 방송 하고 나서 부인이 보여줘서 읽어 보니까 대부분이 경종에 대한 얘기인 거다. 그 때 정말 희열을 느꼈다. “이 사람 <야인시대> 신마적 같기도 하고 처음 보는 분 같기도 한데 연기 잘 하시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웃음) 중고생들, 이십대들, 여성 팬들이 그 때 많이 생겼다. 사실 출연 분량은 그리 길지 않았는데 <내조의 여왕>에 출연하게 된 것도 김승모 프로듀서가 “<천추태후>의 최철호”라면서 감독님들께 얘기해준 덕분이라, 두 작품은 정말 나에게 의미가 각별하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더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 앞으로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면 어떤 작품에서 연기하고 싶나.
최철호
: 장르 안 따지고 그냥 ‘이거다’ 싶은 거면 된다. 솔직히 그 전에는 생활이 중요하니까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는데 이제는 나한테 쏙 들어오는 얘기면 뭐든 좋다. 사극은 많이 해 봤지만 퓨전사극도 좀 해 보고 싶고, 와이어 타고 날아보고 싶다. <해신>이나 <다모> 보면서 좀 부러웠거든. 그 밖에도 양아치든 형사든 코미디든 좋다. 멜로는, 어울릴까? 하하.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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