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는 매 분기마다 새로운 추리, 수사물이 시작한다. 2009년 1분기를 살펴보자. 에구치 요스케의 <트라이 앵글>은 이미 시효가 지난 한 소녀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내용이었다. 에이타 주연의 <보이스-죽은 자의 목소리>는 법의관을 주인공으로 죽음의 진실에 다가가는 이야기였다. <키이나 불가능 범죄 수사관>은 제목 그대로, 해결은 고사하고 그 성립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범죄를 파고드는 한 여자 형사의 이야기였다. 대놓고 추리, 수사물의 분위기를 풍기는 것만 저 정도다. 그러고 보면 일본의 역대 드라마 시청률 1위도 기무라 타쿠야가 검사로 나와 권위에 휘둘리지 않고 사건을 해결하는 일화들을 담은 <히어로>다. 한 분기, 한 해의 일이 아니다. 어느 때도 추리, 수사물 없이 시작하는 분기는 한 번도 없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범죄가 있다. 그리고 일본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유형의 추리, 수사물이 있다. 미국의 경우, 시리즈의 성공으로 새롭고 다양한 수사물이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으니 얼핏 비슷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양상은 다르다.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드라마가 시즌제로 만들어진다. 계속해서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는 탄탄함이 수사 기법에서건 인물 설정에서건 담보되지 않는다면 몇 년이고 같은 틀에서 시즌제 드라마를 만들 수 없다.

일본 수사물을 이끄는 ‘발상’의 참신함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다르다. 한 분기 드라마가 보통 9회에서 12회 정도로 마무리되고, 같은 드라마가 2기, 3기로 계속되는 게 특별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신한 발상만으로도 추리, 수사물이 만들어질 수 있다. <부호형사>는 거부인 할아버지를 둔 부호 아가씨가 형사로 부임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그렸다. “야쿠자가 얽힌 사건을 해결한 방법이 없다고? 그러면 야쿠자가 모이는 호텔을 통째로 빌려버려요! 범인의 범죄를 입증할 수 없다구요? 그러면 그 레스토랑을 사 버리는 거에요!” 추리, 수사극으로서의 재미만큼이나 주인공인 후카다 교코의 생활방식과 옷이 화제가 된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부호형사 디럭스>라는 2기 드라마도 방영되었다. 하지만 2기에 이르면 같은 패턴이 반복되거나 추리, 수사물적 성격이 약화되기도 한다.

‘발상’의 참신함이 일본 추리, 수사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말은, 단순히 사건의 참신함이나 트릭의 참신함이 아니라, 탐정-형사역의 참신함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코믹 캐릭터가 등장하는 드라마가 생기는 것도 그래서다. <33분 탐정>은 킨키키즈의 도모토 츠요시가 탐정으로 등장하는 ‘일종의’ 탐정물이다. 제목의 33분은 광고시간을 뺀 드라마 러닝 타임을 뜻하는데, 탐정 쿠라마 로쿠로는 방송 시간을 맞추기 위해 5분 만에 범인이 밝혀진 상황에도 모든 주변 인물을 용의자로 끼워 맞춘다. “내가 33분을 끌어 보이겠어!”라는 대사와 함께 등장하는 각종 의혹과 추리는 진범을 잡는 데 초점이 맞춰지는 게 아니다. 기존의 추리, 수사물을 패러디하는 센스가 돋보이는 건 이 지점에서다.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피해자를 첫 번째 발견한 사람을 의심하고, 피해자 주변의 사람을 의심하고, 알리바이가 애매한 사람을 의심하는 탐정물의 법칙으로 ‘생사람 잡는’ 쿠라마 로쿠로의 행동은 수사물의 재미가 ‘누가, 어떻게’를 푸는 ‘과정’에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미 범인이 알려진 상황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탐정 역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과감하게 CG 티가 팍팍 나는 화면 구성이나 억지를 부리는 탐정물 매니아인 탐정의 캐릭터를 극대화해 보여준다.

그들의 추리-수사물을 관통하는 명작들

일본 추리, 수사물의 몇 가지 줄기에는 그 시작점이 되는 기념비적인 작품들이 있다. 경찰물이라면 <춤추는 대수사선>을 빼고 이야기하기 힘들다. 일본 사회와 경찰 조직의 문제점, 인간미 넘치는 형사, 정의를 위해 개인의 성공을 담보 잡기도 하는 직업정신, 사건 해결까지의 서스펜스와 현실감 있는 캐릭터들이 선사하는 웃음과 감동. 경찰물에 거의 반드시 등장하는 설정 중에는 캐리어와 논캐리어의 마찰 문제가 있다. 캐리어는 국가공무원 1종 시험 합격자로 경찰 관료가 되는 소수의 엘리트를 칭하고, 논캐리어는 그렇지 않은 일반 경찰관을 일컫는다. 현장에서 발로 뛴 수사관들의 수사 결과가 캐리어들에 의해 휘둘리고, 수뇌부에서 캐리어의 경력에 손상이 가지 않게 배려하느라 일반 형사들이 불만을 토로하는 식의 이야기는 일본 경찰물의 단골 갈등 소재다. 2009년 1분기 방영을 마친 <트라이앵글>에서도 이런 캐리어와 논캐리어의 관계가 사건을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또 하나는 국민 탐정의 계보다. 그 가장 꼭대기에는 소설로도 유명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있다. 이 시리즈는 드라마와 영화로 수없이 만들어졌고 가장 최근에는 이나가키 고로가 긴다이치 코스케로 출연하는 특별드라마로도 몇 편이 만들어졌다. 이 시리즈 중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영화로 두 번, 드라마로는 무려 다섯 번 만들어졌다. 머리에서 비듬이 떨어지는, 털털하다 못해 가끔 지저분하기까지 한 이 일본인 탐정은 이후 수많은 추리물의 원형이 되었다. 긴다이치 코스케가 할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소년탐정 김전일은 기본. 특히 <형사 콜롬보>와 긴다이치 코스케를 섞은 것 같은 허허실실 캐릭터인 경부보 <후루하타 닌자부로> 시리즈에서는 타무라 마사카즈가 주인공 후루하타를 연기했는데, 3기까지 방영되었을 뿐 아니라 스페셜과 파이널도 여러 편이 만들어지면서 그 인기를 증명했다.

코믹 탐정물은 나카마 유키에와 아베 히로시 주연의 <트릭>부터 그 강세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유머러스한’ 탐정물은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개그를 하는 콤비가 농담처럼 사건 속으로 뛰어드는 시리즈의 위용은 <트릭>이 압도적이었다. 절벽가슴의 여자 마술사 야마다 나오코와 큰 물건의 물리학자 우에다 지로가 각종 사기 수법을 파헤치는 이 시리즈 역시 3기까지 제작되고 영화판과 스페셜로도 만들어졌다. 수사물 아닌 수사물, 코미디 아닌 코미디. 즉 수사물과 코미디를 버무린 캐릭터극의 인기를 견인한 드라마인 셈이다.

일드에서 탐정과 수사가 없었던 적이 있는가

하지만 일본 추리, 수사물의 가장 큰 매력은 몇 가지 계보로 정리가 되지 않는 다양함에 있을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 유형만큼의 탐정이 등장한다. ‘추리적’인 기법이 다양한 장르로 파고드는 것도 특징이다. 시효가 지난 사건을 취미로 수사하는 <시효경찰>, 과학자라기보다 과학 덕후로 보이는 물리학자가 등장하는 <갈릴레오>, 사기꾼 등치는 사기꾼 <쿠로사기>, 발로 뛰는 검사 이야기 <히어로>, ‘부자라서 햄볶아요’ <부호형사>… 불가능을 해명하고,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인간을 이해하고, 때로 웃고 운다. 추리, 수사물이 이렇게 다양한 얼굴을 할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게 일본 드라마에서의 추리, 수사물인 셈이다.

글. 이다혜 ( 기자)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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