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정권의 나팔수였던 괴벨스는 말했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여물지 못해서, 스쳐가는 진실보다는 끈질기게 되풀이되는 거짓을 더 쉽게 믿는 법이다. 부정하고 의심하는 것도 한 순간의 일일 뿐, 반복적으로 주입되는 것을 결국은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꽃보다 남자>(이하 <꽃남>)는 뚝심과 끈기로 시청자들에게 특정 포인트를 반복 학습시킴으로서 그 세계관을 관철시킨 노련함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해석이 과장된 것 같다고? 다음은 지난 석 달 간 <꽃남>을 시청한 아주 평범한 여성 직장인의 심리를 추적한 임상 결과다. 이성의 끈을 놓고 <꽃남>월드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그녀의 변화 과정은 곧, 현재 다음 주 월요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바로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야, 캐스팅 이게 뭐야. 나 꽃미남 아니면 드라마 안보는 거, 몰라? 정말 어이가 없다. 진심 안 어울려서 그래. 특히 얘, 주인공, 대체 누구니? 이름도 뭐? 구준엽도 아니고, 뭐라는 거야.

귀를 의심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배경음악이다. ‘힘이 들 때면 럭키…’ 가사를 알아듣는 것조차 버겁다. 게다가 어디선가 다른 드라마에서 들었던 것 같은 노래까지. 시각적 분위기와 노래의 분위기가 매치되면 안 되는 철칙이라도 있는 걸까. OST 때문에 극에 몰입이 안 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혹시, 이것이 바로 낯설게 하기? 거리 두기?
게다가 윤지후는 왜 숲속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서 있는 것일까. 손이 곱아서 악기를 제대로 잡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 그리고 전반적으로 출연자들이 안색이 나빠 보인다. 초반부터 강행군을 하는가보다. 그래서 윤지후는 왜 아무데서나 잠들어 버리는 거냐. 헬스장은 정말 너무하잖아. 기면증도 아니고.
게다가 “요요, 와썹맨”이라는 대사와 설정은 가관이다. 한번 하고 말겠지. 애들이 재벌이라고 큰소리 쳐놓고 기껏 기타히어로에 포켓볼 치고 있는 것도, 설마 이번에만 이러는 거겠지. 일류 스타일리스트가 금잔디 꾸며 주면서 워스트 드레서의 상징인 투명 브라끈을 입혀 준 것도, 설마 이번에만….
그건 그렇고 구준표가 연기를 제법 잘하는 것 같다. 고개를 슬쩍 돌릴 때 보면 얼굴도… 제법 잘생긴 것 같다.

지후 선배가 바이올린을 켜는데, 뭘 연주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아니, 이상한 배경 음악 덧입힐 바에야 차라리 바이올린 소리를 들려줘. 명색이 재벌 생일 파틴데, 결혼식에 부르는 현악 4중주라도 부를 것이지. 하여간 있는 것들이 더하다. 파티를 그렇게 엉망으로 해 놓고 뭐가 좋아서 민서현은 지후 선배랑 키스를 하냐. 장소도 그렇고, 조명도 그렇고 불륜 드라만 줄 알았다. 조명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점점 F4가 거뭇거뭇 수염이 난다. 꽃미남 말고, 그냥 재벌이라고 해도 믿기 어려운 안색들이다.
그건 그렇고 우리 준표는 감기 걸리면 어쩌나. 물에 빠지더니 눈 속에서 기다리기까지! 남산 관리 아저씨는 꽃등심도 아니고 겨우 껍데기 때문에 우리 준표를 엄동설한에 내던져 놓다니, 정말 너무 하신다. 그래도 그 덕분에 아베마리아 준표를 볼 수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게 없다. 교복을 입어도, 헤어스타일을 바꿔도 잘생겼구나.
하지만, 수영장에 CG로 떠다니는 오리는 뭐며. 잔디가 눈 깜빡일 때 나는 음향 효과는 무엇 때문이며, 소이정이 섹소폰을 불고, 송우빈이 이상한 춤을 추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개그 코드인가? 아, 그런 거였구나!

뉴칼레도니아가 어디 있는 섬인지 몰라도, 볼 건 다 봤다. 여권도, 비자도 필요 없는 곳 같지만 안 가 봐도 될 것 같다. 잔디가 리조트의 구석구석을 잘 살펴봐 준 덕분이다. 심지어 카메라 앵글이며 조명도 어찌나 신혼부부가 핸디 캠으로 찍어 온 것 같았는지, 현장 르뽀의 냄새가 물씬 나서 순간 멀미가 날 정도였다. 헬기까지 동원해서 섬을 보여주다니, 구글 어스를 체험한 기분이다.
그건 그렇고, 우리 준표가 옷을… 옷을 벗었다. 윗옷을 훌러덩. 순간, 소리를 질렀다.
지후 선배의 에어로빅 강사 코스튬이나. 물을 무서워하는 준표가 카누를 마구 타고, 색종이를 오려 붙인 것 같은 CG 불꽃놀이가 만발하고, 리조트 댄스 타임에 흘러나오는 음악이 숲속 다람쥐 잔치 노래 같다는 것쯤은 눈 감아 줄 수 있을 것 같다. 준표 옷 벗는 부분은 캡쳐 사진이나 플짤을 구해야 할 텐데. 휴대폰 대기 화면 결정이다!

지후 선배가 자동차를 못 탄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그동안 오토바이로 질주하던 건 그럼 뭐지. 그리고 가을이는 남의 학교 일에 빠짐없이 따라다닌다. 아무래도 홈스쿨링을 하는 것 같다. 지후 선배가 갑자기 운전을 하게 된 것 보다 놀라운 것은, 우리 준표가 사고가 났는데 다들 박수 짝짝 치면서 기뻐한다는 사실이다. 나쁜 것들.
이제 슬슬 이상한 노래들에도 적응을 했다. 가사도 몇 소절 외웠다. 음악 감독님이 디즈니 만화 영화를 참고해서 만들었다더니, 자꾸 흥얼거리게 된다.

제작진은 고등학생 시절을 겪은 적이 없는 걸까. 스케이트는 호텔 앞에서 타고, 저녁은 곱창을 먹자니 나라도 싫겠다. 그리고 이정이는 제발 섹소폰 좀 그만 불어. 지후 선배도 피아노 치지 마라. 어차피 우린 네 연주를 들을 수도 없어. 가을이랑 잔디는 왜 하필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서, 그 심각한 상황에 재료 비비는 걸 그렇게 구체적으로 보고 있었니. 그리고 뭔 데이트를 휴대폰 홍보 매장에서 하냐. 거길 또 친히 방문하시는 회장님이 또 세상에 어딨어. 하긴, 전 대통령 얼굴도 못 알아보는 세상에 뭔 일이 없겠니.
그렇지만, 우리 준표가 그네 앞에 앉아서 잔디를 쳐다보는 그 얼굴만은 정말 아름다웠다. 준표야, 누나가 심장이 약해. 못써요, 그런 그윽한 표정 지으면. 누나가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잠을 이룰 수가 없잖니. 아악! 키스 했어! 나 왜 하이킥 날리고 있는 거니!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점점 등장하는 여자애에게 질려간다. 백 미터 밖에서 라면 냄새를 맡질 않나, 기절한 채로 안겨 나오면서도 남자 목을 꼭 끌어안질 않나, 잔디에게는 상식이라고는 없다. 게다가 가을이는 원형 탈모가 왔는지 매일 다른 모자를 쓰고 나온다. 지후 선배가 헬멧 위에 휴대폰을 대고서 통화하는 모습이나 잔디가 표지로 나온 잡지 이름이 ‘그룹 세븐’이라는 정도는 애교로 봐 주자.
이정이가 교통사고가 크게 났다는데, 볼 때 마다 마음이 조마조마 하다. 하지만 심장이 가장 벌렁 거린 건, 준표가 또 훌러덩 옷을 벗었을 때다. 왜 갑자기 애들이 스키장엘 갔으며, 왜 잔디는 산등성이도 아닌 멀쩡한 스키장에서 전쟁 통의 여옥이처럼 쓰러졌으며, 스노모빌을 잘 타고 갔던 준표는 왜 잔디랑 산장까지 가야 했는지 궁금할 겨를도 없이 장면에 몰입했다. 역시, 폭풍 전개의 빈틈을 매우는 건 달달한 키스신의 여운이다.

준표야, 70만 신화인들을 생각하는 니가 기특하기는 한데, 시청자들은 어쩌란 말이니.
잔디야, 의대 가려면 수능을 빡세게 해야지. 병원 청소한다고 될 일이 아니란다. 그리고 너 왜 통합사회 문제집을 보고 있니. 일단 수능 과목부터 점검하길 바라.
하이밍아, 너 때문에 잔디 마카오 관광 또 한다며? 너, 나랑 가면 쓰고 숨바꼭질 하자꾸나. 대신 잡히면 알지? 누나를 나쁜 여자라고 하지 마. 용서 못해.

지쳤다. 한국에 안 올 모양이다. 귀화해서 살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지후 선배가 헤어스타일을 바꿨다. 이렇게 되면 안 볼 수가 없잖아. “머리를 잘랐더니 상쾌한데!” 따위의 친절한 멘트는 해 주지 않는 지후 선배지만, 너무 멋지다. 사실 잔디에게 늘 다정했던 건 지후 선배였다. 우유부단한 준표는 이제 식상하다. 사실 좀 나훈아 같이 생겼다. 앞으로는 지후 선배에 집중해서 드라마를 봐야겠다.

잔디가 많이 다쳤다더니, 스페셜 방송으로 한 회를 때웠다. 지옥이었다. 아무리 여러 가지 흠이 있어도 역시 본방이 최고다. 그래도 한 회 못 만난 것에 대한 보상인지, 화요일부터는 새 등장인물도 많아지고, 새로운 OST가 대거 공개 되었다.
준표가 갑자기 수영을 하고, 잔디가 지후선배에게 옮았는지 기면증이 생겼다. 그러나 그런 심각한 문제대신 제작진이 신경 쓰는 것은 오로지 휴대폰이다. ‘애니모션’도 이것보다는 휴대폰 노출 빈도가 낮았던 것 같은데, 정말 대단한 근성이다.

아, 못 보겠다. 심지어 우빈이의 단독 신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볼 마음이 생기질 않는다. 출연 배우의 장례식 중에 일본 관광객들과 프로모션을 해야 하는 전쟁터는 더 이상 누나들의 판타지 동산이 아니다. 그리고 이정아 또 너희 아버지 나오셨다며? 제발 말려. 응?

드라마가 잘 흘러가고 있다. 어디로? 안드로메다로. 이제 원작은 생각도 안 난다. 휴대폰 광고와 웨딩 콘테스트, 축구 경기는 꿈에서 본 건지 실제 방송인지도 헷갈릴 따름이다. 그저 라면 세팅을 완벽히 하는 금잔디와 커틀릿 세팅을 환상적으로 하는 지후 선배네 할아버지가 같이 푸드 스타일링 사업이나 동업 했으면 좋겠다. 점점 딴 짓을 하게 된다.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거더군. 아무 생각 없이 또 리모컨을 들고 있잖아. 재경아, 웨딩 드레스 어디에 휴대폰을 넣어 놨던 거니? 아, 가을 양 아버지가 부장님이었구나. 어쩐지, 너 옷 입는 거 보면 잘사는 집 애 같았어. 잔디야. 키스 신은 예쁘더라만, 아무도 널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간다며? 그런데 너희 부모님 어디 계신지 못 찾을 것 같았니? 그리고 네가 그렇게 가 버리면 그 누워있는 아저씨, 그 분은 어쩌라고. 근데, 그 사람 누구니? 아니, 뭐 궁금한 건 아니야. 이젠 다 그러려니 해. 그 사람이 구준표의 이복여동생이래도 난 놀라지 않을 거야.

일러스트레이션_ 그루브모기(www.groovemogi.com)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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