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런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신에 손톱 손질을 받게 해 주고, 쇼핑에 데려가 선물을 한 아름 사 주며, 심지어 4인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점보라면을 다 먹어 치운 상으로 받은 식권을 선뜻 내어 준다. 비록 연적이라는 관계로 얽혀있지만, KBS <꽃보다 남자>에서 이민정이 연기하는 하재경은 금잔디(구혜선)에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만능의 친구다. “극에서 한 발짝 빠져나와서 보면 이상한 이야기일수도 있어요. 이렇게 눈치 없는 애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크고 동그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동그랗게 쏟아지는 단발머리를 쓸어 올리던 이민정이 시원스레 웃음을 터트린다. “잔디랑 준표, 되게 친하구나?” 하재경의 대사를 되새기는 명랑한 목소리. 이런 친구, 정말 있으면 좋겠다.

성악에서 연출로 그리고 연기라는 무대로

그러나 학창시절의 이민정은 마냥 평화롭게 친구들과 어울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강남의 고등학교를 다니며 F4 못지않게 부유한 친구들이 입시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모습에 갑갑증을 느끼기도 했고, 몇 년간 해오던 성악을 그만두고 예체능에서 문과로 진로를 바꾸며 고민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불현 듯 그런 의문이 들었어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고 있나? 음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평생 성악가로 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음악을 취미로 남겨둔 그녀는 취미로 즐겨 보던 영화에 인생을 걸기로 결심 했다. 영화를 만들고 싶은 꿈에 부풀어 있던 시절에는 “완성한 작품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지만, 직접 시나리오도 쓸 만큼 적극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교수님의 권유로 연극 무대에 선 순간, 그녀의 눈앞에는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연극을 꾸준히 한 편이에요. 무대에서는 2시간 동안 쭉 감정을 만들어 나가는 재미가 있거든요.” 점점 부풀어 올랐다가 잦아드는 감정의 크기를 따라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에 작은 포물선을 그린다. 그리고 그 손끝을 따라가는 눈빛에는 기대와 호기심이 반짝거린다. 마치 하재경이 그렇듯 말이다.

“스스로 철저해야 해요, 모든 사람이 나를 보고 있거든요”

본인의 눈에는 다른 점들이 많이 보이겠지만, 보면 볼수록 눈앞의 이민정과 드라마 속의 하재경은 잘 붙여놓은 두 장의 종이 같다.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는 대신, 언제나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 하는 태도가 그렇고, 마카오 현지 촬영을 돌이키면서 힘들었던 기억보다는 짬을 내서 홍콩 여행을 갔던 즐거운 추억을 먼저 떠올리는 낙천적인 성품이 그렇다. 그리고 “야구나 축구 보는 것도 은근히 좋아하고, 아! 저 격투기도 좋아해요. 바다 하리! 하하하. 크로캅도 좋아했는데, 요즘에는… 좀 그렇죠? ”라며 갑자기 흥분하는 모습은 보이시 하면서도 귀여운 캐릭터 그대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다면 이민정의 이상형은 눈이 작고, 선이 얇은 남자라는 사소한 사실 정도다. “구준표처럼 너무 잘생긴 남자는 거부감이 들어요.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다 좋아할 거 아냐.” 아니, 새침하게 입을 삐죽거리는 모습은 다시 낯익은 그 모습, 하재경이다.

그래서 이민정의 승부는 <꽃보다 남자>, 그 다음 부터다. 대학을 졸업하고 방송을 시작했으니 “스물에 데뷔해 스물너댓에 정점을 찍는” 보통의 여배우들보다 출발이 늦었다고 걱정하지만, 사실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어떤 배우는 순간의 속력으로 주목받지만, 끝없이 달림으로써 아름다운 배우도 있는 법이다. “이 일은, 스스로 철저해야 한대요. 모든 사람이 나를 보고 있거든요. 게다가 십년 뒤에 제가 제 모습을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휴” 라고 말할 정도로, 꿈과 환상의 당의정을 벗겨낸 연기의 진짜 모습을 사랑하기 시작한 그녀는 오랫동안 시청자들에게 친구 같은 배우로 남을 수 있을까. 먼 길을 떠나는 친구의 소식처럼, 한동안 그녀의 행보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 같다.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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