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악녀가 없으면 TV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주인공을 괴롭혔고, 시청자들은 악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여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며 악녀를 손가락질 했다. 그러나 이제 드라마에서 악녀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모든 여자들이 독하고, 세지고 있다. KBS 과 SBS 은 두 강한 여자끼리의 챔피언십 매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 KBS 는 남자들을 호령하는 여성의 카리스마가 드라마를 장악한다. 또한 MBC , KBS , SBS 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어머니들은 모두 남자 주인공 이상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큰소리를 친다. 왜 드라마 속의 여성들은 더 강해지고, 그들끼리의 대결을 선택하게 됐는가. 가 지금 한국 드라마 속 여성들이 보여주는 어떤 새로운 흐름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물론 ‘세기의 대결’이라해도 손색이 없을 그 여성들의 ‘전투력’ 소개와 그들의 성공 비결, 그들에게 기를 눌려 사는 남자들의 푸념도 모두 기록했다.

최명길과 전인화는 한국 드라마 업계의 두 ‘여왕’이었다. 그들은 KBS <용의 눈물>과 SBS <여인천하>등에서 막강한 ‘포스’를 뿜어냈다. 중전은 한국의 30대 후반~40대에 접어든 여성 연기자가 여전한 아름다움과 관록의 연기력을 동시에 가졌음을 증명하는 배역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는 그들이 점차 뒷방 노인 신세가 될 것임을 의미하기도 했다. 중전이 되면서 그들은 서서히 여주인공에서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시어머니로 밀려난다. 최명길은 KBS <명성황후> 이후 “늘 사극의 중전마마 역할만 들어오는게 가장 큰 불만”이라며 SBS <태양의 남쪽>으로 자신이 여전히 멜로드라마에 어울린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최명길과 전인화는 40대 중반이 된 지금 드라마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출연하는 KBS <미워도 다시 한 번>은 두 중년 연기자에게 사극 속 ‘중전’ 이상의 영광을 부여한다. 그들은 남편이나 자식에게 기대는 ‘마나님’이 아니다. 한명인(최명길)은 남편을 부회장으로 거느리는 대기업의 총수고, 은혜정(전인화)은 최고의 여배우다. 또한 그들은 이정훈(박상원)을 사이에 둔 삼각 스캔들의 주인공들이다. <미워도 다시 한 번>에서 그들은 사회적인 지위와 사랑을 동시에 쟁취하려는 ‘여왕’들이다. 공과 사의 영역을 넘나들며 매스 미디어를 이용해 서로를 공격하는 그들의 대결은 품위마저 느껴진다.

안방이 아닌 세상으로 나온 포식자의 욕망

이 두 ‘여왕’의 모습은 지금 한국 드라마, 특히 통속극 속 여성들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KBS <너는 내 운명>의 시어머니와 며느리처럼 남편/아들과 헤어지니 마니하는 것으로 갈등하지 않는다 <미워도 다시 한 번>에서 두 여자의 대결은 실질적으로 서로의 사회적인 지위를 걸고 싸우는 것이다. SBS <아내의 유혹>에서 구은재(장서희)가 신애리(김서형)에게 하는 복수극는 단지 정교빈(변우민)을 뺏어간 것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상대방의 사업체를 누르고 정상에 서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미 1년 전에 KBS <태양의 여자>는 이 새로운 게임의 룰을 제시했다. 윤사월(이하나)은 신도영(김지수)에게 복수하기 위해’여대생이 가장 닮고 싶은 여성인 신도영의 사회적 지위를 끌어내린다. 과거의 악녀들은 자신이 원하는 남자를 갖기 위해 남자 주인공에게 여주인공을 음해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미워도 다시 한 번>에서 이정훈은 두 육식동물 같은 여자들 사이에 있는 톰슨가젤일 뿐이다. 서로의 사적 / 공적인 욕망을 위해 독하게 부딪히는 두 사람 중 승자가 그를 전리품으로 가질 수 있다. 이 중 승자는 KBS <천추태후>의 천추태후(채시라)나 ‘70만의 인생’을 책임지고 있다는 KBS <꽃보다 남자>의 강희수(이혜영)처럼 모든 것을 지배하는 ‘태양’같은 여자가 될 것이다. 송승헌을 앞세운 MBC <에덴의 동쪽>에서도 그의 비즈니스 파트너, 혹은 적들은 지현(한지혜)처럼 가슴에 모성과 권모술수를 동시에 품은 여자들이었다. 드라마 속 여자들의 욕망이 안방이 아닌 세상으로 바뀌었다.

독하고 똑똑한 여성들의 연이은 등장은 단지 최근 이런 드라마들의 여성 시청자들이 여성 드라마를 선택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수현 작가는 몇 년 전 SBS <사랑과 야망>에서 원작에 비해 더욱 시대와 불화한 김미자(한고은)의 욕망에 초점을 맞췄다. 김미자는 박태준이 성공하면서 재벌 회장의 아내도 되지만, 자신의 일, 혹은 채워지지 않은 욕망 때문에 박태준과 대립한다. KBS <엄마가 뿔났다>의 김한자(김혜자)는 드라마 후반에 엄마의 의무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선언을 했다. 김수현 작가는 집 바깥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여성들의 욕망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미워도 다시 한 번>과 <아내의 유혹>은 이 욕망을 장르물의 형식 안에서 풀어내면서 구체화 시켰다. 남녀의 성을 바꾼다면, <미워도 다시 한 번>은 남성들의 기업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남성들이 그랬듯, 이 여성들은 남성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돈과 권력과 두뇌 싸움을 벌인다. 이야기의 치밀함은 비교하기 미안할 만큼 떨어지지만, <아내의 유혹>은 전개 방식만 따지면 KBS <부활>과 유사하다. <부활>이 그랬던 것처럼, <아내의 유혹>은 주인공이 똑같은 얼굴을 가진 다른 사람으로 나타나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들을 속속들이 파멸시킨다. 시청자들이 일련의 ‘미드’를 통해 장르물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한 시점에서 통속극 역시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안방 잔혹사’를 넘어 보다 넓은 세계와 다양한 장르를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남성의 세계에 진출하면서, 통속극 속의 여성들은 그들이 지켜야 했던 룰을 전복시킨다. 정치적 야망과 자식에 대한 사랑을 동시에 보여주는 천추태후나 자식, 회사, 사랑을 숨가쁘게 챙기면서 아슬아슬한 삶을 사는 한명인은 기존 사극 속 왕과 닮아있다. 반대로 남자들은 우유부단하거나, 무책임하거나, 바보처럼 묘사된다. 그 역전된 관계 안에서 이 ‘여왕’들은 남성의 세계를 뒤엎는다. <아내의 유혹>에서 정교빈(변우민)의 아내가 구은재에서 신애리로, 다시 민소희로 바뀌는 과정은 현대판 <푸른 수염>이나 다름없다. 정교빈은 가진 것 없는 구은재를 돈은 없어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신애리로 바꾸고, 다시 돈과 사회적 지위가 모두 있는 민소희를 맞이한다. 민소희가 아내가 된 뒤에야, 정교빈은 바람을 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여자들은 살아남으려면 여왕이 돼야한다

<아내의 유혹>이 <너는 내 운명>과 달리 나름의 미덕을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너는 내 운명>은 돈 없는 며느리가 부유한 시어머니에게 골수까지 주고 나서야 기존의 가족 체제 안으로 들어가는 억지스러운 봉합을 시도했다. 반면 <아내의 유혹>은 결혼해서 당당하려면 돈이든 능력이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김순옥 작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아내의 유혹>은 여주인공의 욕망을 기존 가족체제 안에 붙잡아 두는 대신 그것을 벗어나는 것을 그려냈다. 이는 지금 통속극에서 ‘태양’이 되고픈 여성들의 욕망을 설명하는 실마리다. 남자는 이정훈처럼 ‘식물성’이어도 두 명의 여자와 두 명의 자식을 오가며 살 수 있다. <아내의 유혹>의 정회장(김동현)은 아내와 며느리의 갈등을 방치한채 경제력만으로 가정의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한명인은 그룹을 장악한 상태에서도 시어머니의 은근한 압력을 받는다. 여기에는 그의 아들이 다른 남자의 자식이었다는 이유도 깔려 있다. 이 ‘태양의 여자’들에게 공과 사는 분리되지 않는다. 힘이 있어야 자신의 사랑도, 모성애도 지킬 수 있다.

그래서, 이 여성들의 대결은 여성의 욕망을 대신하는 판타지이자, 지금 여성의 욕망이 좌절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태양의 여자>로 대중적 성공을 거두기 1년 전, 김인영 작가는 MBC <메리 대구 공방전>에서 가난한 남자와 사랑하는 여자 황메리(이하나)의 이야기를 그렸다. 하지만 대중은 이 행복한 루저 대신 자신의 욕망을 향해 달려가다 쓰러지는 신도영에 열광했다. 여성들은 기존의 체제 안에서 소화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만,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일과 개인의 행복을 동시에 원하지만 그 욕망 때문에 스스로 파멸의 위기에 빠지거나 (<태양의 여자>, <아내의 유혹>) 누구도 곁에 두지 못하는 쓸쓸함을 맛보는(<미워도 다시 한 번>) 이 여성들의 모습은 자신의 삶의 균형, 혹은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앞으로 달려가야 하는 요즘 한국 여성에 대한 조금 과장된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여성들은 <꽃보다 남자>처럼 과거보다 더 과장된 재벌 2세 판타지에 기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서도 금잔디(구혜선)는 로열 패밀리가 되기 위해 과거보다 훨씬 더 무서워진 예비 시어머니의 방해를 이겨내야 한다. 그래서, 드라마 속에서 기세 등등한 여자들은 현실의 여성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젠 신데렐라를 꿈꾸는 것 마저 사치처럼 보이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살아 남으려면 더 독하고 악착같이 살면서 주변 여성들을 제치고 ‘여왕’이 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이다.

글. 강명석 (two@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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