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 주세요.” “ㅂ으로 시작하는 영화중에 그런 제목은 없어요.” “그럴리가요! 굉장히 유명한 작품인데.” “잠깐, ㅅ항목에 비슷한 영화가 있네요. <서기 2019년 블레이드 러너>.” 중학생 시절 비디오 대여점에서 있었던 일이다. 네임 라벨이 낡아서 흐릿해진 비디오를 들고 돌아오면서 속으로 점원을 얼마나 흉봤는지 모른다. 그리고 십 수 년이 지나서야 영화의 원작인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읽었다. 이런 걸작 소설을 이제야 읽다니, SF 소설 마니아들이 나를 아무리 흉본들 할 말이 없다. 그만큼 이 소설은 굉장한 이야기다.

암울한 미래의 지구. 안드로이드를 처리하는 현상금 사냥꾼 릭 데커드. 그리고 피조물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안드로이드들까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영화와 흡사한 설정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 분명 책장을 덮고 나면 <블레이드 러너>를 봤을 때와 비슷한 주제를 떠올리게 되지만, 이 소설은 보다 기묘하고 특별한 여운을 남긴다. 범인은 바로 작품 전반을 휘감고 있는 은근한 유머감각이다. 덕분에 심각한 상황과 무거운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읽는 도중에 책장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온전히 이야기에 빠져 들 수 있다. 비장한 모습으로 독백을 남기던 룻거 하우어의 포스 대신, 소설에서 만날 수 있는 데커드의 아내 아이란과 특수자 이지도어가 전하는 메시지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읽기 전에 <블레이드 러너>를 볼 필요는 없다. 아니 영화를 보고 괜한 선입견을 갖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대신 이 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작명을 했다는 전자양의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의 2집에 있는 ‘무신론자의 가스펠 Pt. 2`라면 더더욱 좋겠다. 다만, 스산한 유머감각의 더블 콤보를 견뎌 낼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 다시 말하지만, 이건 굉장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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