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른 공부 없이 어디 가서 미술작품에 대해 조금은 아는 척 하고 싶은 사람을 위한 팁을 주겠다. 괜히 미니홈피에나 어울릴 허세 가득한 표현을 쓰는 대신 현대미술이라 말할 걸 모두 동시대미술이라고 말해보자. 전시도 제법 보고, 관련 서적도 몇 권 읽은 ‘척’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라는 구분의 한계는 제법 분명하다. 가령 우리나라 90년대 무대 의상과 흡사한 옷을 입은 대만에서 가장 핫한 가수를 보고 우리 기준으로 복고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반대로 그들을 ‘현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같은 시간을 살면서도 그 안에서 겪는 문화적 시간대는 생각만큼 균일하지 못하다.

치우 샤오페이는 하얼빈 출신의 33세 중국 미술가다. 철저히 서구적, 산업적 기준이라는 걸 전제하고 말하면 분명 중국은 지금의 우리보다 덜 현대적인 나라다. 두산 갤러리 ‘Invisible Journey’展에 전시된 샤오페이의 작품은 그런 중국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어린 시절을 담은 회화 ‘Photo paper’는 30대 초반 작가의 유년기임에도 빛바랜 흑백사진의 느낌이다. 그가 어린 시절이 아닌 동시대 중국 산업현장의 모습을 재봉틀(이라 쓰고 ‘미싱’이라 읽는다)과 뒤엉키고 널브러진 옷과 섬유로 표현한 ‘Holiday Dreams’와 ‘Old Clothes’는 우리나라 70~80년대의 근대적 산업화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현재 중국의 산업화에 대한 젊은 작가의 비판적 주제의식은 ‘바젤 아트페어’에서 주목받을 만큼 다분히 ‘핫’하다. 이것을 단순히 근대, 현대라는 틀로 구분할 수 있을까. 그래서 동시대미술이란 범주가 필요한 것이다.

<밀양>
감독 이창동│2007년

종교와 구원, 그리고 용서의 주체에 대해 심술궂은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철석 같이 믿고 있는 동시대에 대한 환상이 공간만 약간 벗어나도 깨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기도 하다. 영화 속 신애가 밀양으로 이사 온 초기에 이방인 취급 받았던 건 단순히 공간적 거리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 밀양은 아이들이 웅변을 배우고, 지역 유지의 집에서 피아노 시범을 보여야 하는, 쉽게 말해 촌스러운 촌이다. 즉 서울에 살던 신애와 밀양의 사람들은 다른 시간대를 살던 사람들이다. 같이 술을 마시고 돈도 많은 척 해도 그 간극을 메우기란 표준어와 사투리의 대화보다 어려운 일이다.

<허삼관 매혈기>
작가 위화│2007년

소설 <허삼관 매혈기> 속 근대 중국은 참 요지경 같은 나라다. 죽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아들이 지붕 위에서 아버지를 불러야 하고, 헌혈 전 피를 묽게 하겠다고 토하기 직전까지 물을 마시는 비과학적인 사회에 공산주의와 근대적 공장이 들어올 때의 이질감은 아찔할 지경이다. 지도자 모택동의 훈시 한 마디에 따라 집에서 인민재판을 열고, 공장을 돌리고, 아이는 학교에 가는 모습은 그 외형과 달리 결코 근대적 발전으로 보이지 않는다. 세계적인 산업대국으로 성장하면서도 어딘가 치우 샤오페이를 비롯한 중국 작가들의 작품에서 어딘가 촌스럽게 그려지는 중국의 모습은 이런 불일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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