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해신>, <대조영> 등으로 이어지는 KBS 대하사극은 남성적인 호전성의 극단에 있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그려왔다. 비록 여자가 주인공이지만 그 호전성에 있어 ‘유사 남성’에 가까운 <천추태후> 역시 그 계보의 한 편에 자리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주인공 천추태후가 종종 인간적 약점을 드러내고, 그녀의 반대편에 선 인물들의 목소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이 드라마는 이 계보 너머의 어떤 지점을 드러낸다. 과연 이 드라마의 나침반은 어딜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연기자 오디션을 보느라 주말에도 어느 안무 연습실에 나온 <천추태후> 연출자 신창석 감독을 만나 아직 각성하지 못한 천추태후, 그리고 드라마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들어보았다.

오늘 오디션은 어떤 역에 대한 오디션이었나.
신창석
: 목종, 그러니까 지금 박지빈 군이 연기하는 왕송이 자란 후에 동성애자가 된다. 그 상대역을 고르는 오디션이었다.

목종이 동성애자? 사료에 있는 내용인가.
신창석
: 물론이다. 최근 영화 <쌍화점>을 통해 알려졌지만 공민왕도 남색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는 것처럼 목종 역시 그렇다. 고려에는 동성애에 대한 기록이 제법 남아있는데 성에 대한 관념이 현대 이상으로 개방적이었던 것 같다.

“천추태후 시기에 확실히 국력증강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천추태후는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는 등, 당시 고려는 지금 시각에서도 굉장히 개방적인 시대 같다. 사극 연출자로서 매력을 느낄 것 같다.
신창석
: 매력적인 시대다. 가족제도 같은 것도 무척 선진적이고, 문화와 국력도 요즘으로 치면 G7에 드는 강대국이었다. 그 당시 보면 여기저기서 조공도 다 받았다. 몽고에 버금가는 초 군사 강대국인 거란을 물리치면서 아랍에서도 우리에게 조공 들어오지, 인도에서도 ‘오! 코리아 넘버원!’ 이랬던 거다. 월남이 미국 이겼던 거랑 비슷한 거지. 문화적으로는 송나라 문물도 많이 들여오고. 천추태후는 이런 고려의 안정적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녀에 대한 기록이 사료에 얼마나, 또 어떻게 남아있나.
신창석
: 사료 속에는 기록이 거의 없다. 목종이 집권할 때 섭정을 한 인물인데 그 당시 기록이 희한하게 없다. 확실한 건 천추태후 시기 국력의 증강이다. 거란과의 1차 전쟁 때 고려군 숫자가 5~6만 정도였다. 하지만 천추태후가 물러난 후, 거란과의 2차 전쟁이 시작될 땐 고려군이 3~40만 대군이었다. 그건 10년 동안 거란의 침략에 대비해 전쟁을 준비했다는 거다. 때문에 목종의 배후에 있던 천추태후가 이런 강병책의 중심에 서있던 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천추태후는 요즘 말하는 알파걸, 유리천장을 넘어선 강한 여성으로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강한 여주인공인데 그런 호전적인 면에서 간과될 수 있는 평화에 대한 열망이 성종 캐릭터를 통해 나타나는 것 같다.
신창석
: 역사적으로 봐도 일종의 정반합이 있다. 묵종 이후 집권하는 황보설의 아들 현종은 고려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다. 성종과 천추태후가 정과 반이라면 합은 현종이다. 천추태후의 북벌에 대한 이상과 자주성, 그리고 성종과 신라계의 나라 체제 정비와 백성의 안위 등을 다 아울러 고려 200년의 기틀을 만드는 인물이다.

분명 성종이 단순히 무력한 군주로 그려지기보단 나름의 이상과 신념을 가진 걸로 그려진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성종이 천추태후와 정반합을 이룰 만큼의 무게감을 보여주진 못하는 것 같다. 신라계 같은 경우도 거의 다 권력에 눈 먼 자들로 그려지고.
신창석
: 드라마를 만들 때, 한 명의 주인공이 있으면 그 반대편은 좀 나쁘게 그려질 수밖에 없는 게 있다. 대신 신라계라든지 유학자라든지 하는 쪽에도 앞으로 정당성을 주려고 노력할 거다. 22회부터 거란과의 1차 전쟁이 시작되는데 전쟁이 끝나면 두 세력 간의 갈등이 본격화된다. 그 땐 신라계 쪽이 나라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도 보여줄 거다. 나라를 고민하는 치열성은 두 세력 모두 같다는 걸 보여줄 필요는 있다. 나부터 고민을 많이 해야 하는 지점이다.

“사극의 주인공이라고 절대선으로 그릴 수는 없다”

<태조 왕건>이나 <대조영> 같은 KBS 대하사극을 보면 확실히 호전적인 구국의 영웅이 극 전체를 이끄는 슈퍼 히어로물에 가깝다. 그러면서 전쟁을 반대하는 세력은 좀 간신배처럼 그려지고. 이런 걸 넘어서려는 고민의 흔적이 보인다.
신창석
: 조금 다르게 가려고 한다. <무인시대>를 연출할 땐 권력의 다툼을 많이 그렸다. 다섯 명의 주인공이 등장했는데 이들이 집권하면 자신들이 몰아낸 세력처럼 부패하게 된다. 그러면 다른 권력자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번에도 천추태후를 일관된 영웅으로 그리려는 건 아니다. 이 사람이 거란과의 전쟁 이후 철의 정치를 펼치지 않으면 고려라는 나라가 지도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다. 그래서 피도 눈물도 없는 비장한 정치, 일종의 마키아벨리즘을 보여준다. 그렇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것이 영웅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위험한 면도 있지 않나. 군사력을 증강시키려면 결국 농사짓는 백성들을 무리하게 불러다가 훈련시켜야 하고. 절대선으로 그릴 수는 없는 일이지.

사실 우리나라 사극은 그런 백성의 사정에는 신경 쓰지 않는 ‘큰’ 역사 이야기 아니었나. 그런 한계를 넘어 ‘작은’ 역사도 다룰 생각인가.
신창석
: 그러려면 주인공이 다른 사람이어야지. 천추태후는 태조의 손녀이자 경종의 비고, 목종의 엄마에 현종의 이모다. 민중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래도 그녀가 민중의 마음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다가 권력을 잡으면서 민중과 멀어지는 지점도 그리려고 하고. 하지만 민중의 모습을 따로 디테일하게 담긴 어렵다. 나중엔 우리나라 대하사극에서도 그런 시도가 가능할 거라 생각하지만 약 20년 후에나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무래도 KBS 대하사극 스타일이 있다 보니 그 계보 안에서 파악하게 되는데 연출 역시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 좀 선이 굵다고 할까.
신창석
: 전통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우리 같은 경우에는 야외 연출도 따로 있고, 조감독들도 계속 하는 게 아니라 1년 단위로 바뀐다. 그래서 이제는 대하사극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다. 사실 처음 연출하라면 수백 명 군중 있는 거 보면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겠지만 한 번씩 그런 경험이 있다면 당황하지 않고 할 수 있다.

언젠가 <산 너머 남촌에는>이나 <황금사과> 같은 소박한 감성의 작품이 적성에 맞는다고 했는데 거기서 가장 멀리 있는 대하사극 연출은 어렵지 않나.
신창석
: 적성을 떠나 기본적으로 어려운 작업이다. 엑스트라 3~400명에다가 무술 연기자 30여 명, 연기자랑 스태프까지 하면 6~700명인데 말도 4~50마리 동원한다. 1, 2회 찍을 때는 소품차에 의상차, 배우들 차까지 해서 7~80대가 쫙 깔려 있었다. 이렇게 현장 규모가 크면 조명 넣는 것부터 다르다. 다만 사극 연출자로서의 장점이라면 목소리가 커서 전달이 좀 명확하다는 점이다. ‘어이, 거기 아저씨! 뒤로 세 걸음이요! 오케이 좋아!’ 이렇게 되는 거지.

현장 취재를 갔던 기자나 신인 연기자들에게 ‘오케이 좋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웃음) 재밌는 시그니처 포즈로 기억하더라. 현장 분위기 좋다는 얘기도 자자하고.
신창석
: 이게 힘든 작업이니까 스스로에 대한 주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100퍼센트 오케이 좋을 수는 없지만 80%만 좋아도 ‘오케이 좋아’ 할 수도 있는 거고. 그리고 같이 일하는 연기자나 스태프들의 사기를 높이려는 것도 있다. 즐겁게 분위기를 타면 잘 되는 게 있다. 연기자들도 쪼아야 잘 하는 사람이 있고, 칭찬 해줘야 잘 하는 사람이 있는데 90%의 연기자들은 칭찬을 해줘야 잘한다. 그래서 대개는 칭찬을 한다.

“국민들에게 ‘으쌰으쌰’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대하사극”

1, 2회의 전쟁 장면은 블록버스터 스타일의 KBS 대하사극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었다. 곰을 투입한 것도 독특했고, 일종의 와이어를 이용한 공성전도 인상 깊었다.
신창석
: 팬 서비스다. 사다리 타서 올라가고, 위에선 뜨거운 물 붓는 식의 공성전은 많이 나왔으니까 다른 걸 보여주고 싶었다. 곰 같은 경우, 만화처럼 될까봐 걱정했었고 그런 얘기도 없진 않았다. 사실 중국에서 촬영했으면 훈련된 곰으로 촬영할 수도 있었는데 마침 올림픽 한다고 ‘올스톱’이 되서 못 갔다. 시청자들 눈높이는 <반지의 제왕>인데 우리 제작비가 80부작 해봤자 <반지의 제왕> 한 편의 5분의 1도 안 된다. 곰이 좀 마음에 안 들었어도 너그러이 이해해달라고 적어 달라. (웃음)

그런 독특한 전쟁 장면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 천추태후가 갑옷을 입고 활을 쏘는 장면은 전통 사극보다 <반지의 제왕> 류의 판타지 느낌이 난다.
신창석
: 그건 아니다. 우리나라 전통 국궁협회가 있는데 그쪽에서 우리나라 사극에서 나오는 활 쏘는 장면이 양궁 식이라고 지적을 많이 한다. 그래서 이번에 채시라 씨가 국궁을 좀 배웠다. 오히려 그 장면은 우리나라 전통에 맞는 장면이다.

초반 전쟁을 비롯해 긴박하게 진행된 이야기에 비해 지금은 극적 요소가 감소했다. 그래서 시청률도 줄어든 것 같다.
신창석
: 기세가 좀 꺾인 느낌이지. (시청률이) 조금 내려가니까 힘들다. 24회까지 이미 대본 다 나와 있고, 20회까지 촬영한 것도 어쩔 수 없으니까 좀 더 긴박하게 느껴지도록 편집하고 있다. 22회부터 전쟁이 나오면 상황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규모가 큰 작업이니 부담도 더 큰 것 같은데 한 사람의 감독으로서 이렇게 대하사극이라는 큰 프로젝트 안에서 일하는 건 어떤 의미인가.
신창석
: 좋은 연기자, 좋은 스태프와 같이 일하는 건 모든 감독들의 꿈이니까 그런 면에서 복을 받은 건데, 그만큼 냉엄한 평가를 받아야 하니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또 국민 정서에 미치는 영향도 큰 작업이지 않나. 개인적으로 2002년 월드컵 때처럼 국민들에게 ‘으쌰으쌰’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대하사극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드라마를 통해 몽고만큼 강했던 거란을 물리치고 문화도 뛰어났던 고려에 대해 자부심이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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