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상반기 기대작들은 드라마의 통시적 지형도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작년 한 해 동안 드라마는 MBC <커피프린스 1호점>과 MBC <하얀거탑> 등을 만들어냈던 2007년 너머의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했다. 물론 스타작가 김수현과 노희경의 KBS <엄마가 뿔났다>와 KBS <그들이 사는 세상>은 여전히 탁월했지만 문제는 그 여전함이다. 거칠게 말해 2008년은 제2의 이윤정 감독이나 제2의 명인대학병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정체되거나, 혹은 퇴보 중인지도 모르는 2008년과 2009년 사이 드라마의 흐름에서 어떤 방향으로 한 걸음을 내딛느냐가 중요한 건 그 때문이다.

검증받은 원작의 보험, 수혜자는 누구일까

1월 신작의 스타트를 끊을 KBS <꽃보다 남자>를 비롯해 MBC <그대를 사랑합니다>와 SBS <스타일>은 검증받은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은다. 물론 작년부터 SBS <식객>과 SBS <타짜>, KBS <바람의 나라>처럼 만화를 원작을 한 작품들이 부쩍 늘어났지만 이들 작품은 기존 드라마의 흥행코드를 따르며 원작의 재미를 살리는 데는 실패했다. 그에 반해 <꽃보다 남자>는 동명의 일본 원작 만화의 철저히 만화적인 설정을 그대로 끌고 들어온다. 상위 1% 명문가만 다니는 고등학교에 수영 특기생으로 입학한 세탁소 딸이 존재 자체가 비현실적인 네 명의 꽃미남 도련님들과 아웅다웅하는 모습, 그리고 이들 도련님이 여주인공을 왕따시킨다는 설정은 한국 트렌디 드라마의 흥행코드였던 신데렐라 스토리를 독특한 방식으로 비틀어 놓는다. 흔한 방식의 로맨스를 거부한다는 점에서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강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그대를 사랑합니다>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뿔났다> 같은 작품에서 간헐적으로 볼 수 있던 황혼 로맨스를 전면에 내세워 월화 미니시리즈로 편성하는 것은 원작자 강풀의 이름값에 기대더라도 상당한 모험이다. 이것은 드라마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닿아야 할 새로운 영역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우유배달을 하는 김만석(최불암)과 폐지를 줍는 송이뿐(나문희) 사이의 로맨스는 기존 드라마가 써먹은 실장님과 말단 여직원의 만남, 아내의 친구와의 불륜 같은 관계 너머에도 재밌는 연애가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한국형 칙릿 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타일>이 기대만큼이나 우려되는 건 이런 식의 새로움을 시청자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명품을 좋아하고 패션에 관심 있는 직장 여성에 대한 이야기와 이미지는 이미 너무 자주 반복됐고, 시크한 도시남녀는 이제 희화화의 대상에 이르렀다. 이미 어디서 봤을 것만 같은 31살 패션잡지 피처 에디터의 기시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보다는 ‘어떻게’ 이야기하느냐가 중요해진다. 이것은 이미 800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친구>를 원작으로 하는 MBC <친구, 우리들의 전설>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2009년, 대작 드라마들의 실험장

원작 감독인 곽경택 감독이 직접 연출을 맡은 <친구, 우리들의 전설>은 이미 준석 역의 김민준과 동수 역의 현빈이 캐스팅되며 관심을 모으는 대작 프로젝트다. 부산에서 펼쳐지는 준석과 동수가 만드는 거친 사나이 이야기가 원작의 재탕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원작의 10배에 달하는 분량을 얼마나 밀도 있게 풀어나가느냐가 중요하다. 이 프로젝트가 흥미로운 것은 원작의 스케일을 확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미 <타짜>가 증명했듯 원작 에피소드를 대책 없이 확장하는 것은 이야기의 얼개를 헐렁하게 만든다.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드라마가 가끔 나오지만 제대로 된 완성도를 보여준 경우가 별로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전국구 조폭 드라마를 구상했다가 이야기가 가짜 같아 그만뒀다는 곽경택 감독의 “사이즈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이야기 속에 담긴 디테일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2월 방송 예정인 대작 SBS <카인과 아벨>에도 필요한 조언이다.

병원 안에서 벌어지는 형과 동생의 갈등을 그린 <카인과 아벨>은 소지섭과 신현준이 캐스팅되고 내몽골 근처 사막에서 촬영을 하는 등 과거 블록버스터 드라마들의 공식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스토리의 개연성보다는 배우의 이름값과 해외 로케이션에 비중을 뒀던 SBS <로비스트>의 흥행 참패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자칫 <카인과 아벨>은 한 해에 하나 정도 나오는 실패한 블록버스터가 될 수 있다. 거대한 외형에 SBS <외과의사 봉달희>로 미드식 메디컬 드라마를 만들었던 김형식 감독의 디테일한 연출이 어떤 식으로 결합할지 궁금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친구, 우리들의 전설>과 <카인과 아벨>은 스케일에 함몰되지 않는 대작 드라마에 대한 어떤 실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이야기는 새로운 지점을 향한 의미있는 한 발이 되어야 한다

원작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에게서 드라마 시장 바깥에서 들어온 스토리를 통해 새로움을 기대한다면 스타 작가와 감독들의 신작에서는 이미 하나의 트렌드가 된 그들의 전작 너머의 어떤 지점을 보여줄지 기대하게 된다. 이윤정 감독의 MBC <트리플>은 광고회사에 다니는 남자 셋과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같은 집에서 살게 되며 벌어지는 감정과 관계에 집중하는 연애담이다. 이윤정 감독의 전작 <커피프린스 1호점>이 탁월했던 건 귀엽고 트렌디한 연애를 보여주면서도 그 너머의 코드들을 건드렸고, 그것 자체를 트렌드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남자 셋, 여자 하나가 한 집에 산다는 독특한 설정 안에서 “<커피프린스 1호점>에 비해서 성숙한 이야기”를 그리려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형태의 트렌디 연애담을 기대해볼만하다.

김은숙 작가, 신우철 감독 콤비 역시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통속극 SBS <시티홀>을 준비 중이다. 행정고시와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대통령 자리를 마음에 품은 입지전적 인물의 이야기를 그리는 이 작품은 자칫 스케일 큰 정치 통속극에 그칠 수 있지만 전작 SBS <온에어>를 통해 과거 자신이 만들었던 통속극 스타일을 희화화시키고 비틀었던 김은숙 작가라면 너무 뻔하게 흘러가지 않을 여러 장치를 준비할 거라 기대해 본다. 한류스타 류시원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해 일본 시장 공략으로 수익을 다양화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역시 한류 스타인 박용하를 원톱으로 기용한 송지나 작가의 KBS <남자 이야기> 역시 일본 시장 진출이 기대되는 작품이다. 전작 MBC <태왕사신기>의 준비 과정부터 결말 내용까지 논란의 중심에 섰던 송지나 작가는 이번 드라마를 통해 아버지 회사가 도산하게 한 작전세력에게 복수하는 냉혹한 M&A 전문가의 이야기를 그린다.

2009년 상반기 드라마들의 내용은 각각 독립되어있지만 시청자들은 작년 방영한 작품들과의 비교를 통해 이들 드라마가 역대 드라마 지형도에서 갖는 의의를 파악한다. 마치 고우영 만화를 원작으로 한 황인뢰 감독의 신작 MBC <돌아온 일지매>가 전혀 다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작년의 SBS <일지매>와 끊임없이 비교대상이 되는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대결이고 이 대결에서 우세를 보이며 드라마는 새로운 흥행 공식과 트렌드를 만들어간다. 과연 이들 신작들은 새로운 지점을 향해 의미 있는 한 발을 내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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