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흔히 있는 기적>이라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게 잘못이었다. 좀더 정확히 이야기하려면 훨씬 더 예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영화 <안테나>를 탓해야겠지만, 최근의 이 ‘식물 망상증’은 누가 뭐래도 <흔히 있는 기적>을 보다 옮은 거다. 식물 망상증이 무엇인지 궁금한가? 말 그대로 자기가 식물이라고 착각하는 증상이다. 이 병에는 특징적 징후가 몇 가지 있는데 느리게 말하는 것, 평상시는 ‘레’ 정도의 높이로 화가 나거나 흥분해도 ‘파’를 넘지 않는 높이의 음으로 말하는 것,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도 덥석 껴안거나 와락 달려들지 않는 것, 좋아하는 여자뿐 아니라 세상 모든 일에 ‘와락’이나 ‘덥석’ 같은 부사가 끼어들지 못하도록 생활하는 것(바꿔 말하자면 10월 어느 날의 아침 기온 같은 마음의 온도를 늘 유지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의 몸에 닿으면 모든 것이 식물성으로

이웃집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간 엄마, 여장을 즐기는 아빠, 이지메 당하다 쫓겨나다시피 회사를 그만둔 기억 등이 이 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데 그 이야기는 생략하고(<흔히 있는 기적>을 보면 다 나온다), 오늘은 이 병이 얼마나 무서운가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이 ‘식물 망상증’은 옆 사람뿐 아니라 그 사람이 입은 옷에도 전염된다. 이 병을 갖고 있는 사람은 포동포동 살찐 우량아 같은 옷도 단번에 하늘하늘한 식물성으로 만들어 버린다. 카세 료가 입은 저 맨투맨 티셔츠를 봐라. 영화 <브링잇온>을 비롯한 여러 청춘 영화에서 육감적인 몸매의 치어리더들이 입었던 그 옷, <스쿨타이>나 <꽃보다 남자>처럼 명문 고등학교나 아이비 리그의 대학생들이 운동장 위나 스쿼시장 안을 달릴 때 입었던 그 옷과 같은 옷이라는 게 믿어지나. 저걸 과연 맨투맨 티셔츠라고 할 수 있을까? 특유의 매력인 땀냄새는커녕 우람하거나 발랄한 매력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데?

물론, 카세 료는 망상증이라기 보다 식물 그 자체로 보인다. 그는 어쩌면 이틀에 한 번씩 밥 대신 물만 먹고, 햇빛만 잘 쬐는 곳에 있으면 아직도 자라나는 진짜 식물일지도 모른다.그리하여 그의 탓으로 식물화된 옷이 한둘이 아닌데- 더플 코트도 등산 점퍼도 그의 몸 위에선 식물적 장치로 돌변한다- 내가 이렇게 맨투맨 티셔츠에만 집착하는 건 작금의 대세가 1980년대 풍인 까닭이다. 1980년대 분위기를 가장 손쉽게 낼 수 있도록 해주는 옷이 맨투맨 티셔츠 아니던가. 가령, 까만 레깅스에 제 몸보다 두 사이즈는 큰 맨투맨 티셔츠를 입고 빨간색이나 형광 분홍색 컨버스 운동화를 신으면 그게 바로 1980년대다. 폴라 압둘도 마돈나도 그땐 그렇게 입었다. 회색 맨투맨 티셔츠의 네크라인을 가위로 잘라내서 입고, 머리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나온 언니들처럼 부풀리면 그게 바로 1980년대 풍이다. 그 유명한 <플래시 댄스>를 잊진 않았겠지?

아, 정말 카세 료 꼴 보기 싫어 죽겠어!

그.런.데. 1980년대 분위기를 제대로 내려면 맨투맨 티셔츠를 땀내 나게 입고 디스코를 추는 것 같은 기분으로 걸어야 하는데 카세 료 때문에 다 망했다. 요새는 맨투맨 티셔츠를 입으면 자꾸만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어깨를 움츠리게 된다. 맨투맨 티셔츠를 입어도 느릿느릿 말하게 되고 “음하하핫” 웃는 대신 눈으로만 실룩 웃게 된다. 고기를 많이 먹으면 동물적 기운이 샘솟을 것 같아서 매 끼니 고기로 연명했더니 어깨만 더 두껍고 넓어졌다. 내 소원은 <플래시 댄스> 풍으로 맨투맨 티셔츠를 소화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몸은 미식축구선수에 마음만 식물인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 아 정말…. 꼴 보기 싫어 죽겠다, 카세 료. (이쯤에서 바탕화면에 깔아놓은 그의 사진을 한번 들여다본다)

글. 심정희 ( 패션디렉터)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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