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이 새하얀 눈으로 덮인 얼음 절벽에서 유빙이 깨지는 소리를 녹음한다. 그는 한 때 잘 나가는 인디 뮤지션이었지만 귀에 이명이 생겨 음감에 문제가 생긴 현석. 영화 <오이시맨>에서 서울의 소음을 피해 눈과 침묵으로 가득 찬 북해도의 끄트머리 마을로 훌쩍 떠나온 현석이 실존하는 인물처럼 느껴지는 건 그를 연기하는 배우가 다름 아닌 이민기라서다. 모델 시켜준다는 말에 별다른 망설임 없이 서울로 훌쩍 올라온 이 김해 청년의 가벼운 발걸음이라면 왠지 어디라도 떠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만약 그가 모델을 하러 서울에 올라오고, 연기 데뷔작 KBS 드라마시티 <우리 햄> 오디션에 도전했던 결정이 꿈을 좇아 굳게 내딛은 한 발이었다면, 그 지점에서 그의 발걸음은 꿈의 무게감에 묶이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단일한 이미지일 수 없을 청춘에 대해 기성세대가 부여한 열정적 이미지의 족쇄다. 때문에 “무슨 대단한 욕망이라든지, 열정이라든지, 가슴 속 깊은 진지함이라든지 하는 드라마 대사 같은” 감정이 아닌, “새로운 걸 시작할 때 누구나 느끼는 들뜬” 기분 정도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그가 희망과 패배감 모두를 가진,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캐릭터를 연기하며 청춘의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준 건 흥미로운 일이다.

심각하지 않다, 우울하지 않다, 귀엽다

가령 동네 루저들의 모험담 KBS <얼렁뚱땅 흥신소>에서 보물을 찾다 땅속에 갇힌 무열이 웃으며 “굶는 건 자신 있지”라고 말할 때,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변두리 태권도장 사범의 찌질한 일상과 생존에 대한 희망적 태도는 묘한 교차를 이룬다. 10만 원짜리 수표 두 장에 혹해 실종된 애완 고양이를 찾으면서도 “이 시대에 애완동물은 가족이야. 가족 찾아주고 돈 좀 받는 게 뭐가 나빠. 그래도 불법이라면 좋아, 난 죄를 짓겠어. 이 시대의 무법자로 살아주지”라고 허세를 부리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현실은 시궁창일지 모르나 이유 없이 기세등등한 모습. 그것은 그의 이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킨 MBC 베스트극장 <태릉선수촌>의 홍민기와도 일치한다. 유니폼 뒤에 ‘베스트 홍’이라고 써 붙인 유도 국가대표 홍민기는 아마 역대 드라마 캐릭터 중 이십 대의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장 잘 표현한 인물일 것이다. 여기서 자신감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 ‘근거 없음’이다. 국가대표 선발전만 앞두면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는 징크스 때문에 오랫동안 상비군을 벗어나지 못하는 민기 역시 ‘베스트’와는 거리가 먼 청춘이다. 하지만 미완이고 어설프기 때문에 청춘은 완성형으로 고정되지 않고 앞으로 굴러갈 힘을 얻는다. 어설퍼도 아름다운, 아니 어설퍼서 아름다운 시기를 보내는 남자는 그래서 귀엽다.

20퍼센트 부족한 능력을 20퍼센트의 의욕으로 메워보려고 하는 이들 캐릭터는 이민기의 어딘가 결핍된 느낌의 몸을 통해 형상화될 때 그 매력을 십분 발휘한다. 사진기자가 촬영 중 감탄사를 몇 번이나 연발할 만큼 그는 탁월한 신체비율과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포토제닉한 모델이지만 그 깡마른 몸이 화면을 통해 등장하면 땅에 뿌리박지 못한 마른 나무처럼 불안해 보인다. MBC <진짜 진짜 좋아해>에 같이 출연했던 류진이 “사실은 너 처음 봤을 때 인상이 너무 더러워서 되게 나쁜 앤 줄 알았다”고 말할 만큼 부리부리하면서도 퀭한 눈 역시 그런 분위기를 더 깊게 한다. 꽃미남이나 호남, 훈남 등 어떤 범주로도 쉽게 분류할 수 없는 이 독특한 외형이 어설프고 순진한 이십 대 남자의 정체성을 담아낼 때 그는 종종 ‘귀엽다’는 범주로 분류된다. 때문에 영화 <바람 피기 좋은 날>의 이슬(김혜수)이 자신에게 여자랑 자 본 적은 없어도 “그래도 잘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고선 정작 모텔에선 자기 옷을 먼저 벗어야할지 여자 옷을 벗겨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누나들의 로망’과 바람을 피우고, 영화 <로맨틱 아일랜드>의 인기가수 가영(유진)이 영문과지만 영어도 잘 못하는 백수 정환의 여자친구가 되는 게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연애 앞에서 쿨한 척 하는 KBS <달자의 봄> 강태봉이 그럼에도 귀엽고 매력적인 연하남으로 기억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매혹적인 시기를 관통하고 있는 럭비공

이처럼 무력하면서도 그 때문에 역설적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 날의 모습을 연기한 이민기가 최근 들어 “막연히 좋아하지만 학습은 없고, 그 한순간 열정적”으로 빠지게 된 음악이라는 분야로 그 가벼운 발걸음을 옮긴 건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함께 작업한 프리템포나 위켄더스 같은 뮤지션의 이름값이 아닌, 그가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는 이십 대의 특권을 마음껏 누린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가 예전 캐릭터와 달리 감정 표현이 담담한 <오이시맨>의 현석을 연기한 것 역시 변신이나 성장이 아닌, 언제나 그랬듯 설레는 마음 하나로 시도했던 도전의 한 모습에 가깝다. 덕분에 이민기라는 배우, 아니 그냥 이민기는 이제 더 예측하기 어려운 존재가 됐다. <태릉선수촌>에서 수아(최정윤)가 동경(이선균) 대신 “어디로 튈지 몰라 불안한” 민기를 선택한 건 “(동경) 오빠처럼 편안하진 않지만 늘 기대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민기도 마찬가지다. 방황이든 모험이든 어디로 갈지 모르기 때문에 매혹적인 시기를 보내는 그가 과연 또 어디로 훌쩍 떠날지, 우린 늘 기대하며 보게 될 것이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