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영을 보면 잠이 온다. 아니 잠이 들어도 좋을 것만 같다.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복수도 <아일랜드>의 재복이도 <영어 완전정복>의 문수도 <아는 여자>의 치성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윤수도 <비몽>의 진도, 그녀 앞에서는 치료를 구하고, 무식을 드러내고, 자존심을 낮추고, 치부를 드러내고, 눈물을 보이고, 급기야 잠을 잔다. 어쩐지 그녀 앞이라면 안전할 것 같다. 보살피고 품어야 할 여자들이 가득한 스크린에서 이나영은 기묘한 편안함과 따뜻한 이해의 품을 허락하는 여배우다. 이 여자는 한 순간도 쉬웠던 적이 없지만 도도함으로 무장하지도 않았고, 강직한 살갗 아래 늘 부드러운 속살을 유지했다. 무조건적인 모성의 품과는 다른, 이상적인 여성의 품. 그렇게 이나영은 세상의 남자들을 잠재운다.

그러나 정작 이나영은 잠 못 드는 밤이 많은 아가씨다. “졸려 죽을 때까지 버티다 자는 편”이라는 그녀가 마지막 SOS신호를 보내는 곳은 역시 영화다. “저에게 영화는 감성을 공부하고, 자극 받는 텍스트북이기도 하고, 함께 공상이나 상상에 나래를 펴고 가끔은 질투도 할 수도 있는 친구기도 해요. 하지만 새벽 3시 넘어 영화를 본다는 건 그 영화에 대한 기대가 거의 없다는 거거든요. 평소 좋아하는 영화나, 머리 쓰면서 봐야 할 것 같은 영화들은 이런 시간엔 좀처럼 안보게 되더라고요.”

그러니 이나영이 추천하는 다음의 영화들은 “잠들 수 없는 밤, 아무 기대 없이 보게 되었는데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란, 그래서 도저히 정지버튼을 누를 수 없었던 영화” 리스트이다. “단, 잠이 확 깨는 영화들은 아니니까 오해하시지는 마세요. (웃음) 그런데 이상하죠? 시계를 볼 때 마다 새벽 3시 40분 인 거예요. 음…나만 그런가?” 불면의 밤, 만약 당신의 시계가 새벽 3시 40분을 가리키고 있다면 잠과의 끝나지 않는 사투를 거두고 이제, 조용히 플레이버튼을 눌러라. 혼자가 아니다. 그녀도 어디선가 함께 보고 있을 것이다. 아닐 비(非), 꿈 몽(夢), 꿈이 아니다.

1. <에이프릴의 특별한 만찬>(Pieces of April)
2003년 │ 감독 피터 헤지스

“독립영화 특유의 사소하지만 묵직한 이야기도 전개도 좋았고, 에이프릴의 가족과 이웃들 캐릭터도 어느 하나 허투루 만든 흔적이 없는 영화예요. 특히 케이티 홈즈가 빨간 염색머리에 스모키 메이크업을 한 문제투성이 10대로 나오는데, 지금과 비교하면 저 사람에게 저런 모습도 있었구나, 감탄하게 되요. 그 또래의 막무가내지만 불안하고 여린 느낌을 너무 잘 담아내더라고요. 단순히 역에 몰입해 힘 줘서 찍는지, 즐기면서 찍는지는 같은 배우들에게 특히 잘 보이는데, 저 사람 정말 재미있게 찍고 있구나, 하는 걸 알겠더라고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유정의 느낌을 잡기 위해서 촬영 전에 한 번 더 꺼내 본 영화기도 해요.”

<어바웃 어 보이>의 시나리오 작가인 피터 헤지스의 감독 데뷔작. 문제적 삶을 살아가던 10대 소녀 에이프릴이 추수감사절을 맞이해 떨어져 살던 가족들을 불러 모으면서 한판 소동극이 펼쳐진다. 문제가족의 환부를 과감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세심하고 따뜻한 손길로 치료하는 영화.

2. <안녕하세요>(お早よう)
1959년 │ 감독 오즈 야스지로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전집 DVD가 있는데, 늘 부담스러운 숙제처럼 느껴졌던 게 사실이었어요.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의 작품들이니 좀 무겁겠군, 하는 선입견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동경이야기>나 <만춘>보다는 비교적 편해 보이는 제목의 <안녕하세요>를 꺼내 들었는데, 생각보다 영화가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텔레비전 수상기를 두고 벌어지는 꼬마들 이야기인데, 아유, 저것들 귀여워서 어떻게 해, 하면서 봤어요. 그렇게 훈훈하게 유쾌한 가운데 가슴 한 켠부터 짠한 기운이 올라와서 온몸이 데워지는 느낌이랄까. 겨울밤에 특히 어울리는 영화일거예요.”

TV를 사 달라 조르던 꼬마형제는 일체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부모에 반항하고 이들의 조용하고 맹랑한 시위는 마을에 작은 오해와 사건을 만든다. 옆집 숟가락 숫자까지 알만큼 상호 개방적이었던 시절, 1950년대 일본 풍경을 담담한 시선과 유머러스한 상황극으로 펼쳐낸다.

3. <작은 거인>(Little Big Man)
1970년 │ 감독 아서 펜

“한 시네마테크에서 미국영화 특별전을 할 때 <미드나잇 카우보이> <졸업>같은 더스틴 호프만 전성기 영화를 본 적이 있어요. 그때 처음으로 이 배우에게 관심이 생겨서 이런 저런 작품들을 다 챙겨보게 되었죠. 지금 더스틴 호프먼은 그저 연기파 배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젊은 시절 그는 너무 섹시하고 매력적이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거인>이란 제목도 그렇고 인디언이 등장하는 영화라서 생소하고 재미없을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고정관념을 확 깨주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코미디를 너무 좋아하는 데 더스틴 호프먼의 연기에 웃느라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영화는 121살이 된 잭 크랩이 역사학자에게 자신의 지난 삶을 이야기 해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유머와 풍자 속에 피로 얼룩진 19세기 개척시대 미국 역사를 담은 토마스 버거의 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

4. <노트 온 스캔들>(Notes On A Scandal)
2006년 │ 리차드 이어

“워낙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배우를 좋아해요. <커피와 담배>나 <아임 낫 데어>도 그렇고 이 여자는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언제나 기대가 되는 배우니까요. 게다가 주디 덴치까지 나오니 그야말로 여배우들의 영화인 셈이죠. 특히 케이트 블란쳇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는 순간, 이 배우가 이렇게 예쁜 배우였구나, 새삼 느끼게 되요. 그저 이목구비가 예쁘다는 게 아니라 그 표정이나 느낌이 너무 좋아서 클로즈업 된 순간 화면을 정지시켜 놓고 한참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어요. 혹 그 아름다운 기운을 닮을 수 있을까 해서요. (웃음)”

15살의 남자제자와 사랑에 빠진 젊은 여교사 쉬바 그리고 우연히 그들의 정사를 목격하게 되는 나이든 여교사 바바라. 고단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던 쉬바에게 소년과의 사랑은 멈출 수 없는 폭풍처럼 찾아 들고, 그녀의 행적을 지켜보는 바바라의 노트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로 채워진다. 두 여배우의 숨 막히는 연기가 플롯을 뛰어넘는 긴장감을 조성하는 아름다운 스캔들.

5.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1969년 │ 감독 조지 로이 힐

“우연히 폴 뉴먼 인터뷰를 볼 일이 있었는데, 이야기 중에 선댄스 영화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왔어요. 그 가운데 <내일을 향해 쏴라>가 언급됐는데 제목이나 음악이 너무 익숙해서 당연히 본 영화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막상 시작했는데 처음 본 영화더라고요 (웃음). 저는 오히려 이 고전을 패러디 한 후기 영화들을 원전보다 먼저 본 세대였던 거예요. 시나리오도 너무 훌륭하고,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티격태격 주고받는 말장난이나 유머, 행동들의 호흡이 너무 좋아서 머릿속에 하나하나 박아놓고 틈 날 때마다 꺼내보고 싶은 영화예요.”

주제가인 ‘Rain Drops Keep Falling on My Head’을 비롯 총소리의 여운과 함께 정지된 화면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도 인구에 회자되는 엔딩 신이다.

“많이 쉬었잖아요. 몸이 근질근질해요”

오는 2월, 오다기리 조와 함께 출연한 <비몽>의 일본 개봉을 앞두고 1월 중순 도쿄로 날아간 이나영은, 1월 21일 다시 부산행 비행기에 올랐다. 시네마테크 부산의 ‘수요 시네클럽’에 초대받아 프랑소와 오종 감독의 <사랑의 추억>을 관객들과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작은 만남을 가진 것. 이렇게 1월 초부터 그 어느 해 보다 바쁜 스케줄로 움직이고 있는 이나영에게 2009년은 운동에너지가 최고조에 달한 해다. “많이 쉬었잖아요. 몸이 근질근질해요. 지금은 연기를 하고 싶다, 좋은 작품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어요. 열정이 아주 부글부글 넘쳐난다니까요! (웃음)” 당신이 잠든 사이, 이나영은 깨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행여 찾아올 당신의 불면의 밤은 이제 이나영의 영화가 달래 줄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밤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의 낮보다 치열할 예정이다.

글. 백은하 (on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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