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우리의 대화 속에 고현정은 없었다. MBC <히트>의 차수경이 마지막 총성을 울리고 사라진 이후 무려 2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고현정은 영화 <해변에 여인>에 이어 홍상수의 신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촬영하기 위해 얼마간 제주도에 머물렀고, 신동엽, 유재석 등이 소속된 ‘디 초콜릿’으로 소속사를 옮겼으며, 생전 안 나가던 예능프로(‘무릎 팍 도사’)의 녹화를 마쳤다. 2009년 초엔 파격적인 의상과 메이크업을 하고 3명의 포토그래퍼들과 함께 <보그> 화보를 찍기도 했다. 결혼과 이혼 그리고 복귀로 이어지는 빠른 3악장을 끝내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누이. 고현정이 지금 <10 아시아>의 독자들과 눈을 마주하고 있다. 당신이 알던 고현정은 여기 있는가. 다 읽기 전에는 감히 장담하지 말자. 그러고 쉽게 예상하려고 하지도 말자.

“TV를 한참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그냥 한낱 먼지라는 걸 깨달아요”

작년 한 해 별다른 뉴스도 없고, 보여진 구체적인 작품이 없다 보니 도대체 고현정은 뭘 하는 거야 궁금했어요.
고현정:
아무 것도 안 했어요. 2007년 11월부터 최근까지, 지난 소속사와 계약이 끝나고 한 1년 2개월, 소위 말하는 ‘자유의 몸’이였어요. 이혼하고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처음으로 푹 쉬었던 시간이었던 거죠. 몸 움직이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가까운 사람들 만나고 집에만 있었어요. 아, 하루 종일 TV는 열심히 봤어요. 거의 옴부즈맨같이. 케이블 채널부터 교육방송, 공중파까지 공부하듯이 다 보려고 노력했어요. 그리고 워낙 코미디 보면서 웃는 걸 좋아하니까 <개그콘서트>, <웃찾사> 각종 버라이어티 쇼들까지 다 챙겨보고 있어요. 저 사람은 저렇구나, 저 앤 괜찮네, 저 개그는 곧 뜨겠구나, 혼자 씹고 혼자 칭찬하면서. (웃음) TV를 한참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그냥 한낱 먼지라는 걸 깨달아요. 뭐 대단한 획을 그을 수도 없고, 겨우 세상의 속도에 따라 가면 다행인 거죠. TV는 그걸 보여줘요. 극명하게.

요즘도 두통약은 계속 달고 살아요?
고현정:
네, 어떨 땐 세끼 식사처럼 먹는 경우도 있어요. 어릴 때부터 쭉 두통이 있었는데 요즘은 만성으로 달고 다녀요. 초등학교 때는 머리가 너무 아파서 학교를 못간 적도 많아요. 성장에 비해 영양이 못 따라간다고 했어요. 키는 너무 큰데 먹는 건 지금의 10분의 1도 안됐으니까. 비위가 약해서 도시락 냄새가 이상하면 밥상 앞에서 토한 적도 많아요. 미스코리아 나가기 전까지는 고기도 못 먹을 만큼 약했어요. 그러다 전 남편 만나 연애 하면서 많이 건강해지고 활발해진 것 같아요. 지금은 뭐, 돌도 씹지만. (웃음)

복귀한 이후 고현정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있었잖아요. 다소 과잉된 보호막들, 까다로울 거라는 이미지, 스태프를 써도 최고급만을 원하고, 심지어 인터뷰할 기자도 스스로 정한다는 식의 이야기들 말이죠.
고현정:
그게요, 좀 과장된 면이 있지만 모든 배우들이 사실 원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이왕이면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싶고, 최고의 스태프들과 호흡을 맞추고 싶고, 좋은 기자님들 만나서 제대로 인터뷰하고 싶은 마음. 하지만 겸손한 게 미덕인 나라니까 다들 말 못하고 있는 거죠. 자의건 타의건 그런 좋은 환경에서 복귀 할 수 있었다는 게 감사할 일인 거 같아요. 매니저의 과잉보호네 어쩌네 했어도 어쩌면 그건 누구 때문이 아니라, 다 제가 원해서 만들어진 환경일 수 있어요. 만약에 철저하게 관리해주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제 성격에 어디 가서 실수도 많이 하고 사고도 많이 쳤을 거예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미친년들의 열전’ 이래요”

결국 컴백 후의 선택은 ‘홍상수’ 였어요.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관점에 따라서는 벌거벗는 느낌이 들만큼 사실적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전체가 완벽히 짜인 세계일 수도 있어요. 그런 면에 있어서 고현정이라는 배우에겐 뻔하다면 뻔한, 신선하다면 참 신선한 선택이었어요.
고현정:
결혼 생활하면서 홍 감독님 영화를 다 보게 되었어요. 재미있긴 한데 영화로 장난질을 치지는 않는 것 같고, 의외성도 좋았어요. 우리 사는 게 어쩌면 모든 의외성의 집합체니까. 그리고 볼 때 마다 정말 까무러칠 만큼 웃었어요. 어찌 됐던 남자로 태어나서 자기 스스로를 까부수시잖아요. 한참 내가 누구의 아내로 살면서 그런 남자를 스크린에서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꼈나 봐요. 홍상수 감독의 시점으로 제 인생도 다시 보게 되었고요.

홍 감독과는 어떻게 작업을 결정 하게 되었나요?
고현정:
일단 모든 과정이 간단해서 좋았어요. 합시다, 할까요?, 네. 그러니까 바로 가시더라구요. 저도 한다고 하면 그냥 하는 사람이거든요. 처음 카페에서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저에 대해 정말 구체적인 칭찬과 구체적인 비난을 해주셨어요. 그런 명쾌함과 심플함이 좋았던 것 같아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그렇게 결정했고.

상반기 개봉 예정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벌써 기술 시사를 마쳤다고 들었어요.
고현정:
보신 분들 말씀으로는 ‘미친년들의 열전’ 이래요. (웃음) 근데 이건 진짜 하는 말이 아니라, 제가 제일 못한 거 같아요. 영화 말미에 1/5쯤 등장하는데, 전 앞에 장면들이 그렇게 찍힌 줄 몰랐어요. 저 혼자 너무 느끼하게 연기 한 것 같아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연기한 ‘고순이’는 어떤 여자에요?
고현정:
나이 많은 화가와 사는 여자인데 우연히 찾아온 옛 남자와 다시 얽히죠. 어떻게 보면 꽤나 많은 일들을 겪은 것 같은데 지극히 평범한 여자에요. 전 제가 그런 거 같거든요. 밖에서 보면 드라마틱한 삶이라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그 정도 드라마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싶기도 하고. 순이도 ‘세상 사람 다 그렇게 사는 거지’ 하는 자세를 보이는데 저와 약간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아요. 극히 평범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특별한 지점도 있고, 때론 정말 미친년 같기도 하고. 제목 그대로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여자죠. 이 말, 박찬욱 감독님의 “너나 잘하세요” 이후로 어느 자리에서나 써먹을 수 있는 말이에요. (웃음) 달인 김병만 선생님의 말대로 “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말아요!”같은 거.

“나는 ‘실력’이라고 믿고 싶은데 이미지를 팔고 살았더라구요”

얼마 전 녹화를 마친 ‘무릎 팍 도사’ 의 방송을 코앞에 두고 있어요.
고현정:
정말 걱정되고 잘 모르겠어요. 3시간 넘게 녹화를 했는데 무슨 말 했는지 잘 기억도 안 나고. 똑 부러지게 대답을 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사실 이 질문을 왜 하는지 알겠는데 거기서 시침 뚝 떼고 순진한 척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유, 이런 질문은 좀 그렇다, 라고 눙칠 수도 없고. 집 앉아서 보는 거랑 내가 직접 도마 위에 올라가는 거랑은 참 다르구나. 역지사지라는 게 말이 쉽지, 실제로 당해보지 않으면 진짜 힘든 거구나 했어요. 엄살이 아니라 이제 그분들 손에 달린 거죠.

‘무릎 팍 도사’의 독함이야 워낙 유명한 건데, 나가기 전에 이미 각오하지 않았어요?
고현정:
제법 배짱이 있다고 착각하고 나갔는데 녹화를 끝내고 보니 이게 짠 요리가 될지 싱거운 요리가 될지 매운 게 될지 진짜 모르겠어요. 90년대 활동 할 때도 인터뷰를 많이 한 편이 아니고, 돌아온 이후에는 대중과 접촉하기 싫어한다는 이미지 밖에 없잖아요. 그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에겐 이를테면 근대화가 없이 너무 모던한 시대가 온 걸 텐데. 그게 어떻게 비춰질지 모르겠어요. 전 남편에 대해서도, 그 사람은 이제 고현정의 남편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을 수도 있는데 너무 거론했나 싶기도 하고. 제가 그냥 광대같이 재미있게 비춰지는 건 상관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제 말로 인해 피해를 입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고요.

사람은 늘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결혼했을 때는 배우로서의 인생에 대한 미련이 있었을 텐데, 또 다시 이 길로 돌아와서 6년이 흐르고 보니 어떤가요?
고현정:
물론 약간의 변수는 있겠지만 사람이 정말 생각지도 않은 길을 가는 경우는 드물잖아요.“정말 이런 걸 바란 게 아닌데 이렇게 됐어요”라는 변명은 비겁하다고 봐요. 누군가에게 그렇게 보여진다는 건 얼마만큼은 자기 의지의 결과예요. 정말 공정하게 얘기하면 결국 모두 자기가 지향했던 바일 수도 있다는 거죠. 예를 들어 내가 빨간색 옆에는 가지도 않았는데 빨간 기가 보인다는 얘기를 듣진 않는 거죠. 모두 제가 선택한 길이니까 후회는 없어요.

한참 활동하던 90년대와 컴백한 이후 21세기 한국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배우로서 환경의 변화를 느끼나요?
고현정:
맞는 답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쩌면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떤 사람은 실력을 팔고, 어떤 사람은 이미지를 팔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른 것들을 팔죠. 물론 좀 더 세련되게 상품화 시키는 감은 있지만.

고현정이란 배우는 어느 쪽이었던가요?
고현정:
나는 ‘실력’이라고 믿고 싶은데 알고 보니 이미지를 팔고 살았더라구요. (웃음) 뭐가 없잖아요. 미스코리아 나갔지, <모래시계> 했지, 그러다 재벌 집에 시집갔지, 이혼했지, 경호원 달고 컴백했지, 컴백 후에도 연기에 대한 질문보다 피부이야기나 결혼 이야기만 하지. 난 내 실력으로 이만큼 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회자된 건 이미지였던 거예요. 물론 늘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고 믿지만, 객관적으로 따지면 전 아직까지 이미지를 파는 것 같아요. 여전히 이미지의 뒤에 서 있는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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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백은하 (on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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