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우빈 기자]
지난달 25일 종영한 KBS2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동백의 엄마 정숙을 연기한 배우 이정은. / 서예진 기자 yejin@
지난달 25일 종영한 KBS2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동백의 엄마 정숙을 연기한 배우 이정은. / 서예진 기자 yejin@


2019년은 이정은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기생충’의 문광, OCN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의 엄복순 역을 통해 대중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지난달 25일 종영한 KBS2 ‘동백꽃 필 무렵’에서는 목숨값마저 딸에게 주려하는 깊은 모성애로 시청자를 울렸다. ‘동백꽃 필 무렵’은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이 된다는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다. 이정은은 7살 된 동백(공효진)을 버렸다가 27년 만에 갑자기 나타난 친모 정숙을 연기했다. 방송 내내 동백의 엄마, 그리고 우리의 엄마로 살았다. ‘내가 죽어도 넌 행복해야 한다’는 말로 뭉클한 감동을 안겼다. 남다른 노력과 연구, 연기력으로 ‘모두의 엄마’ 정숙을 탄생시킨 이정은을 지난 4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10. 동백꽃 필 무렵’이 끝난 지 시간이 조금 지났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
이정은 : 좋아해 주신 분들이 많아서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인사하는 것도 행복한 요즘이다.

10. 영화 ‘기생충’을 시작으로 OCN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 그리고 ‘동백꽃 필 무렵’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모든 작품이 잘 돼서 ‘핫한 배우’가 됐다.
이정은 : 작품을 연속으로 하다 보니까 지인들은 채널만 돌리면 내가 나온다고 하더라. 두드러진 작품이 많아 좋게 봐주신 것 같다. 흥행도 됐고, 시청자들도 많이 사랑해주셨다. 완전히 나의 황금기다. (웃음)

10. 황금기의 중심에 있는 기분은 어떤가?
이정은 : 운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운이 있는 사람 옆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게 낫다는 말을 좋아한다. 나도 운이 좋았지만 운이 있는 사람들 옆에 있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낸 것 같다.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

10. 작품 선정의 기준이 궁금하다.
이정은 :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마음이 잘 맞나를 본다. 동료들이 좋으면 작품을 선택한다. 또 대본을 읽다 보면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좋아할 것 같다고 직감할 때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이 비교적 소박한 작품이다. (소박하지 않아) 예외가 된 작품이 ‘타인은 지옥이다’다. 그건 악당들이 다 죽는 내용이 좋아서 선택을 했다. (웃음)

이정은은 “엄마가 생각나는 드라마라고 하시는데 사실 나는 내 연기하기 바빠서 엄마가 생각날 틈이 없었다. 겨울에 가족여행을 다녀오려고 한다”고 말했다. / 서예진 기자 yejin@
이정은은 “엄마가 생각나는 드라마라고 하시는데 사실 나는 내 연기하기 바빠서 엄마가 생각날 틈이 없었다. 겨울에 가족여행을 다녀오려고 한다”고 말했다. / 서예진 기자 yejin@
10. 정숙 때문에 ‘동백꽃 필 무렵’이 ‘엄마에게 전화 걸고 싶은 드라마’라는 소릴 들었다.
이정은 : 사실 평소에는 엄마보다 언니에 가깝다.(웃음) 내가 포근한 인상을 가지기도 했고 모성애가 강한 엄마를 연기해서 그런 말을 들은 것 같다. ‘동백꽃 필 무렵’에서는 드라마틱하게 생기지 않은 사람에게 드라마틱한 과거와 사연이 있어서 더 마음이 가고 공감이 간 게 아닐까 한다. 무엇보다 임상춘 작가님이 글을 기가 막히게 썼다. 정숙의 다큐멘터리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10. ‘기생충’ ‘타인은 지옥이다’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정숙이 초반에 등장했을 때 시청자들이 다들 의심했다. 그냥 온 게 아니라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는 추측들이 많았다.
이정은 : ‘동백꽃 필 무렵’ 방송이 시작되고 반응을 주의 깊게 살펴봤다. ‘정숙이가 그냥 등장한 게 아닐 거다’라는 의견이 많더라. 딸인 동백이를 죽이러 왔다는 글도 있었다. 추리하는 댓글이 많았는데 나는 기분 좋게 긍정적으로 봤다. 물론 답답하고 억울한 부분은 있었다. 이유가 있어서 나타난 건데 이렇게 의심해도 되나 싶었다. 딸을 버린 엄마의 비애다. 하하.

10. 동백의 인생이 워낙 기구해 가려졌지만, 정숙도 만만치 않다. 특히나 목에 대충 두른 거즈 손수건이나 대충 묶은 머리가 더 마음이 아팠다. ‘엄마’의 모습을 어쩜 그렇게 절절하게 연기했나. 많은 시청자들이 정숙 때문에 매 회 울었다.
이정은 : 아마 정숙에게 나의 어머니 모습이 있을 거다. 웃기는 장면은 충분히 웃기고 슬픈 장면은 덤덤하게 하자고 생각했다. 글이 충분히 슬픈데 슬픔을 더 강조하는 것보다 담백하게 표현했다. 슬픈 상황에서 덤덤한 게 더 슬프게 보일 수도 있지 않나. 임상춘 작가가 쓴 정숙의 모습이 슬펐고 그래서 어려웠다. 내가 잘 소화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아는 만큼만 하자는 생각으로 연기에 임했다.

10. 처음 대본을 받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이정은 : 중압감은 있었지만 사실 감탄한 부분이 많다. 까불이(이규성 분)를 직접 만나는 부분도 놀랐고, 동백이가 ‘나랑 7년 3개월 어땠어?’라고 물었을 때 ‘적금 타는 것 같았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고 정말 글 잘 쓴다고 감탄했고 감동받았다. 이 대본에 누가 되지 않게 표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진=KBS2 ‘동백꽃 필 무렵’ 방송화면
사진=KBS2 ‘동백꽃 필 무렵’ 방송화면
10. 정숙이 극 중간에 등장한다. ‘동백꽃 필 무렵’이 첫 회부터 쭉 잘 되고 있던 작품이라 어느 정도 부담감이 있었을 것 같다.
이정은 : 1회부터 모니터를 엄청 했다. 아무래도 정숙이가 등장하고 나서부터 이야기가 빨라지고 잠재된 것들이 터지니까 부담이 되더라. (공) 효진 씨에게 ‘내가 나오고 시청률 떨어지면 죽음이다’라며 불안해 했다. (웃음) 반응이 좋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10. 동백에게 치매인 척 연기를 하지 않나. 치매 환자보다 그런 척 연기를 하는 게 더 어려웠을 것 같은데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이정은 : tvN 드라마 ‘아는 와이프’ 때 치매 환자를 연기한 경험이 있다. 그때 환자분들을 많이 봤고 치매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도 봤다. ‘동백꽃 필 무렵’은 치매 환자가 아니라 시청자들에게 정숙이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라는 걸 믿게 하는 게 중요했다. 또 가장 중요한 순간에 진실을 말해주는 것도 중요했다. 속에 있는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사를 지르밟는 식으로 표현을 했다. 진심이 담긴 내 말이 금은보화 같이 들리도록 했다.

10. 딸 동백으로 함께 했던 공효진은 어떤 배우였나?
이정은 : 건강하고 중심을 잘 잡는 힘을 가지고 있다. 연기는 물흐르듯 자연스럽다. 천재적인 배우라 생각한다. 왜 공효진, 공효진 말을 하는지 알겠다.

10. 손자였던 필구, 김강훈은 어땠나. 차영훈 PD는 제2의 유승호, 여진구가 될 것 같다는 극찬을 했다.
이정은 : ‘기생충’에서 아역배우 (정) 현준이가 카메라가 도는 순간을 본능적으로 알아서 천재라고 생각했다. 방송에서는 (김) 강훈이가 그렇다. 큰 영감을 주고 울리고 웃기는 대단한 배우다. 아역 배우가 아니라 배우다. 나무가 크듯 잘 큰다면 어느새 훌쩍 자라있을 것 같다.

이정은은 “공감을 주는 역할이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악역이면 충분히 미움을 받고 싶다. 역할과 본분에 맞게 연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 서예진 기자 yejin@
이정은은 “공감을 주는 역할이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악역이면 충분히 미움을 받고 싶다. 역할과 본분에 맞게 연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 서예진 기자 yejin@
10. 무명시절이 꽤 길었다가 이제야 제대로 빛을 발하고 있다.
이정은 : 지금이 좋은 것 같다. 내가 얄팍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일찍 잘 됐다면 기분이야 좋았겠지만 자만했을 것 같다. 연극 무대에 올라 관객들의 반응이 좋은 공연을 하면 어깨가 으쓱해지고 내가 뭐가 된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지금 상을 받으면 어머니한테 드린다. 상은 가까이 있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 업적을 보는 것도 좋지만, 나는 내가 간사하다고 생각한다. 대본 앞에 트로피나 상을 두고 있으면 부담스럽다. 늘 처음처럼 하는 게 좋다.

10. 연기를 함께 시작한 동료 배우나, 동년배들을 보면서 열등감이나 조바심은 느낀 적은 없나?
이정은 : 그런 감정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승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동료들이 연기를 정말 잘하기 때문이다. 나는 늦게 발전했다. 예전에 출연했던 작품들을 보면 연기를 정말 못 한다. 발연기다. 특히 영화 ‘와니와 준하’ 때 연기는 끔찍하다. 그냥 글을 읽는 수준이다. 지금은 읽는 수준을 벗어난 상태다. 연기를 잘하는 분들을 닮고 싶고 쫓아가고 싶은 마음이 나를 만들었다. (황) 석정 같은 경우는 연극 ‘햄릿’ 속 천국과 지옥 대사를 하다가 감정이 풍부해져서 졸도를 했다. 그런 사람 앞에 내가 명함을 어떻게 내밀겠나. 그 친구는 연기를 참 잘한다. 언젠가 연기를 같이 하고 싶다.

10. 연기를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
이정은 : 연기를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없다. 내가 시간 강사를 하면서 연기를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가르치는 걸 포기해야 연기를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내가 선생님인데 연기를 못 하더라. 내 시간을 쪼개면 안 되고 연기에 몰입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0. 배우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다면?
이정은 : 장면이 잘 풀리고 있을 때다. 사실 자화자찬인데, 그냥 운명 같이 이 일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잡념이 없고 장면이 잘 풀리면 ‘연기하길 잘했다’,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그런 순간들이 꽤 있었다. 순간순간 느끼는 거라 평생 갈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연기를 좋아하는 건 맞다. 사람들이 찾을 때도 찾지 않을 때도 계속 좋아했던 일이고 지금도 좋다. 나는 배우가 천직이라 생각한다.

이정은은 연기 잘하는 비결을 묻자 “그대로 멈춰져 있지 않는 것”이라며 “잘하는 선배분들과 연기를 하고 싶으면 내가 잘해야 했다. 연기로 보여줘야 하니까 책임감을 가졌다”고 대답했다. / 서예진 기자 yejin@
이정은은 연기 잘하는 비결을 묻자 “그대로 멈춰져 있지 않는 것”이라며 “잘하는 선배분들과 연기를 하고 싶으면 내가 잘해야 했다. 연기로 보여줘야 하니까 책임감을 가졌다”고 대답했다. / 서예진 기자 yejin@
10. 연기 외에 어떤 것에 에너지를 얻는가?
이정은 : 강아지와의 산책이다. 유기견을 키우고 있는데 다른 생명체와 만나는 게 굉장한 기쁨이다. 그렇다고 내가 비혼주의는 절대 아니다. 지금은 촬영할 작품들이 많아서 연애에 에너지를 쏟지 못한다. 45살 이후로 못 하고 있는데 내가 연애를 시작하면 일을 잘 안 한다. 일을 멀리하게 되더라. 부모님은 연애 안 하고 혼자 사는 게 좋다고 한다. 언젠가 또 사랑이 찾아오지 않을까싶다.

10. 배우 이정은의 삶과 인간 이정은의 삶의 균형이 잘 맞는 것 같다. 어떤가?
이정은 : 무명이 길어서 그런 것 같다.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을 때도 연기가 재밌었고, 남이 좋아하고 돈까지 생기니 안정기가 왔다. 사실 언젠가 나도 작품이 안 들어오는 시기가 올 거라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이미지 소비 혹은 역할 소비를 많이 했기 때문에 대중 혹은 연출자들이 ‘저 배우 이 역할 많이 하지 않았어?’라고 느껴 나를 찾지 않는 날이 올 거라 생각한다. 연극에게 이미 겪었기 때문에 방송에서도 예외 없이 올 것 같다. 내가 감내해야 할 부분이다.

10. 최근 ‘기생충’으로 제40회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고, 칸에 입성하는 등 주목할 만한 성적을 냈다. ‘동백꽃 필 무렵’ 역시 큰 사랑을 받아 수상 가능성이 높다.
이정은 : 이 드라마로 상을 받는 건 이른 것 같다. 고두심 선생님이나 다른 선배들의 연기를 보면서 그분들이 가진 내공의 힘을 더 배워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시상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만으로 좋고, 수상은 천천히 하고 싶다. 그래야 나도 목표가 생기지 않겠나. ‘기생충’으로 상을 받은 것 자체로 이미 복을 받았다.

10. ‘동백꽃 필 무렵’은 어떤 작품으로 남을까.
이정은 : 국민 엄마라고 불러주시는데 함부로 달 수 없는 호칭이다. 어떤 것을 얻었다기보다는 무언가를 버리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예를 들어 정숙처럼 자식을 낳았지만 버릴 수밖에 없는 사연들이 있다. 그분들에게도 숨은 사연이 있고 역사가 있는데 우리는 모르지 않나. 나도 이 드라마를 하기 전에는 그냥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함부로 비난하지 않아야 하고 위기가 올 때 사회가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작가님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도, 숨어있는 불행을 돕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우빈 기자 bin0604@ten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