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지원 기자]
SBS 드라마 ‘닥터탐정’에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로 직업병의 원인을 밝히는 허민기 역을 열연한 배우 봉태규. /사진제공=iMe KOREA
SBS 드라마 ‘닥터탐정’에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로 직업병의 원인을 밝히는 허민기 역을 열연한 배우 봉태규. /사진제공=iMe KOREA
최근 종영한 SBS 드라마 ‘닥터탐정’은 산업현장의 부조리와 산업재해 피해자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사회 고발적 메시지를 강하게 담았다.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라는 직업군도 국내 드라마에서 최초로 다뤘고 인기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출신의 PD가 연출한 첫 드라마로 주목 받기도 했다.

하지만 메시지를 강조하면서 드라마적 재미는 반감됐다. ‘닥터탐정’에 출연한 배우 봉태규도 이를 인정했다. 그는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이자 미확진질환센터(UDC, 업무상 질병에 관한 역학조사를 하는 기관)의 수석연구원 허민기 역으로 열연했다. 그는 재미와 의미 중에 의미를 택한 것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단다. 봉태규는 “일하다가 다치고 죽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다”라며 “드라마에서 다룬 사건들에 대해 ‘요즘 세상에 말이 되냐’고 하지만 메탄올 실명 사건은 고작 3년 전 일이다. 조그마한 관심이라도 계속 가져줬으면 하는 게 작은 바람”이라고 말했다.

10. 드라마를 끝낸 소감은?
봉태규: 이번 드라마는 특별하다. 마지막 방송에서 하랑 엄마 역인 황정민 선배님이 스크린도어 사건으로 죽은 아들의 일을 계기로 산업현장을 개선하고자 홀로 투사가 돼서 1인 시위에 나선다. 그 옆에 (박)진희 누나(도중은 )가 선다. 상업적 재미를 생각했다면 마지막에 더 속 시원하게 사건을 해결했어야 하는데 이 드라마는 정말 사실적으로 끝났다. 마지막회 에필로그를 보면서 울기도 했다. 그 때 이 드라마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시청률을 잣대로 본다면 성공한 드라마라고 하긴 어렵지만 이런 이슈를 다룬 공중파 드라마라면 시간이 흐른 뒤에 내 아이들에게도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뿌듯했고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10. 코믹과 진지를 오가는 허민기라는 인물을 연기할 때 신경 썼던 부분은?
봉태규: 허민기는 날라리라는 설정이 바탕이었고 나는 ‘체면을 없앤다’에 중점을 두고 연기했다. ‘리턴’ 전에는 이런 재밌는 캐릭터를 많이 했는데 한동안 작품을 쉬면서 내가 이런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잊힌 것 같다. 잊혔으니 오히려 새롭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한 게 스스로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캐릭터에 매력적으로 다가가기 위해선 감정의 진폭을 크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극 중 메탄올 때문에 실명한 피해자를 만났을 때 감정이 표출되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건 이 드라마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같았다. 이런 사건에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10. 아쉬운 시청률이 나온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봉태규: 초중반 이후 우리도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다. 보통의 드라마는 사건이 발생하고 주요 인물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9~10부부터 피해자 위주로 흘러간다. 대신 주인공들은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행적을 쫓는 장치로 머문다. 나도 당황스러웠다. 상업적인 재미와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이 방식이 우리 작품을 의미 있게 남길 수 있었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제작진은 실제 일어난 사건을 드라마적 장치로만 이용하는 대신 카타르시스는 덜 하더라도 진정성 있게 전달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 진심이 좋았다. 출연 배우들도 욕심 부리지 않고 거기에 동감해줘서 뿌듯하고 보람차다.

사진=SBS ‘닥터탐정’ 방송 캡처
사진=SBS ‘닥터탐정’ 방송 캡처
10. 드라마에서 주 52시간 근무를 강조하지 않나. 이 드라마 촬영 현장은 주 52시간 근무가 잘 지켜졌나?
봉태규: 작품 소재가 이런 만큼 감독님도 특히 신경 썼고 우리가 드라마로는 주 52시간 근무를 지킨 처음이지 않나 싶다. 드라마 크레딧이 올라갈 때 보통은 키 스태프 위주로 올라가는데 이번 드라마의 감독님은 막내부터 올렸다. 예전에는 자신을 뭉그러뜨리면서 일 하는 걸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번 드라마 현장을 통해 일하는 사람으로서 서로를 동등하게 대우하고 존중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됐다. 앞으로도 시행착오를 통해 이런 제작 환경이 정착된다면 더 좋은 분들이 들어올 것이고 그럼 더 나은 촬영 현장이 될 것 같다.

10. 박진희와 드라마를 연달아 두 작품 함께한 소감은?
봉태규: ‘리턴’에서는 같이 등장하는 장면이 거의 없어서 스치듯 끝났다. 그래서 이번 작품을 함께 한다고 들었을 때 좋았다. 진희 누나는 성실하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배우다. 그런 동료와 함께할 땐 내가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다 티가 난다. 촬영하는 6개월간 긴장을 유지할 수 있었고 긍정적인 자극이 됐다. 진희 누나는 동료들의 의견을 열려있는 자세로 수용하고 서로 의견을 낼 때도 배려해서 자신이 맨 마지막에 이야기한다. 이런 자세를 배울 수 있었던 건 이번 작품에서 얻은 큰 자산 중 하나다. 그동안 배우는 드라마라는 공동작업 안에서 개인플레이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희 누나를 보면서 개인플레이보다 서로를 배려하고 조화롭게 협력하는 연기를 할 때 더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10. 드라마가 끝났으니 리프레시 할 시간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봉태규: 아이들을 돌봐야 해서 쉴 시간이 없다.(웃음) 두 아이의 끼니를 챙겨야 하고 한 명을 유치원 보내고 나면 다른 한 명을 돌봐야 한다. 촬영하는 동안 하시시박 작가님(아내)이 육아를 전담했다. 일 때문에 하지 못한 내 몫을 해야 한다. 달리 틈은 없지만 운동할 때 정도? 필라테스를 시작했는데 굳어 있는 근육을 풀 때 오만 가지 생각이 든다. 내 근육이 찢어지는 게 아닐까 같은…(웃음) 그 때 좀 리프레시 되는 것 같다.

10. 자녀들이 아빠가 드라마 나오는 모습을 봤다면 반응이 궁금하다.
봉태규: 시하가 아직 이 드라마를 볼 연령대가 되지 않아서 보진 못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슈돌)를 끝내고 3~4개월 후 이 드라마 촬영을 시작했다. 내가 촬영 나갈 시간에 시하가 깨어 있을 때가 있는데 ‘아빠가 왜 혼자 나가나. 아빠 혼자 뭘 할 수 있겠냐’는 의문스러운 눈으로 나를 본다. 촬영장에 자신을 데려가지 않은 게 아직도 풀리지 않은 시하의 의문이다.(웃음) 한번은 세트장에 데려가 촬영하는 걸 보여줬는데 정말 좋아했다. ‘슈돌’과는 또 다른 촬영 환경이었으니까. 요즘 같이 촬영가고 싶다는 얘기를 간혹 한다. 따지자면 나는 매니지먼트사 대표고 시하가 대표 연예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아티스트의 권한을 존중해서 제작자에게 은퇴 의사를 전한 건데 아티스트가 공백의 시간을 갖고 나서인지 이젠 슬슬 복귀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이고 있다.(웃음)

자신의 장점인 코믹 연기를 다시 보여주고 싶다는 배우 봉태규. /사진제공=iMe KOREA
자신의 장점인 코믹 연기를 다시 보여주고 싶다는 배우 봉태규. /사진제공=iMe KOREA
10. ‘슈돌’ 출연의 장단점이 있을 것 같은데.
봉태규: 촬영이 생각보다 정말 힘들다. 아빠로서 아이도 돌봐야하고 출연자로서 촬영도 해야 하는 두 가지 상황에 동시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본비(둘째 딸)가 태어나고 어린이집에 처음 가게 되는 등 시하의 주변환경도 많이 달라져서 시하가 예민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하시시박 작가님과 얘기한 적도 있는데 ‘슈돌’ 출연은 저희 가족에게 좋은 영향을 줬던 것 같다. 지금도 가끔 시하가 출연한 영상을 보면 내겐 좋은 기억만 떠오른다. 나중에 시하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10. 아내를 하시시박 작가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나?
봉태규: 본명은 박원지인데 평소엔 원지라고 부른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나의 아내보다 한 개인으로 존중해주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작가님이라고 한다.

10. 아내에게 존중 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면?
봉태규: 매일. 결혼 전에도 나는 내가 별로라고 생각했다. 결혼 후 생각보다 내가 더 별로란 걸 알게 됐다. 상대방은 그걸 더 잘 알지 않겠나. 이런 나와 결혼해준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나를 존중해주는 것이다. 가사일은 최대한 반반씩 하려고 한다. 내가 촬영이 있을 때 아침을 챙겨주는데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나를 존중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혼했다고 아침밥을 챙겨주는 게 당연한 일은 아니다. 또한 내 연기를 보고 냉철하게 얘기해줄 때도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10. 결혼 전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봉태규: 내가 가진 단점을 꾸미려고 하지 않는다. 결혼 전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인정하기 힘들어 했다. 현장에서도 예민했던 것 같다. 갖가지 평가를 받게 되는 이 일을 하다보면 나 자신을 지키기 힘들다. 움츠러들고 상처 받게 된다. 하지만 작가님을 만나 결혼하고 나서는 (평가로부터) 좀 의연해지고 자유로워졌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게 큰 힘이 된다.

봉태규는 배우라는 일의 매력을 ‘기록’으로 꼽았다. “부담스럽고 무서운 일일 수도 있지만 개인의 아카이브가 쌓인다는 건 매력적인 일이에요.” /사진제공=iMe KOREA
봉태규는 배우라는 일의 매력을 ‘기록’으로 꼽았다. “부담스럽고 무서운 일일 수도 있지만 개인의 아카이브가 쌓인다는 건 매력적인 일이에요.” /사진제공=iMe KOREA
10. 데뷔 20주년이 다 돼간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봉태규: 좀 슬프다. ‘리턴’ 때까지만 해도 체력이 달린다는 생각을 안 했는데 이번엔 그랬다. 끝나자마자 운동부터 시작했다. 내년에 마흔이다.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이 들으면 웃긴다고 할 얘기겠지만 하루하루가 다르다. 데뷔 20주년을 앞뒀다고 해서 특별한 느낌은 없지만 배우라는 한 직업을 이만큼 할 수 있었다는 데 많은 분들에게 감사하다. 나를 좋게 봐주셨기 때문에 20년간 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연기에 집중하려다 보면 주변에 살갑지 대하지 못할 때가 많다. 앞으로는 더 성실히 하면서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돌아보려 한다.

10. 데뷔 당시와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봉태규: 데뷔 당시에는 배우를 취미로 한다고 얘기했다. 이걸 직업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스트레스 받을 것 같아서 재밌게 하고 싶었다. 이제는 배우를 직업으로서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다. 이 마음가짐이 가장 큰 차이다.

10. 20년 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본다면?
봉태규: 그 때도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 환갑에 가까운 나이인데 대본을 외울 수 있고 현장에서 연기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이번 드라마에 함께 출연한 (박)지영 누나를 보면서 느낀 게 많다. 경력이 쌓이고 나이가 들어도 유연한 사고로 후배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릴 수 있는 선배가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0. 2013년 ‘미나문방구’ 이후로 영화 출연작이 없다. 영화 출연 계획은 없나?
봉태규: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 오랜 만에 하게 될 수도 있는 작품이라 욕심 부리지 않고 신인의 자세로 임하려고 한다. 가식적인 얘기가 아니라 정말이다. 무리하지 않고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아주 늦지 않게 영화를 다시 할 것 같다.

김지원 기자 bella@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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