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이은호 기자]
지난 5월 29일 신곡 ‘서울느와르’를 발표한 가수 장재인. / 사진제공=미스틱엔터테인먼트
지난 5월 29일 신곡 ‘서울느와르’를 발표한 가수 장재인. / 사진제공=미스틱엔터테인먼트
가수 장재인은 기쁨을 드러내는 데에 망설임이 없다. 노래에 대한 칭찬을 들었을 땐 더더욱 그렇다. 신곡 ‘서울느와르’ 발매를 앞두고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리에 앉은 그에게 노래가 좋다고 말을 건네자 얼굴 가득 들뜬 미소가 피어났다. 홍보팀 직원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건 비밀”이라면서 전날 가이드 녹음을 마쳤다는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다. “장마철에 내면 딱인데…. ‘서울느와르’가 잘 돼야 빨리 낼 수 있어요. 헤헤.” 장재인은 신이 나서 이렇게 말했다.

2010년 Mnet ‘슈퍼스타K2’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땐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다. 작은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고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자작곡 ‘그 곳’을 부르던 그는 얼핏 봐도 주변인 같았다. 그 때의 장재인에게선 외로움과 고집이 동시에 보였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서울살이의 고단함이 만든 흔적 같은 게 아니었을까.

장재인은 통기타 음악이 사랑받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었다. / 사진제공=미스틱엔터테인먼트
장재인은 통기타 음악이 사랑받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었다. / 사진제공=미스틱엔터테인먼트
통기타 든 광주 소녀, 상경하다

장재인의 고향은 광주다. 17세에 고등학교를 자퇴한 그는 이듬해 홀로 상경했다. “원래는 일본에 가려고 했어요. 부모님껜 유학을 가겠다고 했지만 실은 일본에서 음악을 하려고 했죠.” 부모님은 그의 일본행을 반대했다. 대신 서울 유학은 허락했다. 상경한 장재인은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내고 스무 살에 호원대 실용음악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7월 출전한 ‘슈퍼스타K2’는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놨다. 언젠가는 통기타 음악이 사랑 받는 날이 올 거라고 믿었던 스무 살의 장재인은 스스로 통기타 음악의 부흥을 이끌어 냈다.

“가수 오디션은 광주에서부터 많이 봤어요. 다들 ‘통기타는 안 된다’고 하더군요. 어떤 소속사에서는 걸그룹을 제안하기도 했죠. 그 때마다 저는 ‘죄송한데 전 안 될 거 같아요’하고 돌아왔어요. 그런 날은 혼자 울었어요. ‘이 음악은 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하지만 저는 믿었어요. 언젠간 통기타 음악이 사랑 받을 것이라고요.”

장재인의 믿음은 그의 경험에 근거했다. 외로울 때마다 그는 통기타에 기댔다. 호기심 많던 초등학생 시절, 장재인은 궁금한 것이 많다는 이유로 자주 꾸중을 듣곤 했다. ‘질문 좀 그만해라’거나 ‘왜 그렇게 나서니?’라고 야단하는 사람은 있어도 있는 그대로의 장재인을 받아들여주는 사람은 없었다. “제가 왜 혼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이제 와 생각하니 다행스러워요. 그렇지 않으면 저도 다른 사람의 개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됐을 테니까요.”

하지만 음악 안에서 그는 이방인이 아니었다. 남자들 사이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캐나다의 여성 로커 에이브릴 라빈의 ‘컴플리케이티드(Complicated)’ 뮤직비디오나 “매일 어떤 혁명이 일어나길 기도한다”는 미국 밴드 포 논 블론즈의 ‘왓츠 업(What’s up)’은 장재인의 쓸쓸함을 어루만져 줬다. 그는 “이런 음악을 하면 나도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2017년의 어느 날 장재인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쓰도록 만들었다. “왜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괜찮다고 하던 이가 없었을까? 나는 그게 무척 궁금해진 어느 날에 내 자신이 그냥 그 말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가수 이문세(위)는 “장재인을 보자마자 한국의 재니스 조플린 같은 여가수가 나타났구나 싶었다”고 했다. / 사진=Mnet ‘슈퍼스타K2’ 방송화면
가수 이문세(위)는 “장재인을 보자마자 한국의 재니스 조플린 같은 여가수가 나타났구나 싶었다”고 했다. / 사진=Mnet ‘슈퍼스타K2’ 방송화면
재인이는 목적이 분명했던 친구 같아

가수 이문세는 특별 심사위원으로 출연한 ‘슈퍼스타K2’에서 장재인을 처음 보고 미국 최초의 여성 로커이자 최초의 백인 블루스 가수 재니스 조플린을 떠올렸다. 그는 윤종신에게 “재인이는 왠지 목적이 분명했던 친구 같아 (중략) 보호색 없이 자기를 완전히 드러내놓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표현했던 친구였다 생각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장재인은 이문세의 글을 읽은 밤 많이 울었다고 한다.

장재인과 이문세의 인연은 특별하다. 장재인이 ‘슈퍼스타K2’에서 불렀던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은 당시 큰 인기를 얻었다. 처음 장재인에게 주어진 노래는 ‘빗속에서’였지만 연습을 지켜본 이문세가 선곡을 바꿨다. 신의 한수였다. 심사위원이었던 윤종신은 “장재인 양을 누가 잡죠?”라는 평가를 남겼고 이 노래는 나중에 음원으로도 출시돼 음원 차트 상위권에 올랐다. 하지만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 남긴 ‘진짜’ 성과는 다른 곳에 있다.

“생방송이 시작되기 며칠 전 외할아버지 부고를 전해 들었어요. 김용범 CP님에게 다른 무대 연출 없이 앉아서 노래하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받아들여주셨어요. 무대 화면도 바닥 쪽으로 넣어주시면서 편하게 노래하라고 해주셨어요. 그 때 전 활동 한 번 안 해본 그냥 평범한 아이였는데 많은 배려를 받았죠.”

장재인은 자신의 아버지를 잃은 엄마와 이모들을 생각하며 노래했다. 엄마와 이모들의 아빠는 지금 분명 날고 계실 거라고, 잘 가고 있고 또 잘 지내실 거라고. 그런 마음에 집중하며 노래를 이어갔다. 장재인은 “생방송 때 받은 점수는 높지 않았는데, 방송이 끝난 뒤 그 무대가 가장 많이 사랑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찡했다. ‘결국엔 마음이 다 통하는구나. 역시 진심이 짱이야’ 생각했다”고 했다. 노래를 통한 교감은 그로 하여금 더욱 감동 있게 노래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들었다.

장재인은 무용가 피나 바우쉬를 좋아한다. / 사진제공=미스틱엔터테인먼트
장재인은 무용가 피나 바우쉬를 좋아한다. / 사진제공=미스틱엔터테인먼트
고슴도치 같던 시간 지나난 천사들과 일하고 있어요

‘슈퍼스타K2’가 끝난 뒤 장재인은 달라졌다. 꿈에 그리던 음악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게 됐지만 사람들에게서 얻는 상처도 컸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것은 예사였다. 그를 앞에 두고도 그에 대해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장재인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씩씩했다. “지금 무슨 얘기 하시는 거예요?”라며 알은 체를 했다. 다만 상처는 속으로 곪았다. 장재인은 “누가 나를 상처 입힐까봐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웠던 시기”라고 털어놨다.

장재인은 당시의 경험을 지난 5월 29일 발표한 신곡 ‘서울느와르’의 가사에 녹였다. 누군가의 말이 자신을 쏴 상처 입히거나 가시를 세워 타인을 상처 입혔던 경험들이다. 장재인은 지난해 5월 이 곡의 가사를 썼다. “너무 힘들어서 썼는데, 쓰면서 치유가 됐어요.” 그는 ‘서울느와르’를 내기 전 SNS로 이렇게 고백했다. “울타리로 벗어나 사회로 향할 때 총에 쏘이며 상처받고 때론 나를 지키기 위해 내가 총을 쏴야 하는. 모두가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같은 성장통을 겪고 있을 거예요.” 가사는 알쏭달쏭하지만 장재인은 자신이 느낀 건 다른 사람들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도 지금은 원래의 저로 많이 돌아왔어요.” 장재인 웃으며 말했다. 2016년 11월 몹시도 외로웠던 날에, 그는 기댈 수 있을 만한 누군가를 찾아 헤맸지만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장재인은 그 때 “온전히 내 두 발로 서야겠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 날은 많이 울었지만 마음을 고쳐먹자 심지는 단단해졌다. 요즘 그는 더없이 긍정적이다. 실패한 일에 낙담하기보다는 성취를 자찬한다. 가령 ‘서울느와르’의 발매 시기가 예상보다 늦어졌다고 해서 ‘내 뜻대로 못 했어’라고 풀죽지 않는다. 어찌됐든 노래가 나왔으니 ‘좋아.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가고 있군!’ 하며 각오를 다지는 것이다.

“저를 행복하게 만드는 건 참 쉬워요. 제 장난을 받아주거나 바나나 몇 개를 던져주면 되죠. 매니저 동생은 잘 알고 있을 거예요. 헤헤헤. 최근에는 마음이 진짜 편해졌어요. 날을 세울수록 제가 상처받는다는 걸 안 거죠. 무용가 피나 바우쉬를 기린 다큐멘터리 영화 ‘피나(Pina)’를 보면 바우쉬가 단원들에게 항상 ‘난 천사들이랑 일해’ ‘너흰 천사야’라고 말해주거든요. 굉장히 감동적이었어요. 저도 주변 사람들을 천사처럼 대하고 스스로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고 마음먹었고요.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 아름답고 예쁘거든요.”

내년에 자작곡으로 채운 정규 음반을 내고 싶다는 장재인. / 사진제공=미스틱엔터테인먼트
내년에 자작곡으로 채운 정규 음반을 내고 싶다는 장재인. / 사진제공=미스틱엔터테인먼트
중심을 잃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장재인은 음악만큼이나 ‘서울느와르’의 뮤직비디오를 좋아한다. 흑백으로 연출된 장면들은 총알처럼 쏜살같이 지나가기도 하고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가기도 한다. 장재인은 “내가 원하는 톤으로 영상이 만들어졌다”며 기뻐했다. 아직 뮤직비디오를 보지 못했다고 하자 꼭 봐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건물을 지을 때 가장 밑에 단단하게 토대를 깔잖아요. ‘서울느와르’가 그런 토대 같은 노래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 위에 쌓아갈 것들은 지금 잘 준비돼 있으니까, 지금은 ‘서울느와르’가 자리를 잘 잡히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성적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겠죠?… 그리고 좋은 성적이 나올 날도요. 헤헤헤.”

장재인의 휴대전화에는 그의 자작곡이 가득하다. 인터뷰 때마다 장재인은 들뜬 목소리로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곤 했다. 지난 1월 싱글 ‘버튼’ 발매 당시 그를 만났을 땐 “얘네(휴대전화에 저장한 자작곡)들이 나를 똑바로 서게 만든다”고 했다. 보호색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은 지금도 변함없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꿈과 일을 구분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땐 내 음악을 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가수가 직업이 되니까 현실과 꿈을 어떻게 구분해야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노래와 제가 하고 싶은 노래를 확실하게 구분시켰거든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나를, 내 음악을 잊어버릴까봐 무서웠기 때문에요. 그런데 이젠 두 가지를 잘 섞어놨어요. 제가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도 저를 잃어버리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이젠 중심을 잃지 않을 자신이, 잘 해낼 자신이 있어요.”

이은호 기자 wild37@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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