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박미영 시나리오 작가]
영화 ‘레이디 버드’
영화 ‘레이디 버드’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퍼슨. 주인공의 이름이다. 크리스틴 맥퍼슨은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고, 레이디버드는 스스로 지은 예명이다. 남다른 소녀의 이야기는 시작부터 솔깃하다. 티모시 샬라메나 루카스 헤지스 같은 꽃배우들이 주인공을 맡은 시얼샤 로넌의 상대 역으로 출연하지만 청춘 영화가 아니라 제대로 꾸려서 만든 성장 영화다.

‘레이디 버드’의 가장 큰 무게중심은 모녀와 새크라멘토다.

세상의 많은 딸들이 그러하듯 크리스틴의 골난 목소리는 엄마를 향할 때 옥타브가 높아진다. 세상의 많은 엄마들이 그러하듯 크리스틴의 엄마도 늘 걱정인 자식을 향할 때 잔소리가 쏟아진다. 크리스틴은 자신을 사랑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은 엄마와 번번이 갈등을 빚는다. 서슴없는 말투까지도 닮은 그녀들의 사랑법은 때때로 경로를 이탈하지만 결국 마주하게 된다. 지독하게, 뜨겁게 서로를 최고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틴에게 새크라멘토 탈출은 인생의 중요한 목적처럼 보인다. 태어나서 쭉 자랐고, 긴 시간을 함께한 가족과 모든 것을 공유하는 절친 루시와 남자친구 대니와 카일이 있지만 크리스틴의 마음을 붙잡기에는 역부족이다.

필자의 새크라멘토는 창신동이었다. 태어나서 여섯 살 무렵까지 살았다. 그 때 소년, 소녀 각각 한 명씩 소꿉친구가 있었다. 소녀인 우리보다 더 미모를 자랑했던 꽃미모의 소년은 천호동과 잠실, 면목동을 거치며 성장하는 내내 필자의 은근한 자랑이었다. 사진 한 장 없어서 온전한 기억이 아닌데도 말이다. 집안 형편이 기울면서 12살 창신동으로 다시 돌아왔다. 전학을 온 날, 반장으로 짐작되는 소년이 성큼 다가왔다. 소꿉친구였던 소녀의 이름을 대며 아느냐고 물었다. 반장은 바로 그 꽃미모 소년이었다.

근사하게 자란 소년을 다시 마주했음에도 이사를 온 첫날부터 머릿속을 꽉 채운 생각은 오로지 하나였다. 창신동 탈출. 낙산 서민아파트에서 살면 평생 가난이라는 딱지를 얹은 채로 살 것만 같았다. 덜 근사한 어른으로 성장할 것만 같았다. 스무 살이 되어서 떠나기 전까지, 필자의 소녀시대는 창신동이라는 바탕색에서 그려졌다. ‘레이디 버드’에 필적할 수는 없지만 예명도 하나 지어서 절친과 그 이름으로 편지도 주고받았다.

크리스틴은 금방 들킬 거짓말을 해도, 거침없는 발언으로 정학을 받아도 전혀 밉지가 않다. 심지어 사랑스럽다. 말도 행동도 진짜 어른인 학교의 교장 사라 수녀님은 크리스틴의 진심을 읽어 준다. 그녀의 글에서 새크라멘토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사실 새크라멘토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크리스틴이 유일하다. 그녀의 지긋한 시선은 새크라멘토에 내려앉았다.

필자가 대학에 갓 들어가서 자기소개서 비슷한 글을 제출해야 할 때가 있었다. 시인이었던 교수는 너의 창신동이 글을 쓸 수 있는 근간이 될 것이라고 코멘트를 달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글을 쓰는 일을 하면서 창신동은 언제나 든든한 뿌리가 되었다.

세상의 중심에도, 세상의 밑바닥에도 있는 것 같은 창신동에서 10대를 보낸 동네 아이는 지금도 이따금 꿈속에서 후미지고 비좁은 창신동의 골목길을 달리고 있다. 새크라멘토의 동네 아이 크리스틴도 비슷한 꿈을 꾸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그리워진 각자의 동네에서 말이다.

박미영 시나리오 작가 press@tenasia.co.kr

[작가 박미영은 영화 ‘하루’ ‘빙우’ ‘허브’의 시나리오,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의 극본,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의 동화를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입문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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