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영화 ‘메이즈 러너 ‘ 포스터/사진제공=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 ‘메이즈 러너 ‘ 포스터/사진제공=이십세기폭스코리아
때때로 관객들은 시리즈 영화에 대한 막연한 거리감을 갖는다. 심지어 주저함의 끝에서 마침내 감상을 포기하는 편을 택하기도 한다. 아마 어떤 ‘믿음’ 때문일 테다. 기획된 연속물의 남은 부분 모두를 빠짐없이 관람하지 않을 바에야, 어차피 영화적 가치와 의미를 온전히 발견해내진 못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기획물로 구성된 낱낱의 텍스트는 그저 하나의 부속품이 아니다. 설령 지금 여기 눈앞에서 상영되고 있다 할지라도, 그건 이미 축적된 시간의 무게를 내포하고 있다. 마치 잘려진 나무의 단면이 독특한 결과 무늬를 통해 제가 살아온 체험의 여로를 드러내듯, 시리즈 영화 역시 지난 과거의 흔적들이며 걸어온 구체적인 발자취를 담지하고 있단 뜻이다. 퇴적된 텍스트의 혼을 머금고 있다고 할까.

특히 ‘메이즈 러너: 데스큐어’는 대미를 장식하는 3부작의 종착점으로, 영화가 밟아온 궤적을 고스란히 자기 안에 집약해내고 있다. 그러니 전작들을 보지 못했다고 그리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의 지점일 게다. 간단히 일러두자면 본 영화가 인간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물음, 곧 사적이면서 공적이기도 한 윤리라든지, 서로 간 갈등하며 부대끼는 개인들의 이질적인 욕망에 대해 뭔가 말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허나 소위 ‘인간학적’ 지점이라는 게 쉬이 논하기 간단치 않을 만큼 복잡하단 사실이 문제다. 어쩌면 그렇기에 영화라는 예술의 힘을 빌려 다가서는 것 외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고 말해볼 수도 있을 테다. 문자만으론 어려우니까.

이 영화의 입체적 감상을 가로막는 가장 손쉬운 길은 ‘소박한 이분법’ 구도에 빠져드는 것이다. 가령 영화의 흐름과 전개를 끌어가는 두 축인 러너와 위키드 양측에 각각 선과 악의 위치를 배정해 두는 것, 그럼으로써 영화의 전반적 구성을 ‘악한의 어두운 마수를 극복하고 벗어나 마침내 이상향에 가 닿으려는 선한 열정들의 탈출극’으로 정돈해버리려는 시도 말이다.

부분에 천착해서 영화를 단순화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실제 여러 요소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히 얽혀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급한 결론은 미뤄두고서 텍스트와의 만남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게 어떨까? 영화의 진리는 생생한 체험의 언어로 말을 걸어옴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영화 ‘메이즈 러너’ 스틸컷/사진제공=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 ‘메이즈 러너’ 스틸컷/사진제공=이십세기폭스코리아
재해 극복을 위한 범국가 연합조직인 위키드는 러너들을 동등한 인격체라기보다는 단순한 실험의 도구로 취급한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세계의 4분의 3을 절망의 나락으로 몰아넣은 바이러스를 퇴치할 백신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대의에 있다.

러너들의 몸은 바이스러에 대한 면역을 가진다. 실험체들의 혈액에서 뽑아낸 물질이 병의 진행을 늦춘다는 점이 확인되었으므로 계속해서 연구를 진행하다보면 마침내 완전한 해답에 닿을 수 있으리란 게 그들의 판단이다.

소수를 희생하더라도 다수를 구해내겠다는 논리를 내세운 셈이다. 나아가 위키드는 물밀듯 몰아치는 감염의 확산을 막고자 튼실한 가름막을 세우고, 외부로부터 격리된 도시를 구축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한다. 단순히 그들의 전략을 소수에 대한 억압이라거나, 반대로 과반수의 인류를 외면하는 문제적 행위라며 진단하고 또 비판할 수 있는 걸까?

러너들은 이름과 기억을 박탈당함으로써 인간에게 허락된 고유성과 개별성을 상실한다. 대신 수량화 가능한 코드번호가 부여된다. 한갓 공산품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된 형국이다. 허나 그들이 역사를 뭉개놓은 질병으로부터의 자유를 허락받은 모종의 특권층이란 사실만은 부인할 수가 없다. 설령 바이러스가 세계의 남은 부분까지 온전히 정복한다 한들, 자신들에게만은 전혀 문제될 게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참혹한 실험을 피해 끝내 도망 다니길 택한 러너들의 행동이 과연 정당성을 ‘온전히’ 부여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존엄을 파괴하는 비윤리적 실험에 맞서 인간의 인간다움을 수호하려 했다는 의지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상찬 받아 마땅한 일인가?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상황을 더 깊은 혼돈으로 떠미는 측면들마저 존재한다. 위키드 내부에서 발생한 이상 기류도 물론 눈여겨 볼만할 테다. 하지만 특별히 러너들에게 드리워진 부정(negative)의 혐의가 더는 부정(negation)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해진다는 사실이야말로 오감을 강렬히 잡아 비트는 요소다.

영화의 말미에 가 닿을수록 충격을 (언어로만 온전히 해설할 수 없는 이 충격의 경험을 오롯이 독자의 영화적 체험에 맡긴다) 거두기란 어렵다. 이로써 어딜 향해 얼마 만큼 비판의 날을 세워야 할지 좀체 분간할 수 없는 모호함 속으로 침전케 된다.

영화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이런 방식으론 결코 분명한 해답을 찾아내기 어렵다. 누구도 선하거나 악하다 단정할 수 없고, 애당초 선악의 개념 자체가 잘 벼린 칼로 내리긋듯 나뉠 수 없다는 주장으로부터 어떤 ‘세련된 인간학적 명제’를 이끌어내는 건 가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경우에 따라선 이런 모순과 불가능성만이 진실의 그릇이 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쓰고 있는 온정주의의 가면을 벗겨낼 때 나타날 인간들의 욕망이란 건, 분명 가늠도 통제도 할 수 없이 이리저리 구불대며 서로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을 사회학 교과서가 말해 줄 순 없다. 이성과 합리를 주장하는 모든 껍질들이 완전히 탈각된 상태가 아니라면, 은밀히 꿈틀대는 욕망이 여과장치들을 단번에 돌파하고 의식에 드러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전쟁을 일으킬 순 없지 않은가? 예술로서의 영화가 인간에 대한 깊은 인식을 대신 말해 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순한 SF영화라기엔 좀 기묘한 메이즈 러너가 우리에게 안겨다주는 미덕이기도 하다.

* 영화는 소설과 많은 부분 차이를 보인다. 이 글은 영화를 오리지널로 간주하고 작성됐다.

남유랑(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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