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하진 기자]

뮤지컬 ‘레베카’로 돌아온 배우 신영숙 / 사진제공=㈜EA&C
뮤지컬 ‘레베카’로 돌아온 배우 신영숙 / 사진제공=㈜EA&C
‘지금 어디 있든 멈출 수 없는 심장 소리 들려와. 바람이 부르는 그 노래. 레베카, 나의 레베카.’

뮤지컬 ‘레베카'(로버트 요한슨)를 보고 나오면 귓가에 맴도는 노랫말이다. 또 하나, 이 노래를 부르는 댄버스 부인의 음침한 기운이 또렷하게 남는다. 지난 10일 개막한 ‘레베카’는 올해 4주년을 맞았다. 그 중심에 초연부터 자리를 지킨 댄버스 부인, 신영숙이 있다. 19년 차 뮤지컬 배우인 그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다. 이는 ‘레베카’ 속 댄버스 부인일 때 더 빛난다. 댄버스 부인의 검은 그림자는 총 1700석의 대극장을 숨죽이게 만든 다음, 뜨거운 박수를 이끌어낸다. 신영숙은 과연 독보적이다.

10. 네 번 연속 ‘레베카’에 출연하는데 망설임은 없었나요?
신영숙 : 이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모든 게 조화롭기가 어렵거든요. 수작인 데다 관객들이 뜨겁게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제가 맡은 역할도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잖아요. 이런 기회가 계속 찾아온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마다할 이유가 없죠.

10. 이번엔 어떤 부분이 다른가요?
신영숙 : 앞서 세 차례의 레베카를 연기하며 다양한 시도를 했어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봤죠. 이번엔 기본을 지켜 본질을 흐리지 않으면서 감정을 살렸습니다. 그래서인지 레베카를 떠올리면 뭉클하고 먹먹한 느낌이 더 들어요.

10. 흐른 시간 만큼 레베카를 향한 그리움이 더 커졌는지 지난 시즌보다 한층 강렬해요.
신영숙 : 배우로서 연기하는 인물처럼 보이고, 그 인물 자체가 된 것 같은 모습을 꿈꾸는 것 같아요. 댄버스 부인의 느낌이 들게끔 공연 내내 그로 살아있는 거죠. 무대에서 내려오더라도 공연이 흐르는 그 시간엔 계속 댄버스로 살아요. 감정의 흐름이 변했다는 걸 관객도 느낄 수 있도록 순간순간 살아있는 호흡으로 연기를 하려고 합니다. 기술적인 건 그간 내내 해왔기 때문에 이번엔 감정에 초점을 맞춰 접근했습니다.

10. 프레스콜 때 댄버스를 설명하며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신영숙 : 심장이 먹먹하니까요. 세상 속 슬픈 일들, 소중한 이들이 떠나는 감정…그런 걸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잖아요. 댄버스는 자신의 전부인 레베카를 잃었어요. 악인이라고 해서 계속 밀어붙이기만 한다면 관객들을 끝까지 설득하지 못할 거예요. 감정을 조절하며 ‘소중한 사람이 왜 그렇게 됐을까’ 고뇌하고 아파하는 그의 모습을 보여주면 살아 숨쉬게 되는 거죠.

10. 극의 분위기를 확 바꾸고, 댄버스의 처지도 알려주는 첫 넘버 ‘영원한 생명’은 그래서 더 중요한 곡인 것 같아요.
신영숙 : 작품엔 기승전결이 있어야 설득이 되는데, 그 시작을 알리는 곡이에요. 연출은 여기서 사람들이 눈물 날 정도로 레베카에 대한 사랑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댄버스가 레베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설명돼야 해요. 인간이다 보니까 그때그때 또 다른 슬픈 감정들도 올라와요. 일련의 일들과 슬픔이 겹쳐서 어느 날은 첫 소절부터 울컥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우느라 노래를 망쳐버리면 안되니까 그런 감정 조절도 중요하죠.

10. 극중 막심이 넷, 나(I)가 셋입니다. 워낙 캐스트들이 많은데 어떤가요?
신영숙 : 예전엔 상대 배우들과 호흡이 딱 맞아야 무대에서 불안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만 알 수 있는 느낌이 있어요. 매 순간 서로를 향한 촉이 살아있는 거죠. 더 집중하게 되고, 그야말로 살아있는 반응이 나와요. 댄버스가 본능적으로 하는 행동도 나오고, 그게 또 다른 묘미죠. 너무 완벽하게 맞추는 것보다 그 무대에서 발생하는 것, 거기에서 나오는 것들이 재미있습니다.

10. 아무래도 그런 변화들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서 더 크게 와닿겠어요.
신영숙 : 계획된 연기를 하는 것만이 꼭 좋은 연기가 아니라는 걸 몸소 경험한 겁니다. 예전에 연출들이 “눈을 떠”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확실히 알게 됐죠. 상대 배우를 바라보고 있지만 머릿속은 다음에 내가 해야 될 것들을 생각하느라 마음이 담기지 않는 거죠. 그건 경험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이번 ‘레베카’는 마음을 많이 열어놓고 초연 때보다 더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어요.

10.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얻는 것도 있겠죠?
신영숙 : 정말 많은 게 보여요. 학생들은 그 어느 베테랑 배우보다 계산되지 않은 연기를 해요. 생각해 보면 제가 그 나이에도 그랬고요. 때론 그때로 돌아가고 싶기도 합니다. 겁낼 것 없이 마구 했던 그때로 말이죠. 그런데 초심으로 돌아가는게 게 쉽지 않잖아요? 그때만 가질 수 있는 열정은 지금 갖게된 여유와는 또 다른 거죠. 이번 시즌의 ‘레베카’는 처음부터 끝까지 댄버스의 심경 변화가 관객들에게 느껴질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게 목표였어요. 평상시에 만나면 피해다닐 것 같지만 그 사람이 왜 이렇게 됐는지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보는 이들도 공감할 수 있게 만들고 싶었죠. 그러려면 댄버스의 외로움을 알고 고독과 상실, 날카로운 예민함을 습득해야 하죠.

10. 작품 속 캐릭터를 이해하면 일상에서도 주위 사람들을 잘 이해하겠어요.
신영숙 : 맞습니다. 포용력이 많이 생겨요. 배우가 작품 속 인물의 심리를 이해하는 것도 어찌 보면 같은 맥락이죠. 어떤 사람의 눈빛이나 표정을 보면 지금 어떤 상태이고 고민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때도 있어요. 그건 꼭 배우라서가 아니라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보이는 걸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을 관찰하는 건 습관이 됐으니까요.

뮤지컬 ‘레베카’에서 댄버스 역을 맡은 배우 신영숙 /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뮤지컬 ‘레베카’에서 댄버스 역을 맡은 배우 신영숙 /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10. ‘레베카’ 뿐만 아니라 그간 재연, 삼연을 거듭하는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는데,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어떻게 경계하나요?
신영숙 : 센 역할을 많이 해서 제가 강심장에다 무대에서 떨지도 않는 줄 알아요. 나(I) 역할의 배우들을 연습실에서 만나면 “언니도 떨어요?”라고 묻죠.(웃음) 긴장하는 줄 몰랐다면서요. 사실은 경계를 덜 했으면 싶을 정도로 안달복달하는 스타일이에요. 무대 위에서는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지만 오르기 직전까지 스스로를 볶아치죠. 저조차도 심하다고 느껴질 정도예요. 덕분에 매너리즘에는 빠지지 않지만 조금은 내려놓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안달복달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이유이지만 여유도 필요하니까요.

10. 1부를 끝낸 뒤 15분간의 휴식시간에도 좀처럼 쉬지 못하겠군요.
신영숙 : 첫 등장 이후에도 15분 정도 있다가 나오니까 그 사이에도 감정 조절과 리마인드(remind )를 해요. 과거엔 우울한 역할이면 그걸 표현하는 게 힘들었어요. 작품과 현실을 넘나들며 담기엔 부족했죠. 스스로 가라앉는다고 해서 되지도 않는데 말이에요. 그땐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우울한 역할이면 실제로도 우울하려고요. 그런데 성격에 맞지도 않고(웃음) 무대 위에서 공연할 때 확 몰입하고, 빠져나온 다음 일상을 사는게 좋아요. 무대에서 다 해소하는 거죠. 그래서 공연이 없는 날엔 취미도 즐겨요.

10. 작품을 끝낸 뒤 여행도 가나요?
신영숙 : 공연 끝나면 잠이 안 와서 예전 여행 사진을 찾아봐요. 괜히 SNS 사진을 바꾸고요. 여행이나 쉬는 시간이 없으면 지쳐요. 무대 위에서 에너지를 뽑아내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대극장을 휘어잡아야 하는데 그럴 힘이 없으면 잘 안 되거든요. 그간 쉬지 않고 작품을 하다 보니 지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 달력을 뚫어지게 봐요. 하루라도 쉬는 날을 찾아내려고요.(웃음)

10. 하면 할수록 관객에 대한 고마움은 더 커지겠습니다.
신영숙 : 자주 뮤지컬을 보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한 번씩 기분전환으로 오는 관객도 있잖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매회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죠. 그들의 소중한 시간이잖아요. 최근 감사하게도 완성도 높은 작품에 잇달아 출연해 배우로서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관객들에게 더 큰 에너지를 받습니다. ‘관객들과 깊이 교감하고 돌아갈 때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다짐해요.

10. 첫 공연 전에 꼭 하는 것이 있습니까?
신영숙 : ‘레베카’는 공연 시작 5분 전 발코니에 올라가 기도를 해요. 관객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무대에 서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느끼고 배우로 살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요. 댄버스로 완벽하게 호흡할 수 있게 해달라고 공연 전에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합니다. 종교적인 기도가 아니라 그런 마음으로 공연에 몰입을 하는 거죠.

신영숙 /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신영숙 /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10. 공연이 끝난 뒤 공허함은 어떻게 이겨내나요?
신영숙 : 어느 정도의 공허함은 여전히 있어요. 여행 사진을 보는 것도 바로 잠들지 못해서죠. 그러면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해요. 사실 가장 좋은 건 관객들의 환호예요. 거기서 가장 큰 위로를 받죠.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무너졌을 겁니다. 배우로서 평정을 찾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회복제 같은 거죠.

10. 그 위로와 짜릿함이 뮤지컬을 계속하는 이유겠죠.
신영숙 : 관객들이 큰 사랑을 주면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되는 것 같아요. ‘레베카’ 뿐만 아니라 ‘명성황후’ 때도 그랬고, 대극장을 가득 채워주는 관객들에게 늘 감사해요.

10. 탐나는 작품이나 배역이 있을까요?
신영숙 : 미래의 그림을 그린 건 없어요. 예전엔 ‘저 역할 꼭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죠. 물론 지금까지 좋은 작품을 많이 만나서 그런 걸 수도 있고요. 배우와 작품도 인연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소중한 연이 닿는 것처럼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죠.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란 걸 안 순간부터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충실하게 가다 보면 잘 맞는 작품과 배역이 오더라고요.

10. 영역의 폭을 넓혀 새로운 장르에 도전할 생각도 있습니까?
신영숙 : 해보고 싶어요.(웃음) 배우로 살면서 종종 갈증을 느낄 때가 있어요. 가수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에 담아 부를 수 있잖아요. 그런데 배우는 매번 내가 아닌 다른 인물을 연기해요. 신영숙이 살면서 느끼는 것들을 어떤 결과물로 만들고 싶어요. 책이나 음원의 형태로 말이죠. 아직 구체화된 건 없어요. 막연하고 원대하죠. 어느 정도 내 안에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은 미미하니까요. 그렇게 사람 신영숙을 채우고 싶은 마음입니다. 여전히 철이 없는데 ‘어느덧 책임질 나이가 됐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덜컥 겁이 나요. ‘레베카’에서 댄버스가 그런 말을 하죠. “레베카가 유일하게 두려워한 건 늙어가는 것”이라고요. 다른 게 아니라 도전을 두려워하게 되는 게 참 무서워요. 겁도 많이 생기고, 뭘 할 때마다 망설여지죠. 그럴 때 ‘깨지면 어때, 실패하면 어때. 누군가에겐 본보기가 될 수도 있는 거야’라고 스스로 다독이기도 합니다. 무턱대고 나설 건 아니고 의미 있는 도전이라면 용기 내서 해보고 싶습니다.

10. 다양한 작품을 오가며 무대에 오르려면 자기관리도 필수죠?
신영숙 : 사실 연습은 이제 습관이 됐어요. 지금도 공연 시작 전에 혼자 무대 뒤에서 런스루(공연의 리허설)를 해요. 뮤지컬 ‘맘마미아’ 지방 공연과 ‘레베카’ 서울 공연이 겹쳤을 때부터 생긴 습관이에요. 분위기가 다른 작품인 만큼 저도 확 바뀌어야 하거든요. 어떤 애니메이션에서 본 건데, 전자 칩을 바꿔 끼우면서 다르게 변하는 캐릭터가 있어요. 그 캐릭터처럼 이동하는 차 안에서 댄버스 칩을 끼우는 거죠.(웃음) 그렇게 런스루를 하던 게 습관이 됐어요. 지금은 ‘레베카’만 하고 있는데도 그걸 합니다. 성대는 튼튼하게 타고났어요. 가끔 미안하긴 하죠, 너무 혹사시키니까.(웃음)

10. 관리법이 따로 있나요?
신영숙 : 목이 쉬는 건 소리를 지를 때 그래요. 특히 감정보다 소리가 과하게 들어갈 때 그렇죠. 그래서 평상시 화를 낼 때 오페라 가수처럼 노래하듯 해요. 늘 좋은 목 상태로 깨끗한 발성을 해야죠. 관객들에게 최상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요.

10. 끝으로 ‘레베카’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신영숙 : ‘레베카’는 보고 나서 후회가 없는, 만족도 높은 작품이에요.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죠. 여기에 신영숙을 보러 온다면 공연마다 살아있는 연기를 하겠습니다.

김하진 기자 hahahajin@ten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