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손예지 기자]
‘서프라이즈’ 김시스터즈 / 사진제공=MBC
‘서프라이즈’ 김시스터즈 / 사진제공=MBC
‘서프라이즈’ 원조 한류 걸그룹 김시스터즈의 탄생 비화가 밝혀졌다.

26일 방송된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는 ‘원조 한류 스타, 김시스터즈’ 편이 그려졌다.

국내 최초 미국에 진출해 이름을 알린 걸그룹 김시스터즈는 1953년 데뷔했다. 당시 멤버들의 나이 갓 10살을 넘겼을 때다.

이들은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과 작곡가 김해송 사이에서 태어난 김숙자, 김애자, 그리고 이난영의 오빠의 딸 이민자로 구성됐다. 이난영은 남편이 납북되고 홀로 아이를 키우던 중 오빠의 제안으로 두 딸과 조카로 걸그룹을 만들게 됐다.

미 8군 부대서 데뷔 신고식을 치른 이들은 인기를 이어갔고, 김시스터즈에 관심을 갖고 찾아온 미국 현지 제작자와 계약을 맺고 활동을 시작했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불가한 탓에 생활은 고됐다. 주방세제를 샴푸로 착각해 병원에 실려가기도 하고 김치가 먹고 싶어 황달에 걸리기도 했다고.

그러나 당시 미국인들이 신비로이 여겼던 동양인들이 팝송을 부르는 모습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이들의 노래 ‘찰리 브라운’은 한국 가수 최초로 빌보드 차트에 오르는가 하면 ‘에드 설리번 쇼’에 22번이나 출연하는 등 인기를 누렸다.

그 배경에는 이난영의 공이 있었다. 그는 딸들과 조카가 미국에서 가수로 살아남게 하기 위해 다양한 악기 연주를 익히게 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애썼다. 실제 10개 이상의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던 이들은 ‘에드 설리번 쇼’ 출연마다 다른 악기 연주를 선보였다. 뿐만 아니라 사생활 관리를 철저히 해야함을 설파, 김시스터즈는 데이트에도 세 사람이 함께 나갔음은 물론 멤버 김숙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데이트 제안도 거절했다는 후문.

1960년대 당시 이들은 주급으로 1만 5,000달러를 받고 50만 달러를 세금으로 낼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1963년에는 이난영과 김시스터즈가 함께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기도 했다.

1965년 이난영이 사망한 뒤, 이들은 남자 형제들을 영입해 6인조 혼성 그룹으로 활동, 1970년대 서울로 금의환향했다.

한편, 김애자는 1987년 암 투병 끝에 사망했고 이민자는 미국 라스베거스에서, 김숙자는 헝가리에서 남편과 현역 가수로 활동 중이다.

손예지 기자 yeji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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