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하진 기자]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원작자 제스로 컴튼(왼쪽), 한국 연출을 맡은 김태형 / 사진제공=사진제공=(주)아이엠컬처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원작자 제스로 컴튼(왼쪽), 한국 연출을 맡은 김태형 / 사진제공=사진제공=(주)아이엠컬처
지난 9일 대학로에는 ‘벙커 트릴로지’란 연극이 막을 올렸다. 이 작품은 지난해 국내 라이선스로 초연된 ‘카포네 트릴로지’에 이은 ‘트릴로지’ 시리즈 중 하나다. ‘카포네’가 미국 시카고 렉싱턴 호텔의 661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았다면, ‘벙커’는 이름 그대로 군의 진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조명한다. 전쟁의 참혹함, 그 속에서 우리가 느껴야할 것에 대한 이야기다. 영국 연출자 제스로 컴튼이 만들었으며, ‘모르가나’ ‘아가멤논’ ‘맥베스’ 등 각기 다른 세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다. 2013년, 2014년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전석 매진을 기록한 화제작이며, ‘2014 애들레이드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최고 연극상을 받기도 했다. 이 작품을 한국으로 가져와 공연화 시킨 김태형 연출도 ‘에딘버러 페스티벌’에서 ‘벙커 트릴로지’를 관람했다. 당시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한국 관객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국내 공연을 결심했다.

‘벙커 트릴로지’의 개막에 맞춰 제스로 컴튼이 내한했다. 같은 자리에서 영국 연출자인 제스로 컴튼, 그리고 국내 공연의 총책임자 김태형 연출과 이야기를 나눴다. 한 작품으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에겐 끈끈함이 느껴졌고, 서로를 이해하고 또 존경하는 공기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10. 한국에서 자신의 작품이 공연되고 있는 걸 본 소감은 어떤가. 묘한 기분이겠다.
제스로 컴튼 : 정말 새로운 느낌이다. 새로운 프로덕션에서 만든 것 같은, 다른 나라에서 다른 언어로 공연되니까 새롭다. 신기하기도 하다.(웃음)

10. ‘카포네 트릴로지’에 이어, 두 번째 시리즈 ‘벙커 트릴로지’를 공연에 올렸다.
김태형 : ‘카포네 트릴로지’를 하기 전부터 다른 시리즈도 모두 해야겠다고 처음부터 마음을 먹었다. 사실 첫 시작을 ‘벙커’로 하려고 했지만 ‘카포네’가 좀 더 대중적일 것 같아서 먼저 올렸던 거다. 마지막 시리즈 ‘더 프론티어 트릴로지’도 준비할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내년으로 예정하고 있다.

10. 사실 국내 관객들이 생소하다고 느낄 법한 소재와 방식의 연극이다. ‘카포네 트릴로지’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감을 얻어, 다음 걸음이 한결 편하겠다.
김태형 : 흥미를 느낄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잘 됐다. 재연 당시에도 90% 이상 티켓이 판매됐다. 물론 제작사 등 많은 스태프들이 노력을 했지만, 많은 관객들이 열광해주신 덕분에 이 시즌을 끌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도 재미있었고, 나 뿐만 아니라 배우들 역시 관객들에게 에너지를 받은 것 같다.

10. ‘트릴로지’ 시리즈의 어떤 부분이 한국 관객들에게도 통했다고 생각하나.
제스로 컴튼 : 굳이 한국 관객들에게만 어필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벙커’의 경우에는 전쟁이란 주제를 갖고 풀어내는데, 그런 부분에 한국 관객들이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10. 한국에서 공연을 관람하기도 했는데, 어떤 점이 원작과 같고 다른가.
제스로 컴튼 : 원작보다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조되고 명확해진 것 같다. 영국의 경우에는 속마음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대사 사이의 공백을 채워가며 찾아내는데, 한국 캐릭터는 직접적인 말을 통해 관객을 따라오게 하더라.

제스로 컴튼/ 사진제공=(주)아이엠컬처
제스로 컴튼/ 사진제공=(주)아이엠컬처

10. 매우 독특한 작품인데, 탄생 배경과 과정이 궁금하다.

제스로 컴튼 : 회사에 처음으로 소속됐을 때 이 작품을 생각했다. 현실적인 문제, 특히 재정적인 이유로 다른 공간을 빌려서 공연을 열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예산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디테일한 장소를 공연장으로 옮겨 만들기로 결심했고 좁은 공간을 생각해냈다.

10. ‘카포네 트릴로지’를 올리고 노하우가 쌓였을 것 같다. ‘벙커’는 어떻게 만들었나.
김태형 : ‘벙커’의 경우 ‘카포네’보다 더 밀폐되고 좁은 느낌을 주려고 애썼다. 국내 관객들에겐 낯선 소재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세트에 들어가면 압박을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시작을 하자고 마음을 먹고 준비했다. 무리하게 시도한 부분도 있다. 바닥의 흙이라든지, 사운드 적으로도 그렇고. 자칫 관객들이 불편함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욕심을 냈다. 앞선 ‘카포네’에서 나온 호텔방은 익숙한 공간이지만, 벙커는 한 번도 접한 적이 없는 장소이기 때문에 현실감을 주려고 애썼다.

‘카포네 트릴로지’를 하면서 자신이 생겼다. ‘이 정도도 관객들이 견딜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니까, 사운드와 공간 활용을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었다. 믿는 것도 있고, 욕심도 있어서 그전보다 새롭게 시도한 부분이 많다. ‘벙커’에 등장하는 세 가지 이야기 중에서도 ‘모르가나’는 가장 난해한 에피소드 중 하나다. 처음 텍스트로 접했을 때도 그랬다. 영국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모르가나를 하려니까 쉬운 방식으로 풀어내려고 애를 많이 썼다. 드라마를 강력하게 구성했고, 첨가한 부분도 있다. 처음 대본보다는 관객들이 좀 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가나는 모호하기도 하고, 쉽지 않은 이야기이다. 곳곳에 퍼즐을 풀 듯 힌트를 두려고 애를 썼는데, 그건 관객들의 몫이다.

10. 공연을 올리는 순간, 그 작품은 관객의 것이 되지만 그럼에도 놓치고 싶지 않은 메시지가 있나.
제스로 컴튼 : 세 가지 이야기를 서로 다르게 만들었는데, 다 느꼈으면 했던 건 전쟁을 경험하는 캐릭터, 죽음과 희망 그리고 용기를 내는 그런 상황들을 바라봤으면 했다. 남겨진 이들이 싸우러 가는 장면을 통해 말이다.

10. 한국 공연으로 재탄생시키며,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 있다면?
김태형 :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벌에서 처음 이 작품을 접하고, 제스로와 대담을 했다. 그가 말하길, 원작을 각색해서 프로덕션을 만드는 것이고 나라가 바뀌면 그 국가의 정서에 맞게 가는 것이 좋다고 하더라. 그래서 조금 더 힘을 내게 된 부분이 있다. ‘벙커’는 ‘카포네’보다 더 각색하고 재창작할 수 있는 문이 열려있는 작품이었다. 지이선 작가와 적극적으로 재창작을 했고, 추가하는 과정이 있었다. 아이디어를 내면서 기본적으로 전쟁의 끔찍한 참상을 전달하고자 했고, 다른 한편 무시무시한 시도에 대한 물음도 던진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 조금 주저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전쟁을 이용하려는 사람들과 그들에 의해 희생되는 사람들을 대비시키려고 노력했다.

10. 이번 기회를 발판 삼아,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것들이 생겼을 것 같다. 계획이 있나.
제스로 컴튼 : 당연히 그렇다. 한국 프로덕션의 손을 거쳐 새로운 해석과 작품이 나온 걸 보고 예술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연출에 있어서 다른 방식, 좋은 점을 배웠다. 4년 전 만들어진 작품이라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변형하거나, 수정하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공연되면서 부족한 부분을 객관적으로 새롭게 봐준 것이라 내게도 큰 도움이 됐다.

김태형 : 외국에서 공연을 보거나, 브로드웨이 작품을 그대로 따라 해도, 한계가 있다. ‘트릴로지’ 시리즈를 한국에서 해보기로 마음먹은 건, 우선 콘셉트가 신선했기 때문이다. 공연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관객들에게 흥미진진한 콘셉트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래서 결정했다. 당시 페스티벌에서 내가 ‘트릴로지’ 시리즈를 명쾌하면서 흥미로운 공연이라고 느낀 것처럼, 우리도 ‘누가 봐도 신선할만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이번 공연을 만들면서 스스로에게도 값진 경험이 됐다. 다른 식으로 해석되고 만들어질 한국 공연의 연출을 꼭 해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김태형 / 사진제공=사진제공=(주)아이엠컬처
김태형 / 사진제공=사진제공=(주)아이엠컬처

10. 끝으로, 연출가로서의 삶을 돌아본다면? 고충과 희열이 공존할 것 같은데.

김태형 : 연출을 시작한지 10년 차가 됐다. 작품에만 오롯이 집중하지 못한 시절도 있었고, 현실적인 여러 문제에 부딪히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해결안 된 부분도 있고 말이다. 그렇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고, 연출자로서 배우들과 또 프로덕션과의 신뢰가 쌓이면서 창작의 분야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열심히 해왔고, 인정해주는 사람도 있고 사랑도 받았다. 모든 건 프로덕션에서 받아들여주고, 이해해주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한 건, 예전보다 좀 더 나은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개선된다는 믿음과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겨내려고 한다. 무엇보다 공연이 올라가는 순간, 관객들의 호흡이나 반응, 그들의 평가들이 여전히 설레고 기대된다. 걱정과 스트레스는 그 기대감이 버텨내게 하는 것 같다. 또 오랫동안 팀워크를 맺으면서 일하는 것 자체가 즐거워서 그런 에너지로, 속아가면서 하고 있다.(웃음)

제스로 컴튼 : 프로듀서, 극작가, 연출을 모두 했다. 다양한 포지션에서 일을 하며 가장 힘든 건 재정적인 면이다. 내가 쓴 작품의 프로듀서를 할 때였는데, 오픈을 할 만큼의 돈이 모이지 않았다. 금요일이 공연 날이면, 월요일에 1만 파운드를 더 모아야 하는 거다. 재정적인 어려움이 가장 컸고, 위험했다. 그렇지만 그때 도전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위험 부담이 큰일들을 겪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실패할까 봐 두려워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낼 수가 없다는 걸 알았다.

김하진 기자 hahahaj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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