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하진 기자]
배우 남명렬이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서 한경텐아시아와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배우 남명렬이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서 한경텐아시아와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2시간이 어떻게 지나지는 모른다. 쉼 없이 몰아치는 세 배우의 열연이 휩쓴 자리의 여운은 굉장하다. 물리학을 다룸으로써 일상과는 생소한 말들이 쏟아지지만, 막이 내릴 즈음에는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연극 ‘코펜하겐’이 그렇고, 그 중심에는 배우 남명렬이 있다.

남명렬은 6년 만에 무대에 오른 ‘코펜하겐’을 다시 선택했다.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옷을 입고 완벽하게 제 역할을 해냈지만, 무대 밖 맨얼굴은 웃음 좋고 소탈한 ‘남명렬’ 그 자체이다. 연기자의 삶을 산 지도 어느덧 20년이 훌쩍 넘었다. 베테랑 중에서도 베테랑인데도 미묘하게 바뀌는 공기와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연기의 길을 찾았을 때의 반짝임을 사랑한다.

10. ‘코펜하겐’을 재연하게 됐습니다. 물리학을 다루는 만큼 쉽지 않은 작품이었에요.
남명렬 : 어려운 용어가 많이 나오고 개념들이 어렵기 때문에 배우, 제작진에게는 힘든 작품이죠. 그러나 되도록이면 관객들에게는 쉽고, 감동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10. 대사의 양이 어마어마해요.
남명렬 : 사실 두 번째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배우들보다는 수월했어요. 처음에 2주가 걸렸다면, 이번엔 집중해서 하니까 일주일 이내에 어느 정도 암기가 됐어요. 저도 처음에는 힘들게 외웠죠.(웃음) 제가 약간 흔들리는 모습이 상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또 반대 역시 그렇기 때문에 서로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주는 것이 중요해요.

10. ‘코펜하겐’을 처음 만났을 때는 어땠나요?
남명렬 : 생소한 용어와 개념이 많이 나오니까, 하겠다고 마음먹은 뒤에는 고생길이 훤했죠.(웃음)

10. 배우로서, 도전 혹은 나아간다는 느낌도 들었겠어요.
남명렬 : 시점을 왔다 갔다 하고, 다른 상황에 급히 들어가는 형식이 새로운 건 아니었어요. 그런 형식의 작품은 여럿 한 적도 있었고요. 극은 중요하지 않았고, 말한 것처럼 생소한 물리학 이론과 용어들이 난무하는데 그런 것들이 개념을 알지 못하고 연기를 하는 건 사실 가짜인거 잖아요. 가짜 연기를 하지 않기 위해서 개념들을 물리학도만큼은 아니더라도, 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스스로 개념을 알기 위해 노력을 했죠.

10. 그럼에도, 선택 한 이유가 있을까요?
남명렬 : ‘코펜하겐’은 어려운 용어와 개념을 소재로 할 뿐, 과연 인간이라는 것이 어떻게 사고하고 어떤 선택을 하고 맺어지느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에 대한 얘기들이 깊고 정확하게 기술된 희곡이라고 할까요. 이렇게 인간관계에 대해 깊이 다룬 작품은 흔치 않아요.

남명렬/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남명렬/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10. 연기한 닐스 보어는 어떤 인물인가요?
남명렬 : 주장하는 물리학은 상보성 원리인데, 보어는 인간을 하나의 측면이 아닌, 다양하게 생각한 사람이 아닐까 싶어요. 자기주장을 열심히 하다가도, 다른 생각을 말하는 이가 있으면 틀림을 인정해요. 하이젠베르그와 싸운 다음에도 바로 화해를 하잖아요. 자기 주장이 틀렸을 때 과감하게 인정하고 그전에는 불같이 싸우죠. 어려운 건데, 자기 오류를 인정할 수 있는 인품을 지닌 사람입니다.

10. 실제로는 어떠신가요? 보어와 비슷한 면이 있나요?
남명렬 : 때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웃음) 어떤 때는 쉽게 인정하고, 또 별거 아닌데 고집을 부리기도 하고요.

10. 배우이기에 연기적인 고집은 있을 것 같아요. 또, 그래야 할 것 같고요.
남명렬 : 이 작품뿐만 아니라 여타의 다른 많은 작품을 만들면서 상대 연기자, 연출과 수많은 토론을 해 인물을 구축합니다. 저의 생각을 많이 이야기하죠. 주장을 하면서도, 연출가와 다른 배우들에게 설득을 당하자는 마음을 갖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조율을 해서 공연을 올리는 거죠.

10.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수년을 하면서 얻고 깨달은 것이 아닐까요?
남명렬 : 한 가지 중요한 건, 연습을 하고 만드는 과정 중에 많은 충돌을 하고 토론, 설득과 설득 당함이 있겠지만 최종 결정은 어쨌든 연출이 해야해요. 최종 결정권자가 연출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 작품이 중구난방이 됩니다. 내 생각이 아무리 좋아도,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죠. 최종 결정은 연출이, 또 존중해야 하고요. 토론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연극을 만들지 못해요.

10. 깨달은 계기가 있었을까요?
남명렬 : 지방에서 연극을 시작했어요. 상임 연출과는 학교는 다르지만 동기였죠. 어떤 작품에 대한 해석의 차이 때문에 토론을 했고,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토론을 위한 토론을 하고 있구나, 지기 싫어서 토론을 하고 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거예요. 결과는 ‘개판 연극’이 나왔죠.(웃음) 그렇게 한 작품을 하고 돌아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각자 자기가 맡은 역할이 있고, 그에 걸맞은 행위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배우는 아무리 좋고, 옳은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설득 당하는 시점이 있어요. 두 작품의 대대적인 실패를 겪은 다음, 좋은 연극의 필요조건을 알게 됐죠.

남명렬/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남명렬/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10. 연기를 꾸준히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나요?

남명렬 : 연기는 행위죠. 행위 하는 남명렬을 어느 장르건 효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필요로 한다면 어디든 갑니다. 어지간하면 거절하지 않으려고 해요. 어쩌면 그게 나를 살아있게 하고, 내 삶과 자신이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해요. 물론, 누구든지 건강을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는 여러 가지를 하면서도, 몸으로 피곤해서 못하겠다고 해본 적은 없어요. 매니저 친구도 그래요, ‘선배님 체력이 참 좋으세요’라고요.(웃음) 늦게 촬영, 연습을 해도 몸이 그렇게 피곤하지 않더라고요. 혹여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7시간 정도 푹 자고 일어나면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요.

10.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가능한 것 같은데요.
남명렬 : 연기란 행위 자체가 애초부터, 생각해보면 ‘놀이’였어요. 놀이의 개념에서 생각을 한다면 노는 건데 뭐, 노는 것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있나요. 모든 행위 자체를 즐겁게 하면 그뿐이죠. 물론 의견 충돌, 관계에 대한 스트레스는 있어요. 그런데, 그것조차도 놀이라고 생각하고요. 대기 시간도 뭔가를 하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다리죠. ‘왜?’라는 의문이 붙을 때는 주위를 죽~ 둘러보면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납득이 됩니다.

10. 더불어 주어진 모든 걸 잘하고, 잘해니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기도 하겠고요.(웃음)
남명렬 : 아니에요. 코미디를 못해요, 나는. 코믹을 잘 하는 사람들이 부러워요. 일상에서도, 연기도 코미디는 잘 못해요.(웃음) 코미디도 잘 하고 싶네요. 물론 한두 작품 코미디를 했지만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건 모르겠어요. 사실 그런 배워서 되는 게 아니죠. 코미디언들은 타고나는 거예요.

10. 연기를 업으로 삼고, 꾸준히 작품을 해오고 있어요. 재능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의심해본 적이 없을 것 같은데요.
남명렬 : 재능이 많은 사람은 아니에요. 단지 배역을 위해서 성실하게 다가가려고 했을 뿐이죠. 재능이 있었다면 다른 영역을 개척하지 않았을까요?(웃음) 아주 냉철하게 보면, 연극을 보지 않는 관객들에게 남명렬은 얼굴은 어렴풋이 알아도, 이름은 몰라요. 그건 어떻게 보면 개척은 덜 된 거죠. 물론 저는 충분히 만족하고 대중에 의한 출세 욕심을 갖고 있지는 않아요.

남명렬/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남명렬/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10. 드라마와 영화도 많이 하시고요. 출연을 결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무엇이 있나요?

남명렬 : 고려 대상은 스케줄이 허락한다면, 제안이 오는 건 다해요. 연기를 한다는 것은 연극 무대뿐만 아니라 쉬고 있으면 조금씩 변하고 있는 걸 느낄 수가 없어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 화법이나 방식이 변하는데 따라가지 못할 가능성이 크죠. 언어도 알 수 없이 조금씩 변하는 것처럼 무대도 환경, 패턴이 변해요. 그건 연극, TV, 영화 모두 마찬가지이고요. 그런 호흡을 피부로 느끼면서 계속하지 않으면 흐름을 파악할 수가 없죠. 적절한 모습을 구현하지 못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끝없이 호흡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못 미치는 작품을 하기도 하지만, 못 미친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작품은 아니에요. 돌아보면 좋은 작품만 날 성장시킨 건 아니거든요. 실패한 작품도 배우로서 성장시키는 힘이 되기도 해요.

10. 연극을 선택할 때는 어떤가요? 조금 다를 것 같기도 한데요.
남명렬 : 대본, 구성원, 또 프로덕션도 중요하죠. 대본은 기초적인 베이스이고, 프로덕션은 경제적인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에요. 구성원의 누구인가는 최소한 두 달 정도를 연습해야 하고, 공연까지 석 달은 붙어 있어야 해요. 적어도 예술적 가치를 공유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면, 그 3개월이 악몽이 될 수 있어요.

10. 작품을 끝내고 잔상이 오래 남는 편인가요?
남명렬 : 여러 형태의 배우들이 있는데, 극장에 들어가서 분장실에서 한 시간 전 쯤 전에 의상을 입는 순간부터 그 배역에 들어가기 시작해요. 공연이 끝난 이후에는 최대한 벗어나려고 노력해요. 그렇게 살려고 하고요. 그렇게 해야 에너지를 응축시켜서 무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일상을 다 캐릭터로 사는 건 옳지 않다고 봐요. 무대 밖에서는 나, 무대에서 의상을 입은 뒤부터는 그 인물로 천천히 들어가는 거죠.

10. 유독 빠지기 힘들었던 캐릭터는 없었나요?
남명렬 : 2006년 연극 ‘에쿠우스’의 다이사트가 그랬어요. 유독 저를 지배하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그건 좀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더욱이 그 인물이 강렬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작품이죠. 이야기하는 담론이 크기도 했고요.

10. 그런 면에서 ‘코펜하겐’의 보어는 어떤가요?
남명렬 : 보어는 실제 나와 비슷한 면이 있어요. 선(善)이 무엇인가를 늘 생각하고 살고, 다양한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요. 지배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죠.

10. ‘코펜하겐’은 다른 배우들이 굉장히 탐내는 작품이라고 해요. 배우들이 이끄는 힘이 큰 작품이라 그런 것 같아요.
남명렬 : 배우들이라면 뿌듯한 작품이죠. ‘저걸 하면 스스로 즐거울 것 같다’는 생각일 거예요. 캐릭터가 매력적이고, 어려움이 있을 것 같지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죠. 저는 그저 대본 위에서 잘 놀았을 뿐이에요. 그 대본을 잘 해석한 연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죠.

10. 이 작품으로 상을 받기도 했어요. 인정을 받은 거죠.
남명렬 : 수상은 그해 12월에 했어요.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은 되는 것 같아요. 충분한 가치는 있지만 대단한 인간이 된 건 아니죠. 자칫 상에 과대하게 의미를 뒀을 경우 바람직하지 않은 행보를 하게 되는데, 그건 경계해야 해요.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야죠.

남명렬/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남명렬/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10. 배우라는 직업으로 살면서 느끼는 것이 있나요?

남명렬 : 배우가 가져야 할 덕목이 뭔지는 모르는데, 일상적이면서도 특별한 존재예요. 배우의 삶이 어때야 한다, 그 누군가도 정할 수가 없어요. 100명의 배우가 있다면 다 다른 일상을 살죠. 물론 보통의 사람도 마찬가지겠지만. 각자 사고하는 방향대로 사는 건데, 어느 것이 배우적이고, 또 덜 배우적인 건 없다고 봐요.

10. 연기가 하면 할수록 어렵다고 하는 배우들도 있어요. 여전히 재미있으신가요?
남명렬 : 늘 재미있어요.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그것조차도 즐거움의 하나죠. 연극으로 좁혀서 이야기를 한다면 내가 맡은 캐릭터가 잘 안 풀리고 보이지 않는 경우가 그래요. 이러저리 봐도 방향성이 안 보일 때, 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엄청난 스트레스죠.

10. 그러던 중 한줄기 빛이 보이면, 그 희열은 대단하겠죠.
남명렬 : 어느 작품을 하던 중에 갈 길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리딩을 하는데 아주 국어책 읽듯 그렇게 했어요. 되도록이면 멀리 떨어져서 보려고 그랬죠. 주위에서는 아마 성의가 없다고 오해했을지도 몰라요. 탐색의 과정이었어요. 3일 정도를 그렇게 하는데, 어느 순간 딱! 이 길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다음부터는 뭐 일사천리에요.

마치 문이 하나 있는데 잠겼어요. 열리지 않는데,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열쇠를 찾아 돌리면 금방이잖아요. 그걸 깨고 부수고 하는 것보다. 경력이 오래됐다고 꼭 잘한다는 보장은 없어요. 이제 1, 2년이 된 배우나 오래된 배우나 그 작품이 처음인 건 똑같아요. 좀처럼 노하우가 쌓이지 않는 일이죠.

10. 그래도 시간이 주는 무언가는 분명 있죠.
남명렬 : 한 가지는 있어요. 경험이 있냐에 따라 문제에 봉착했을 때 해결하는 길을 찾아내는 통로의 카드는 많이 있죠. 경험이 있으니까요. 노하우가 쌓이지 않는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은 여러 개 갖고 있어요.

10. 연기 외에는 주로 무얼 하시나요?
남명렬 : 집에 있는 걸 좋아해요. 뒹굴뒹굴하죠.(웃음) 서재에서 책 보는 걸 좋아해요. 가리지 않고 읽고요. 사회 과학서적을 재미있게 읽는 것 같아요. 의미 있는 소설을 즐겨보고, 회자되는 것들은 한 번씩 꼭 보고요.

남명렬/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남명렬/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10. 2, 30대 배우들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남명렬 : 네가 가는 길이 정답이다. 지금 현재, 즐거운 일이든 괴로운 일이든 스스로를 의심하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결정한 자신의 일에 확신을 갖고, 의심하지 말라고요. 이 일은 스스로 자기 확신을 갖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에요. 그 선택이 옳다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10. 배우 남명렬의 앞으로는 어떨까요?
남명렬 :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하루아침에 엄청난 인물로 부각되길 원하지 않고, 가늘고 길게.(웃음) 해보고 싶은 건…연극 ‘3월의 눈’의 오영수 선생이 나중에 같이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하시더라고요. 지금보다 나이가 더 들어 한다면, 의미가 있겠죠. 무대에 존재하는 자체만으로도 감동인, 그런 무대에 어느 순간 있게 된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 이후 어느 날, 나보다 열 살 어린 배우에게 물려주고 그럴 수 있다면 행복하겠어요.

김하진 기자 hahahaj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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