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윤준필 기자]
영화 ‘계춘할망’에 출연한 배우 윤여정 / 사진제공=콘텐츠난다긴다
영화 ‘계춘할망’에 출연한 배우 윤여정 / 사진제공=콘텐츠난다긴다
배우 윤여정은 인터뷰 중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질문을 받자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이라며, 문학평론가 김병익의 에세이 ‘조용한 걸음으로’의 서문 중 한 부분을 암송했다.

“이제 우리에게 괴로워하며 진지하게 정색하고 아프게 따지며 힘들여 셈할 일들이 얼마나 남았겠는가. 허망함을 허망함으로 받아들이는 관용을 나는 요즘 훈련하고 있는데 이 글이 그런 연습의 하나이기를 바란다. 세상은 내일 아침에도 해가 뜰 것이고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가리라. 그럴 세상 모습을 내다보면서‘조용한 걸음으로’운명을 밟아가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 될 것이다.”

그 후 윤여정은 “살다보면 허망한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자꾸 과거를 생각하게 되는데 허망함을 허망함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 ‘계춘할망’의 해녀 계춘처럼 윤여정의 말 한 마디에는 오랜 연륜이 녹아 있었고, 깊은 울림이 있었다.

10. 영화 ‘계춘할망’에서 그동안 보여주셨던 세련되고 도회적인 이미지와 조금 다른 역할을 맡으셨다.
윤여정: 의외로 ‘계춘할망’ 같은 역할이 꽤 들어온다. 그동안 인연이 안 닿아서 못했던 거지. 내가 집안일도 해야 하고, 아이들도 키워야 해서 지방 촬영은 별로 안 좋아했는데, 이번에 어떻게 기회가 돼 제주도에 두 달 가까이 머무르며 영화 촬영을 했다.

10. 할머니의 사랑이 돋보이는 작품인데, 왜 출연을 망설이셨는가?
윤여정: 제주도에서 찍어야 하니까 오랫동안 집을 비워야 한다는 게 좀 그랬고, 주인공을 해야 한다는 점도 부담이 컸다. 그만큼 책임져야 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나는 남의 돈이 무서운 걸 안다. 내가 그만큼 티켓 파워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감독한테 제목을 바꾸자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끝까지 안 바꾸더라고.

10. 젊은 배우와 둘이서 작업한 건 처음 아닌가? 김고은과 직접 호흡을 맞춰본 느낌은 어땠나?
윤여정: 웬만한 배우들은 나보다 다 어리다. 오히려 ‘디어 마이 프렌즈’처럼 나보다 늙은 배우들이랑 일하는 게 처음이지. 김고은은 ‘은교’ 때부터 눈여겨봤다. 그동안 계속 나오던 얼굴이 아니라 새로운 얼굴이지 않느냐. 처음에 촬영장에서 굉장히 쭈뼛쭈뼛 다가오는데, 오히려 역할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배우 윤여정 / 사진제공=콘텐츠난다긴다
배우 윤여정 / 사진제공=콘텐츠난다긴다
10. ‘계춘할망’을 찍을 당시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다고 들었다.
윤여정: 어머니가 지난해 교통사고를 나셨다. 그래서 이 작품을 끝까지 하느냐 마느냐 심각하게 고민했다. 동생도 엄마가 아픈데 언니마저 병나면 어떻게 하느냐며 돈을 물어주더라도 하지 말라고 했었다. 진짜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었다. ‘계춘할망’을 하면서 여배우 길은 정말 험난하다는 걸 새삼 느끼기도 했다.

10. 어떤 점에서 험난하다는 걸 느끼셨는지 궁금하다.
윤여정: 분장 후유증으로 아직까지 고생한다. 1년 가까이 지났는데 알코올로 분장한 것 때문에 지금도 얼굴이 빨갛다. 머리카락은 완전 옥수수수염이 됐다. 이렇게 배우들은 자기 몸이 상할 때까지 연기를 한다. 괜히 배우들 성질이 못 되지는 것이 아니다. (웃음)

10. 워낙 대선배이시니까 창 감독도 디렉션을 줄 때 어렵지 않았을까.
윤여정: 어려우면 감독하지 말아야지. 이런 수직관계가 진짜 문제인 것 같다. 나는 배우고, 그는 감독인데 나한테 말을 못할 게 뭐 있느냐. 그의 의견을 내가 들어본 다음에 수용할 수 있으면 수용하고, 못하겠으면 못한다고 말하면 되는 건데 말이다.

10. 워낙 시원시원하게 대답을 해주셔서 마치 젊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다. (웃음) 젊은 배우들과 일을 같이 해서 그런 걸까.
윤여정: 내 또래는 다 은퇴하거나 멀리 갔다. (웃음) 그만큼 오래 배우 생활을 하니까 어린 친구들하고 작품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디어 마이 프렌즈’가 진짜 특이한 경우다. 각자 누구의 엄마로서 연기 생활을 하다가 한 자리에 모인 것 아닌가. (김)혜자 언니가 드라마 포스터 찍던 날, 나한테 “작가가 죽기 전에 우리 만나게 해주려고 이런 걸 썼나봐”라고 말해서 울컥했었다.

10. 스스로 여배우가 아니라 노배우란 말을 하시더라. ‘노배우’란 말이 좀 슬프게 들린다.
윤여정: 삶의 질서 아닌가. 늙는다는 것은 그리 슬퍼할 일도 아니다. 나같이 늙은 사람이 200세 가까이 살면 세상이 혼란스러워질 거다. 여배우라고 하면, 편견이긴 한데, 예쁘고 화려한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지 않나. 난 그런 게 싫다. 내 나이 70세에 노배우가 아니면 어쩌겠느냐. 대신 슬퍼할 필요 없다. 내가 괜찮으니까.

10. 아무래도 영화라는 게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욕심 생기고,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을 것 같다.
윤여정: 어느 순간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어쩌다가 좋은 역할이 내게 들어오면 그게 기회다 생각하고 잡는 거다. 이 나이에 송중기하고 멜로를 꿈꾸는 그런 쓸 데 없는 생각은 안 한다. (웃음)

10. 배우에게 도전이란 무엇일까?
윤여정: 생각보다 도전은 쉬운 거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역할을 피하면 그게 도전이다. 내가 한 가지 역할을 잘하면 계속해서 비슷한 역이 들어오는데, 난 새로운 역할을 기다렸다. 대신 금전적인 부분은 많이 포기해야 한다. 들어오는 역할을 다 못한다고 해야 하니까. 그래도 내 인생 누굴 탓하겠느냐. 인생에 꿩 먹고 알 먹고는 없다.

배우 윤여정 / 사진=콘텐츠난다긴다
배우 윤여정 / 사진=콘텐츠난다긴다
10. 최근에 JTBC ‘비정상회담’에 출연하신 것도 봤었다. 재미있게 촬영하신 것 같았는데, 예능에 종종 출연하실 생각은 없나?
윤여정: 난 내 일로 평가받는 것이 좋다. 연기를 잘했다고 평가받으면 기분이 좋고, 못했다고 평가 받으면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런데 예능에 나가면 본연의 내가 나오고, 시청자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평가를 한다. 내가 이 나이에 예능에 나가서 주책이란 평가는 받고 싶지 않다.

10. 그럼 tvN ‘꽃보다 누나’에 출연한 것은 굉장히 의외의 선택을 한 건가.
윤여정: ‘꽃보다 누나’는 굉장히 망설이다 출연을 결정했다. 나영석이란 친구를 처음 만났었는데 굉장히 기분 좋은 사람이었다. 자기가 잘못한 걸 빨리 인정할 줄 알더라. 굉장히 신중하고, 굉장히 겸손했다. 나는 나보다 나이가 어려도, 나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면 굉장히 기분이 좋다. 나영석은 자기 직업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수용할 건 수용하면서 철두철미하게 계산하고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점들이 정말 좋았다. 겉보기엔 촌스럽게 보여도 일을 하는 태도가 굉장히 세련된 사람이었다. (웃음)

10. 한동안의 공백 이후, 다시 연기자로 복귀했을 때 그때부터 배우 인생이 시작됐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윤여정: 어린 시절 배우를 했을 때는 그저 아르바이트로 생각하고 했던 거다. 그때는 나한테 NG만 안내면 잘했다고 해줬는데, 난 그게 진짜 잘한 줄 알았다. 연기자는 장애물 경기 선수다. 한 역할을 넘으면 또 넘어야 할 다음 역할이 있다. 그런데 막 데뷔를 했을 때는 그걸 몰랐다. 한참 뒤에, 인생의 쓴맛을 알고 다시 연기를 시작했을 때 나한테는 이것밖에 살 길이 없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절실하게 연기를 했다. 사람은 절실함이 있어야 뭔가가 나오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10. 대부분 자신이 지나온 삶을 바라보기 마련이다. 그런데 배우 윤여정은 계속 앞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윤여정: 내가 60세가 넘어서 ‘이제부턴 내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전까지는 하기 싫은 역할도 했었고, 돈 때문에, 시간에 쫓기면서 한 작품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감독과 작가와 작품을 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다. 배우로서 사치스러운 건데, 그런 걸 할 수 있는 나이가 돼서 좋다. 40대에는 이게 안 된다. 망하면 다음 일이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걱정을 한다. 난 많은 것을 내려놨다. 자유롭고, 편안해서 행복하다.

윤준필 기자 yoo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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