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장진리 기자]
정진영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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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게도 사랑이, 악인에게도 로맨스는 있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렸다고 믿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노년의 남자, MBC ‘화려한 유혹’ 속 강석현 역을 맡은 정진영은 다소 생경할 수도 있는 캐릭터와 복잡한 서사 구조를 진득하게 시청자들에게 설득시켜 나갔다. 인생을 알고, 죽음을 알 나이, 정진영은 또다시 뜨겁게 사랑했다. 정진영이기에 설득당했던, 꽤 멋진 로맨스였다.

10. ‘할배파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진영 : 생각지도 못하던 엄청난 별명을 지어주셨다. 처음엔 놀랐고, 지금은 감사드린다. 처음에 ‘할배파탈’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이지, 했다. 할배라는 말은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파탈이 대체 뭔가 했다. (웃음) 근데 나중에 우리가 모두 아는 그 ‘파탈(fatal)’이라고 해서 의외였다. 드라마에서 은수와의 멜로가 있긴 하지만, 로맨스가 내 어떤 매력을 발산한다기보다는 드라마에 필요한 것이었고, 나는 다만 여인을 사랑하는 내 마음을 느끼고 표현했을 뿐인데 의외로 그런 평을 받게 돼서 놀랐다.

10. ‘파탈’이라는 말은 ‘섹시하다’라는 느낌을 담고 있지 않나. 배우로서는 어땠나.
정진영 : 촬영 들어가기 전부터 최강희와 결혼을 하게 되는 설정은 이미 알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는 몰랐지만. (웃음) 극 중 나이차도 있고, 자칫하면 거부감만 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더라. 세상의 눈이 그렇지 않은가. 가족들의 반응도 그랬고. 걱정하고 염려했다. 사실 ‘화려한 유혹’의 강석현은 악역이다. 비자금 문서를 조성한 것부터가 모든 비극의 시작이고, 은수(최강희)는 거기의 희생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섹시한 매력을 보여야겠다는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지. (웃음) ‘할배파탈’이라는 말이 굉장히 절묘한 것 같다. ‘파탈’이라는 말이 약간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나.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 속에 독이 들어 있는, 그런 면에서 센스 있게 별명을 지어주신 것 같다.

10. 착용하고 있는 안경테나 콧수염 분장 등이 매력을 더했다는 평가도 있다. 스타일에 대한 고민도 있었나.
정진영 : 분장팀에서 고민을 많이 했다. 드라마에서 3번의 나이 차이를 겪으니까, 가르마나 수염으로 나이 차이를 보여주려고 했다. 처음에는 감독님이 안경을 쓰고 콧수염 분장을 하니까 왜색 느낌이 난다고 하더라. 5회부터는 썼다 벗었다 하면서 반응을 봤다. 영화는 한 권의 대본을 가지고 분석을 마친 후 촬영을 시작하는데 드라마는 계속 캐릭터를 맞춰가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실제로 어느 회차를 지나면 한주에 2개씩 찍어야 하니까 더 깊은 연구가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처음 구성대로 안경, 콧수염, 흰머리로 갔다. 흰머리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이제 50대인데 기분이 좋다. 나이 먹는다는 건 젊은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영역이 또 하나 생기는 것 아닌가. 빨리 머리가 모두 하얘졌으면 좋겠다.
정진영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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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강석현의 변화를 어떻게 보여주려고 했나.
정진영 : ‘화려한 유혹’에 있는 사람들은 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다. 석현의 30대는 상처가 발발한 흠집이 난 시기이고, 50대는 상처가 곪은, 70대는 그 상처가 터지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30대는 연애의 시점인데, 여자를 비겁하게 잡지 못하고, 지켜주지 못한 상처가 시작됐고, 50대에는 이미 상처가 곪아서 냉혹한 정치인이 됐다. 주로 보인 68세의 모습은 곪아터져서, 게다가 은수라는 의외의 여인이 등장해서 이 사람이 혼란을 보이는 모습을 그려야 했다. 몸의 중심이나 톤을 다르게 하려고 했다.

10. 실제로는 중년이지만 드라마에서는 노년을 연기했다.
정진영 : 노년을 실제로 생각할 나이다. 실제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많다. 지난해 연말에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휴대전화를 봤더니 제 절친의 부고가 있더라. 죽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까이 있다. 이미 그런 나이가 됐다. 강석현은 이미 시한부를 판정받고 극을 시작하기 때문에 비극적인 인물이다. 감독님이 강석현은 반성하는 인물이라고 설명을 했는데 마지막 순간인 걸 알기에, 은수라는 여자를 만났기에 반성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10. 한국 드라마는 결말이 늘 사랑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배우들은 항상 멜로를 꿈꾸지 않나.
정진영 : 많은 이야기가 다 사랑이기 때문에 드라마 역시 사랑으로 끝나는 거다. 그 사랑은 남녀, 동성, 세대 간의 사랑일 수도 있다. 인간의 감정이란 게 좋아하거나 혹은 미워하거나가 가장 큰 감정인데 결국 드라마 역시 그런 감정에 종착할 수밖에 없다. 드라마는 당대의 유행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대중가요가 그렇듯이 사랑을 통해 아파하고, 술 마시고 이러는 게 대중문화의 이야기다. 실제로 셰익스피어도 많은 사랑 이야기를 했다.

지금까지는 주로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역할을 주로 맡아왔다. 그러나 ‘화려한 유혹’은 예외적이었다. 멜로는 예전부터 하고 싶었지만 배우가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되는 건 아니다. 이번 작품은 노인의 멜로이기 때문에 내게 맡기게 된 것 아닐까. (웃음) 가능성을 보신 것 같다. 나는 사실 반신반의했다. 현재 시점에서는 오해가 다 풀렸지만, 남편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연애하고 결혼하는 게 말이 될까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배우로서 시청자에게 설득시켜야 했다. 연기하면서는 최강희를 신은수 자체로 봤다. 배우들이 멜로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런 순백의 감정을 연기로 표현하면 되기 때문이다. 다른 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 최강희가 내 눈에는 은수로 보였고,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내 눈은 매혹되는 눈이었다.
정진영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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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최강희와의 멜로에 대해서는 만족하나.
정진영 : 내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훨씬 깊이 진전됐다. 강석현은 ‘춘향전’의 세련된 변학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웃음) 사실 그렇게 큰 멜로가 있는지 몰랐고, 과제라고만 생각했다. 열심히 사랑하니 자연스럽게 사랑이 되더라. 의심의 눈으로 신은수를 바라보던 강석현이 의심하다 보니 궁금증이 깃들게 되고, 사랑이 시작되면서 예상치 못한 달달한 장면까지 이어지는 걸 시청자들이 봐주신 것 같다.

10. 최강희와의 호흡은 어땠나.
정진영 : 최강희가 독특한 친구다. 별명이 4차원이라고 하던데,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맑다. 일단 눈이 정말 예쁘고 맑다. 최강희에게서는 신은수가 정말 느껴진다. 최강희에게도 눈이 정말 예뻐서 내가 연기하기에 너무 좋다는 얘기도 했다. 극 중 은수가 자신의 잘못 없이 나쁜 운명으로 끌려 들어온 인물 아닌가. 최강희는 ‘로코퀸’인데 이런 사연 많은 인물을 하는 건 처음일 거다. 은수를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결혼까지 감행하지만, 최강희가 아니라 다른 배우였다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10. 차예련이 연기한 딸 강일주를 향한 애틋한 부성애도 잘 드러났다.
정진영 : 일주는 내 첫사랑의 딸이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인물이다. 일주를 보호하려고 하는 게 마지막까지 계속되는데, 바로 그런 것 때문에 은수와의 관계가 계속 안쓰럽게 전개된다. (차예련) 배우 본인은 악역으로 계속 가서 괴로웠을 것 같다. 하지만 점점 더 안정적으로 제 몫을 해줘서 고맙다. 마지막에 내가 죽을 때 최강희와 차예련이 있었는데 차예련이 정말 펑펑 울었다. 현장에서도 정말 많이 울었다. ‘너는 왜 이렇게 많이 울었어?’ 물어봤더니 ‘아버지 내가 안 죽였단 말이야’ 하면서 펑펑 울더라. (웃음)
정진영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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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오래 혼자 일하다 대형기획사인 FNC엔터테인먼트에 새 둥지를 틀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정진영 : 예전에 큰 회사랑 잠깐 해봤는데 재미가 없었다. 혼자 일하는 게 내 스타일에도 잘 맞았고. ‘강남 1970’이라는 영화를 할 때 설현이랑 같이 연기를 했는데, 그 때 인연이 돼서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제의를 받았다. 사실 내가 혼자 일한 이유 중 하나는 소속사에 들어가면 수익 때문에 내 맘대로 못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회사에서는 나한테 수익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웃음) 나는 일을 많이 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회사에서는 비즈니스 수익이 아니라 회사에 아이돌이 많으니 모범이 되는 선배를 모시고 싶다고 했다. 이런 얘기는 처음 들어봤으니까 진심으로 느껴져서 함께 하게 됐다.

10. 나이를 먹는다는 건 정진영에게 어떤 의미인가.
정진영 : 남자가 가장 멋있을 때는 40~45세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세상도 알고, 어느 정도 성과도 있고. 이제 나는 그 시기가 지나고 53세가 된 거다. 배우로서 보자면 젊은 역은 못하지만, 이제는 나이 먹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역을 맡을 기회가 온 거다. 배역의 비중은 달라질 수 있으나 세상을 아는 사람만 아는 배역을 맡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남성에게도 갱년기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난 갱년기가 끝났다. 2년간 힘들었고 지난해에 끝났는데, 돌아보니 여성 갱년기와 심리적으로 비슷한 것 같다. 옛말에 50살이 지천명이라고 하는데 운명을 안다는 것도 맞지만, 감히 내 마음대로 해석을 해본다면 죽을 줄 안다는 느낌이 아닐까. 자신의 삶을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살면 가치 있고 아름답게 사는 것일까를 고민하고 사는 거다. 멋있는 나이는 아닌 것 같다. (웃음)

장진리 기자 mari@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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