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정시우 기자]
신연식감독
신연식감독

한 영화사이트의 DB를 찾아보면 신연식 감독에 대한 소개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고, 독립 영화계와도 인연을 맺지 않은 채 오직 자기 자신의 작업방식만을 고수하고 있다” 오래전, 그러니까 2000년대 초반에 등록된 이 프로필은 흥미롭게도 일종의 예고처럼 신연식 감독의 인생에 작동하는 모양새다. 독립영화계와 인연을 맺지 않는다는 건 빗나갔지만, 적어도 자신만의 작업방식을 고수하는데 있어 신연식 감독만큼 독창적이고 능동적인 이도 드물기 때문이다.

연출은 물론 각본, 제작, 투자, 배우 캐스팅 등을 자급자족해 온 신연식 감독은 (주)루스이소니도스라는 제작사를 직접 차린 후부터 보다 과감한 실험들에 도전하고 있다. 한국영화계의 개성 부족이 ‘다양한 플랫폼의 부재’에 있다고 생각하는 신연식 감독은 남들이 가지 않은 획기적인 제작방식을 통해 좋은 선례들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 과정에서 나온 영화 중 하나가 바로 ‘동주’. 이준익 감독이 연출하고, 신연식 감독이 각본과 제작을 맡은 제작비 5억원의 저예산 영화 ‘동주’는 예술적 가치가 우선인 비상업적 영화가 새로운 플랫폼 안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좋은 가이드를 남겼다. 그의 뜨거운 창작열은 ‘동주’로 시작된 ‘예술인 시리즈’를 통해 보다 뜨거워질 예정. 스크린에 부활할 제2의 윤동주들이 벌써부터 궁금하다.

10. 감독뿐 아니라 작가, 제작자로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어떤 정체성이 가장 강한가.
신연식: 영화감독도 다 같은 영화감독이 아니다. 영화를 만드는 목적과 이유가 다르고 성향과 기질이 다 다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준익 감독님은 야전성이 강한 기획자형 감독이시다. 나의 경우는 감수성이 완전히 작가 베이스다. 글 쓰는 걸 베이스로 연출도 하고 제작도 한다.

10. 세 가지 일이 부딪히는 경우는 없나.
신연식: 부딪치는 건 없다. 상업영화나 예술/독립영화나 모든 것의 기본은 그 일을 왜 하느냐다. 그 일을 왜 하는지에 대해서 구성원들이 어떻게 합의를 보고 참여했느냐가 중요하다. 쟁취하려는 게 무엇인가에 따라서 포맷, 스타일, 이야기 방향이 정해진다고 본다. 만약 상업영화감독이라면, 서비스 정신을 가지고 겸손하게 덤벼야겠지.

10. 그렇다면, 당신이 영화를 만드는 목적은 뭔가.
신연식: 실질적이 삶의 변화다.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이상한가?

10. 아니, 전혀.
신역식: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너무 교조적인 것 아니냐고.(웃음) ‘동주’로 예를 들자면, 그 시대에는 윤동주-송몽규 뿐 아니라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태도로 살아갈지에 대해’ 굉장히 뜨거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변혁기였고, 보다 나은 세상을 도출할 수 있을 거란 기대와 어떤 욕망이 있었던 시대였으니까. 지금 20대 청춘들에게는 그 욕망이 거세된 게 아닌가 싶다.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욕망이, 공무원 시험 합격이나 대기업 입사 정도의 욕망으로 대체된 거다.

10. 세월호 참사 등 여러 사건을 통과하면서 20대가 사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신연식: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러기엔 기성세대들이 희망을 너무 못 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약간 다른 이야기인데, 영화계의 여러 이슈도 비슷하다. 변화가 필요한 어떤 이슈들에 대해서 영진위가 해주길, 정치권이 해주길, 법률이 뭔가 해소해주길 바란다. 그러면 안 된다.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힘 있는 누군가가 해주길 기다리다보면 독재자가 나오는 거다. 어떻게 보면 그들 스스로가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기성시대의 잘못이다. 내가 당장 눈앞에 있는 부조리에 저항하고,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신연식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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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실제로 그런 행보를 보여 왔다. 그 동안 충무로 환경 개선, 감독들의 처우 개선과 권익 보호를 위한 표준근로계약서 도입, 양육강식의 한국 영화산업에 대해 앞장서서 비판의 날을 세워왔다.
신연식: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해오긴 했다.(웃음) 주변에서 미쳤다고 하는 일도 저질렀는데, 내가 잘나서가 절대 아니다. 나는 여태까지 영화로 손익분기점을 넘어 본 적이 없다.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받아 본 적도 없다. 흥행은 ‘동주’가 처음인데, 내가 잘 나가는 감독이라서 어떤 것을 극복하려고 이상한 짓을 해 온 게 아니라는 거다.

10. 기질인가.
신연식: 맞다. 나는 뒤에서 술 마시면서 징징거리는 게 별로다. 말하는 것에서 끝내는 게 아니라,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해왔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의 정리가 많이 된 상태다. 그 동안 표준근로계약서TFT 등 영화계의 여러 이슈에 대한 회의에 참여해 왔는데, 매일 모여서 회의하면 뭐하나 싶은 생각을 부쩍 한다. 그 회의를 하는 동안 세상은 더 빨리 변하니까. 지금 독과점 문제가 자주 거론되는데 이에 대한 논의도 이젠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논의 하는 와중에 산업과 기술이 먼저 바뀔 테니까. 스크린쿼터가 그러지 않았나. 그래서 이제 그런 건, 안 하기로 했다.

10. 이제 안 하기로 했다는 건 구체적으로 뭔가.
신연식: 어떤 정치적 연대? 정치적 연대는 절대 성공할 수 없더라. 내가 보기에 정치적 연대가 성공한 사례가 인류 역사에 없었다. 정치적 연대로 포장한 것뿐이지. 시저가 했던 ‘삼두정치’도 따지고 보면, 어떤 정치적 아젠다가 있어서 한 게 아니다. 각자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한 일인데, 그게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아젠다를 내세운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10. 역사가 포장을 하기도 했고.
신연식: 맞다. 그 착각을 영화에 녹인 게 바로 ‘프랑스 영화처럼’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서로 공유하는 관념이 있는 줄 알지만, 사실 없다. 영화를 보면 인물들 각자가 인식하는 프랑스 영화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 누군가는 뤽 베송을 떠올리며 이야기 하는데, 누군가는 트뤼포의 ‘쥴 앤 짐’을 생각하며 받아들인다. 이토록 다른데 어떤 관념이 있는 줄 착각하기 때문에 우리에겐 더 많은 오해와 고통과 부조리가 생긴다고 본다.

10. 식물적 관념주의자 윤동주와 동물적 행동주의자 송몽규가 있다면, 당신은 후자 쪽에 가까운 건가.
신연식: 둘 다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윤동주의 이면에는 또 다른 기질이 있다. 송몽규도 마찬가지다. 그냥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사람을 행동하게 하는 이유가 있을 뿐이지. 송몽규 대사 중에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내가 잘 쓰는 말이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이유와 목적이 분명하다. 30대 때 해 온 작품들은 시스템에 대한 여러 실험을 하기 위함이었다. 결론이 났으니, 이젠 더 이상 실험은 안 할 생각이다.

10. 기획중인 ‘예술인 시리즈’(10명의 예술인, 시리즈로 영화화)도 나름 실험 아닌가.
신연식: ‘예술인 시리즈’는 결과를 위해서 할 거다. 그건 실험을 통해 도출된 결과의 과정이다.

10. ‘예술인 시리즈’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동주’ 이야기를 해보자. 문화계 전반에서 윤동주 열풍이 일어나고 있다. 왜 지금 윤동주일까.
신연식: 그런 분이 지금 세상에 없으니까. 향수인 거다. 윤동주에 대해 향수는 우리 세대보다 우리 아버지 세대가 더 큰 것 같다.
동주
동주
10. ‘동주’의 출발이 흥미롭더라. 이준익 감독님과 기차에서 시작했다고 들었다.
신연식: 제천으로 감독조합 MT를 간 적이 있다. 그때 이준익 감독님도 일정이 있고, 나도 일이 있어서 중간에 일찍 돌아와야 했다. 둘이 기차역에 와서 티케팅을 한 후 시간이 남으니까, 제천 시내를 걸어 다니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감독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서로가 살아온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한 건 처음이었다. 당시 내가 ‘조류인간’을 촬영 중이었다. “너 ‘조류인간’ 얼마에 찍고 있냐?” “1억에 찍고 있는데요?” “나도 그 정도에 해볼까? 네가 얼른 (시나리오) 써봐. 제작도 하고.” 그렇게 기차 안에서 기획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감독님이 ‘동주’를 1억 5천에 찍자고 하셨다. 그런데 ‘동주’는 시대물이라 최소 5억은 해야 한다고 했다. 이준익 감독님 작품에 대한 대중의 기대치가 있을 텐데, 너무 무리하게 할 필요도 없다고 봤다. 그랬더니 감독님이 “지는 1억에 찍어놓고, 나한테는 왜 5억에 찍으라고 그래?”(웃음) 하시더라. 어쨌든 감독님은 저예산을 처음 하시는 거였고, 나는 늘 저예산 영화를 제작해 온 덕에 이야기가 빨리 진행됐다.

10. 어떤 마음으로 ‘동주’를 써 내려갔나.
신연식: 내가 스무 살에 연출부 막내를 시작했다. 나가서 청소하고 감독님 심부름하고…그걸 10년 했다. 중간에 영화가 엎어지는 동안, 내 또래 중에는 스물아홉에 퍼스트를 단 애들도 있었다. 그래서 ‘동주’를 준비하면서, 시인이 되고 싶은 윤동주의 심정에 감정이입했다. 비유하자면 윤동주는 미쟝센단편영화제나 서울독립영화제도 못 가본 인물이다. 그런데 윤동주보다 대여섯 살 위인 시인 백석은 비슷한 나이에 데뷔해서, 데뷔하자마자 관객 500만을 동원하고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거고.

10. 아, 비유가 참.(일동웃음)
신연식: 영화가 되지 못한 시나리오 앞에서 평생 입봉 못하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안 풀려도, 안 풀려도 너무 안 풀리니까. 윤동주는 시집을 내려고 굉장히 시도를 많이 했지만, 그게 잘 안 됐다. 그 심정을 내 20대를 생각하니 너무 잘 알겠더라.

10. 그런 20대가 있었기에 지금과 같은 성향들이 확고해진 건가.
신연식: 어떻게 보면 그런 시련이 내겐 자양분이었는데, 그때는 그게 자양분일 거라는 생각을 못하긴 했다.

10. ‘예술인 시리즈’의 첫 번째로서 ‘동주’는 굉장히 유의미한 평가와 흥행을 이뤘다.
신연식: 앞으로 ‘예술인 시리즈’를 아홉 편 더 할 예정인데, 그 중에 윤동주라는 브랜드를 능가할 분은 아마 없을 거다. 생각해 봐라. 대한민국 예술인 중에 윤동주만큼 국민적 인지도가 있으면서 ‘안티’가 없는 인물은 없다. 예체능까지 넓힌다면, 김연아가 2등 정도 될까.

Q. ‘동주’에는 총 열세 편의 시가 나온다. 강하늘(윤동주 역)의 목소리와 영화 속 상황이 절묘하게 맞물려 여운을 남긴다. 시의 배치도 직접 구성한 건가.
신연식: 직접 했다. ‘별 헤는 밤’ ‘서시’ ‘자화상’ 같은 유명시들은 이준익 감독님이 윤동주를 하자고 하는 순간 바로 떠올랐다. 최종적으로는 빠졌지만 ‘십자가’도 윤동주가 신앙과 이념 사이에서 갈등하는 장면에 배치할 생각이었다. 주요시들은 큰 고민 없이 위치가 정해졌다.
신연식감독03
신연식감독03
10. 당신의 영화를 보면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이 상당히 돋보인다.
신연식: 아까 이야기 했듯, 여러 가지 시스템을 실험하기 위한 것도 있다. 가령 ‘러시안 소설’은 이야기 형식과 구조, 제작방식을 극악으로 상정해 놓고 찍은 거다. 한국 관객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를, 스태프 3명 데리고 1000만원으로 찍었다. 그래도 인건비는 다 줬다. 그게 한국 극장상황 안에서 어느 정도 포용이 될까 실험적으로 해 본 거다.

10. 결론은 어떻게 났나.
신연식: 여기까지는 가능하겠구나, 했다. 그래서 그보다 더 깊게 들어가서 작업한 게 ‘조류인간’이다. ‘조류인간’은 일부로 배급까지 했다. 극장상황에 대한 데이터까지 뽑아보려고 했는데, 결론은 극장에서는 저예산 영화가 이제 힘들다…미안한 이야기지만 내 결론은 그렇다.

10. 이거, ‘오프더레코드’인가.
신연식: 써도 된다. 내 기준에서는 끝났다는 거니까. 극장환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실제로 독립영화관들이 하나 둘 없어지고 있고. 독립영화의 극장상황이 나빠지고 있음을 매년 피부로 느낀다. 그래서 지금 결론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10. 배급과 시스템을 실험하는 건, 무엇을 위해서인가.
신연식: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영화를 오래 하고 싶어서. 두 번째는 영화를 즐겁게 하고 싶어서.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면서 영화가 산업화 됐다. 영화인들이 대기업 자본을 받아들인 거니, 그들의 정체성도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해야 한다. 우리가 받아들여놓고는 그들에게 정체성을 바꾸라고 무조건 요구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수긍만 해야 하느냐! 그건, 아니다. 다른 식의 돌파구도 우리가 찾아서 만들어야 한다. 관객들에게 서비스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상업영화를 했다면 거기에 최대한 맞출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는 그 경우는 아니니, 어떤 자아실현이나 배우들과의 즐거운 작업을 다른 형태로 할 수 있는 걸 만들어보겠다는 거다.

10. 그 돌파구가 바로 ‘동주’가 아닐까 싶다. ‘동주’의 경우 제작규모만 따지만 다양성 영화로 지정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신연식: ‘동주’를 아트하우스 관에서 하려고 하는 걸, 우리가 그러지 말자고 했다. 아무리 5억 짜리라 해도 이준익 감독님이 연출하고 강하늘이 주인공인 영화인데 아트하우스 관에서 트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른 다양성 영화의 상영 기회를 뺏는 건 옳지 않다고 봤다.

(신연식 감독 인터뷰는 2편으로 이어집니다.)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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