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이은호 기자]
이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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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하나가 진다. 나뭇잎에게 그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어느 부지런한 청소부 하나가 신새벽부터 그 잎을 쓸어낸다. 나뭇잎은 제대로 된 작별도 고하지 못한 채, 소멸된다. 이정아의 노래 ‘어나더 이어(another year)’는 그맘때쯤 만들어진 곡이다. 쓸쓸한 목소리로 그는 노래한다. “그대와의 시간이 멀어져 가네. 강물이 바다로 흐르듯이. 초록의 잎들도 붉어져 가네. 세상 모든 게 변하듯이.”

그러나 나뭇잎이 진 자리에는 또 다른 잎이 움트기 마련이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의 나뭇잎이 소멸함으로써 또 다른 잎은 탄생할 수 있었다. 죽음이란, 유한함과 소멸과 상실이란, 결코 슬프기만 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살아야 한다. 불안함과 두려움을 모두 끌어안은 채,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마음의 중심에 놓고서.

10. 살이 많이 빠졌어요.
이정아 :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봐요. 헤헤.

10. 1집 앨범이 워낙 잘 나왔잖아요. 저도 그랬지만, 아마 많은 분들이 다음 앨범 소식을 기다렸을 거예요. 그만큼 듣는 귀도 날카로워졌을 거고요.
이정아 : 첫 번째 앨범 때는 스케일도 워낙 컸고 최고의 프로듀싱과 편곡을 받았어요. 지금은 화려한 옷을 벗은 셈이죠. 그래서 ‘이젠 내 진짜 실력이 들통 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는데(웃음)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부담을 놓게 됐어요. 들통 난다 한들 어쩔 수 없지, 뭐. 그냥 내 길을 가자고 생각했어요.

10. 말은 그렇게 해도, 신곡 녹음을 원테이크 형식으로 진행했다면서요. 웬만한 자신감이 아니고서는 도전하기 힘든 방식 아닌가요?(웃음)
이정아 : 그냥 가장 많은 옷을 덜어낸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사실 그 전의 편곡보다 더 멋지게 잘할 자신이 없었기도 하고요.(웃음) 그냥 아예 방향을 확 바꿨어요.

10. 방향을 바꿨다니, 의외네요. 개인적으로는 1집에 수록돼도 이질감 없는 트랙 같았거든요. 결국 이정아만의 스타일이 있다는 건데, 그게 무엇일까요?
이정아 : 부풀리거나 과장되게, 억지로 이야기하는 건 지양하는 편이에요. 음…그냥 성격인 것 같아요. 물론 ‘이런 사건 혹은 이런 이야기에 대해서 노래해야지’ 정도는 생각할 수는 있지만, ‘곡에 어떤 장치를 넣어서 어떤 감정을 끌어내야지’ 같은 건 잘 못해요. 어쩌면 그래서 좀 지루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 음악이.

10. 흔히 가요적인 작법이라고 하는 것들을 잘 못한단 얘긴가요?
이정아 : 네. 그 전 앨범에서도 전체적으로 밋밋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프로듀서 정재일 오빠가 윤곽을 잘 잡아주셨죠.

10. 그런데 ‘어나더 이어’의 편곡에는 소속사 대표님이 참여했네요?
이정아 : 처음 곡을 쓸 때 대표님이 미디 쓰는 법을 알려주셨어요. 그걸 토대로 데모를 만들었고, 녹음은 리얼 사운드로 진행했습니다.

10. 이정아는 미디와 정말 안 어울리는 아티스트 같은데.(웃음) 써보니 어떻던가요?
이정아 : 좋았어요. 다양한 색채감을 넣어볼 수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잘 다루지는 못해도 어떤 악기들을 넣어볼까 이것저것 눌러보며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었어요.

이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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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신곡 보도자료에 이런 문구가 있더군요. “항상 긍정적인 새해만을 이야기하는 우리에게, 이정아의 ‘어나더 이어’는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의 또 다른 해이며 상실감과 외로움이 여전히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이정아 : 새해라고 해서 모두가 다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봄이 온다고 해도, 전혀 행복하지 못할 사람들이 많죠. 그리고 그걸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뭔가를 나서서 하진 못할지언정,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건 모두에게 필요한 일 같습니다.

10. 봄이 와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를 의미하는 건가요?
이정아 : 그럴 수도 있고요, 전체적으로 다 해당되는 얘기일 수도 있겠죠.

10. 1집 수록곡 ‘바람의 노래’는 한센병 환자들을 만난 뒤 쓴 곡이죠. 앨범 발매 역시 세월호 사건을 추모하기 위해 한차례 연기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뮤지션으로서 느끼는 책임감이 있나요?
이정아 : 이게 생각해보면 웃긴 것 같은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 자체가 인지도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건데, 제가 그렇진 않으니까요. 헤헤헤. 어쨌든 나름 뭔가를 만들어서 내는 것 자체가 작더라도 영향력을 줄 수는 있겠죠. 우리가 혼자 사는 게 아니잖아요. 또 한편으로는 저에 대한 치유랄까요, 제 자신이 쏟아내야 하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10. 혹시 가사에 영감을 준 인물이나 사건이 있었나요?
이정아 : 작년 가을쯤에 영어로 먼저 가사를 쓴 노래거든요. 딱 그 시기였어요. 푸르던 나뭇잎이 붉어지다가 떨어지고, 어느 순간에는 청소부 아저씨들이 다 쓸어 가셔서 아무것도 안 남게 되던. 그런 일들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10. 그런데 새 잎이 돋아나기 위해서 낙화나 낙엽은 반드시 필요하죠. 그러고 보면 이별이란 게, 마냥 슬프지만도 또 기쁘지만도 않은 일 같습니다.
이정아 : 어떤 면으로는 상실감에 대한 생각을 예전보다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부모님은 더 들어가시고, 그걸 보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돼요. 영원한 것은 없지만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소중하기도 하고요. 그냥 그런 생각을 하면 눈물이 막 나요. 그래서 많은 것들에 더 감사해지기도 해요.

10. 영원하지 않다는 걸 인지한 채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걸까요? 극단적인 표현이긴 합니다만 매 순간이 죽음으로 가는 과정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거고, 반대로 그런 두려움이 진보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정아 : 글쎄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딱히 죽음으로 단정 짓고 있지는 않아요. 누군가에겐 영원하지 않은 게 젊음일 수도 있고요, 노래를 하는 사람에게는 목소리일 수도, 작곡가에게는 영감일 수도 있잖아요. 물론 말씀하신대로 그러한 두려움이 우리를 더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겠죠. 그래서 그냥, 많은 것들에 대해서 더 애틋한 마음이 생깁니다. 어쨌든 삶이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거니까요. 헤헤헤.

10. 많은 사람들이 연말이나 새해가 되면 ‘이유 없이’ 너그러워지고 ‘이유 없이’ 의욕적으로 변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어나더 이어’는 그런 분위기의 곡이 전혀 아니죠.
이정아 : 저는 (연말·연초에) 신나는 것도 옳다고 생각하고, 신날 수 없는 것도 옳다고 생각해요. 곡을 쓰면서 ‘신나기만 하냐’는 마음은 전혀 없었고요, 어떤 면으로는 제가 신나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사람도 마찬가지고 일도 마찬가지고, 좋은 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쁜 점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양쪽을 다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10. 반면 멜로디는 무척 아름다워요. 1집 앨범도 슬프거나 애절하거나 신파적인 기색은 거의 없었고요. 혹시 전달하고 싶은 정서나, 추구하는 미적 경지가 있나요?
이정아 : 그것도 ‘이렇게 해야지’라고 마음을 먹었다기보다는, 과하게 표현하는 걸 제가 잘 못해서 그런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굉장히 슬픈 상황에서 통곡을 하면서 우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제가 그런 편인가 봐요. 나 같은 모습을 계속 보여드리려고 하는 것 같아요. 저 다운 모습.

이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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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지난해 KBS2 ‘올댓뮤직’ 출연 당시, “작곡은 영적인 행위다”란 말에 상당한 공감을 표하시더라고요. 무슨 의미인가요?
이정아 : 그게, ‘내가 뭔가를 했어’의 느낌이 아니에요. 물론 내가 한 게 맞긴 한데, 내가 한 게 아닌 거 같은 느낌, 그 곡이 나에게 온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엄청나게 대단한 걸 했다는 얘기는 아니지만요.(웃음) 가사도 그렇고 곡도 그렇고, 내가 뭔가를 했다기보다는 (이미) 있는 무언가를 내가 만난 느낌이 들어요. 혹은 누군가 그걸 나에게 보내준 것 같다는 느낌이요.

10. 노래를 부를 때는요? 그 때도 내가 아닌 것 같은, 다른 사람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나요?
이정아 : 어떤 곡을 부르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요. 저한테는 가사가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어떤 가사를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다르고요, 같은 노래를 불러도 상황이나 환경이 다르니까 부를 때마다 조금씩 달라요. 그리고 사실 ‘내가 어떻게 노래를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아요. 성격적인 부분에 있어서요.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보통 당차고 에너지도 많잖아요. 그런데 저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늘 긴장하고 걱정도 많이 하거든요. 그런데도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하는 걸 보면, ‘이것도 내가 하는 게 아닌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10. 저 역시 정아 씨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토록 수줍음 많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거침없이 노래할까?’ 그런데 무대는 내 안에 쌓아놓은 걸 다 토해낼 수 있는 자리잖아요. 그래서 그 위에 오르면, 더욱 솔직해질 수도 있겠어요.
이정아 :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그리고 사람들과 교감이 되는 시간이잖아요. 그것도 좋고요.

이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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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조금 개인적인 질문을 해볼까 합니다. 과거 힘든 시기를 보냈던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1집 수록곡 ‘아이 원 투 씨 유(I want to see you)’도 그 때의 이야기라고요.
이정아 : 20대 초반 쯤에 우울증 비슷한 게 있었어요. ‘아, 이래서 사람들이 자살을 생각하는구나’라는 걸 이해할 수 있을 정도? 물론 제가 그럴 생각이 있었다는 건 아니고요.‘ 이 상태에서 정말정말 상황이 안 좋아지거나 약을 한다면(웃음) 그렇게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계속 활기차게 지내보려 했는데 잘 안 되고. 그런 게 힘들었어요.

10.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가요?
이정아 : 그런 건 아니고요. 그 때 부모님이 귀농을 한다고 시골에 내려가셨어요. 그래서 저 혼자 서울에 남았고요. 워낙 힘든 사람들이 많아서 고작 이런 걸로 힘들다고 말하기 민망하지만, 그냥 정서적으로 불안정했어요. 외로움이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 땐 나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게 쌓이고 쌓였던 게 아닐까 싶어요.

10.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누구나 우울해지는 법이죠. 털어버릴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이정아 : 워낙 오랜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일기를 썼어요. 내가 지금 정서적으로 힘들게 되기까지의 저의 모습들을 쓰다보니까, 그걸 읽게 되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나 자신을 정리하게 된 것 같아요. 그 전에는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뭔가 순서대로 수납을 잘 해놓은 느낌? 엄마아빠한테 이야기한 것도 있었고, 친구들도 도움이 됐고요.

10. 종교의 영향도 있었을 것 같아요. 노래를 들으면서, ‘이 사람은 종교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이정아 : 그렇죠. 그냥 그런 것 같아요. 물론 한 사람 혹은 전 인류가 할 수 있는 일이 굉장히 많을 수도 있지만, 저는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늘 하거든요. 아주 작은 사건 하나로도 목숨을 끊을 정도로 무너질 수 있는, 너무도 연약하고 가녀린 게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없이 종교에 의지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람이라는 게 아름답고 크기도 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작은 존재이기 때문에요.

10. 너무도 작은 존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요?
이정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죠.(웃음) 사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생각은 저 스스로를 들여다보면서 한 것이거든요. 작은 거 하나를 하면서도 너무 많이 고민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모습들을 보면서요. 그런데 그냥 다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 같아요.(웃음) 많이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이지만, 두려움과 불안함도 다 안고서 살아야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마음의 중심에 놓고서.

10. 저는 무교입니다만, 종교인들에게는 특유의 이타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아 씨 역시 굉장히 이타적인 사람이란 생각이 들고요. 노래가 다 착하잖아요.
이정아 : 그러고 싶지만, 그렇게 잘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아요.(웃음)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노래가 착하다는 것도 착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 같아요.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고 못된 면이 있지만, 그 속에서도 선(善)을 향해 가고 싶어 하는 의지나 마음이요.

10. 마지막 질문입니다. 2016년 역시 ‘어나더 이어’이긴 하지만, 그래도 올해 원하는 바가 있다면요?
이정아 : 경기가 좀 좋아졌으면 좋겠어요.(웃음) 개인적으로는 일단 운전면허를 따고 싶고요, 좀 더 부지런하게 곡을 쓰고 싶어요.

이은호 기자 wild37@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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