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정시우 기자]
01최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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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호’는 “트렌드를 쫓아 영화를 만드는 건 위험한 일”이라고 믿는 최민식의 마음을 움직인 작품이다. 그는 ‘대호’와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알 수 없는 인력(引力)을 ‘인연’이라 했다. 영화를 보다보면 김대호(호랑이)와 천만덕(최민식)의 얼굴이 닮아있는 듯한 착각 아닌 착각에 빠지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은 단순한 외형적 일치감에서 오는 인상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아마 대호와 천만덕의 삶 속에 배우 최민식이 걸어온 예술가로서의 결기가 감지되기 때문이지 않을까. ‘업, 인과응보, 절제, 예의’를 품고 있는 영화 ‘대호’ 속에서 쉰다섯을 목전에 둔 배우 최민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Q. 오늘은 담배가 없군요.
최민식: (깊은 탄식) 그러게 말입니다.

Q. 혹시 끊으신 건….
최민식: 아이쿠, 그럴 리가요. 큭큭. 제 인생에 금연은 없습니다. 뭐, 어쩌겠습니다. 이런 세상(실내금연법)이 됐는데. 갑갑해도 따라야죠. 덕분에 덜 피우게 되는 건 있습니다. 술 마실 때 줄담배를 피우게 되는데, 숙취가 덜 해요. 나갔다 들어왔다 하니까.

Q. ‘명량’의 이순신을 연기한 것에 대해 운명이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대호’의 천만덕은 어떻게 다가갔는지 궁금하군요.
최민식: 이것도 인연인 것 같아요. 제 잘났다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명량’으로 인한 부담이 컸다면, 이걸 하면 안 됐죠. 이 불안한 걸 왜 하겠습니까.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 걸. 신경이 쓰였다면 완전 정 반대에 있는 정서의 현대물을 했겠죠. 그런 계산을 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모르겠어요.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이게 그렇게 끌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인연인 거죠. 그런데 저는 이제껏, 끌림에 따라 움직인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게 정답인 것 같아요. 영화의 성패나 흥행여부를 떠나서 내가 좋아서 한 건데 누굴 탓 하겠어요. 그러니 마음이 편한 거죠. 잘 되면 더욱 더 좋은 거고요.
최민식
최민식
Q. 그 어느 때보다 완성된 영화가 궁금하셨을 것 같습니다. 촬영 내내 보이지 않는 가상의 호랑이와 싸우셨으니, 스트레스도 상당하셨을 테고요.
최민식: 이 작품을 선택하고 언론시사회를 하기 전까지 목구멍에 돌맹이 하나가 꽉 박힌 것처럼 불안했습니다. 저희가 아무리 훌륭한 메시지라고 느끼면서 대중들에게 말을 걸어도, 김대호 씨(호랑이)가 연기를 못하면 꽝 아닙니까. 그럼 이 영화는 그냥 망하는 거예요. 김대호 씨가 엉망이면! CG티가 너무 나면 관객들이 어떻게 몰입을 하겠어요. 그래서 내내 불안했죠. 이렇게 불안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다행히 시사회에서 보니, 우리 김대호 씨가 잘 나와서 지금은 너무 ‘해피’합니다. 그런데 우리 김대호 씨가 싸가지가 없어요. 언론시사회 끝나고 바로 가버리더라고요. 촬영할 때 나타나지도 않고.(일동웃음)

# “‘나 예술가예요’ 하는 거? 웃기는 거예요. 촌스러워요”

Q.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대호 씨 성이 왜 ‘김’입니까.(웃음)
최민식: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김 씨, 이 씨, 박 씨 중에 한 명이 맞는다면서요? 그 중 만만한 게 김 씨더라고요. 이대호는 야구선수가 있으니까 좀 그렇고. 박대호? 그건 좀 박한 것 같잖아요. 그래서 그냥 막 지은 겁니다. 하하하.

Q.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대호’에 끌린 이유는 찾으셨나요?
최민식: 메시지 같아요. 업, 인과응보, 절제, 예의 같은 것들 말입니다. 사실 살면서 늘 생각하는 것들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드러났으면 했어요. 대사에도 반영이 돼 있지 않습니까. “잡을 만큼만 잡자. 이건 산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 대사에 많은 것들이 내포돼 있는 거죠. 제가 너무 거창하게 이야기 하는 것 같아서 민망스럽습니다만 우리가 창고에 박아놨던 가치, 잊고 살았던 미덕들을 회복 혹은 환기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 거죠.

Q. 질문을 조금 확장해 보겠습니다. 배우님이 느끼기에 2015년 현재, 우리가 잊고 있는 가치가 어떤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최민식: 저부터도 반성을 합니다. 예의가 실종된 게 아닌가. 인사 잘하고 하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던 우리네 사람들의 마음을 말하는 겁니다. 저희 어머니와 할머니가 불교신자셨어요. 초등학생일 때 어머니와 산에 있는 절을 종종 갔는데, 그때 어머니가 그랬어요. “산에 함부로 똥오줌 싸는 거 아니다. 미리 용변을 보고 산에 가야한다”고. “왜요? 그럼 그냥 바지에 싸요?”하면, “이놈이! 그러니까 미리 보고 올라가라고” 하셨죠. 이건 종교적인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다만 “이게 말이 돼? 미신인데? 호랑이가 무슨 신이야, 신은?” 이런 환경에서 자랐다면 이 작품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자란 환경 덕분에 천만덕의 마음이 저에겐 너무나 자연스럽게 왔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이 작품에 마음이 움직인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을 거예요. 아, 정말 그렇네요. 생각해보니.
최민식
최민식
Q. ‘신세계’ 인터뷰 때 박훈정 감독에 대해 ‘곤조(根性)’라는 표현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아티스트야’라는 마인드가 있는 친구라 좋다고 하셨죠. ‘대호’를 찍으면서는 어땠습니까.
최민식: 여전하죠. 그런데 많이 순해졌더군요. 조금 더 영글었다고 할까요. 빽빽거리는 게 있었는데, 이젠 자기도 나이를 먹었는지 그런 게 많이 누그러졌더군요.(웃음)

Q. 지금의 시스템에서는 영화를 예술로, 영화인을 아티스트 측면에서 접근하는 게 일면 어렵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대호’는 생각할 지점이 많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고요.
최민식: 사실 그래요. 만드는 사람입장에서 “우리 예술 해요. 우리 예술가예요” 하는 거? 웃기는 거예요. 촌스러워요. 그것만큼 미련해 보이는 게 어디 있어요. 우리는 결과물로 보여줘야 해요. 중요한 건 문화를 소비하는 대중들이 먼저 인정을 해주는 거죠. 그런 점에서 현재 영화인들의 위상과 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 저는 긍정적으로 봐요. 막말로 제가 배우 한다고 했을 때 저희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는 줄 아세요? 저희 형님은 그림을 그리거든요. “큰 놈은 환쟁이고, 둘째 놈은 딴따라? 이놈들이 ‘배때기’에 기름이 꼈나. 아직 고생을 안 해 봐가지고!”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은 자녀가 ‘K팝스타’에 나가면 부모가 함께 가서 응원하고 존중해주잖아요. 세상이 변했단 말이에요. 좋은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영화나 대중문화에 관심 많은 나라가 어디 있어요. 어떻게 보면 행복한 거죠. 좋은 시절을 만났다고 봐요. 대신 상투적인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그래서 잘 만들어야 해요. 다양하게 만들어야하고. 게임처럼 즐길 오락거리도 만들어서 보여줘야 하고, 나름대로 진지한 이야기를 화두로 던져서 고민도 해야 해요. 다양하게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 “무대는 아직도 너무 무서워요. 진짜 무섭습니다”

Q. 아직 갈증이 있는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최민식: 멜로! 멜로! 멜로! 멜로! 격정 멜로! 하하하.

Q. (웃음) 멜로에 대한 애정을 오래 전부터 밝혀오셨는데, ‘입질’이 오는 곳이 없나요?
최민식: 없어요. 다들 그러더군요. ‘격정 멜로’가 아니라 ‘걱정 멜로’라고.(일동 웃음) 에이, 참. 그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더 나이 먹기 전에 해야 하는데.

04최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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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멜로이야기가 나와서 그러는데, 사랑이라는 게 나이에 따라 의미가 변하잖아요. 배우님이 생각하는 사랑은 뭔가요?
최민식: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요. 하하하. 글쎄요…배려? 젊을 때는 상대에게 집착을 하잖아요. “나, 너 좋아~” “너~ 왜 내가 하자는 대로 안 해↗” “너~ 왜 다른 여자랑 이야기 해↗” “어디 갔다 온 거야↗”

Q. 과거에 그러셨군요!(웃음)
최민식: 네? 하하하. 저도 그랬죠. 집착하고 그랬죠. 그런데 이젠 생사확인부터 합니다.(일동웃음) 그런 것 같아요. 누군가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방식이 옅어졌다기보다는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그래봤자 다 해 봤으니까, 그게 얼마나 추접스럽다는 걸 다 아는 거겠죠.

Q. ‘무대 위의 최민식’을 보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최민식: 무대는 너무 무서워서. 진짜 무서워요. 제가 2007년도에 ‘필로우맨’ 이라는 작품으로 7년 만에 무대에 섰어요. LG아트센터 대극장에서 했는데, 개뿔 자존심은 있어서 와이어리스 마이크를 안차고 했다가 개망신을 당했어요. 결국 3층을 폐쇄했죠. 대사가 안 들린다고 해서.

Q. 3층 폐쇄 대신, 와이어리스를 선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최민식: 개똥같은 자존심 때문이죠. 그때 혼난 뒤로는 연극이라는 게 기분으로 하면 절대 안 되는구나. 그만큼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구나, 다시금 절실하게 느꼈죠.

Q. ‘최민식 같은 배우도 무대가 무섭다?’ 후배들에게 일견 희망적인 이야기 같습니다.
최민식: 아, ‘대호’에서 친구로 나오는 (김)홍파가 실제로도 제 친구에요. 아직 ‘내부자들’을 못 봤는데, 그 영화에서 홍파가 죽였다면서요? ‘대호’에서는 능력에 비해서 작은 역할인데, 출연해줘서 고맙죠. 홍파하고는 무대에서 제대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50대 남자의 2인극!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50대 중년 남자들의 유머와 허망함과 그 주책스러움을 소극장에서 풀어내면 재미있을 것 같네요.
최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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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50대 남자들의 술자리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안주거리인가요?
최민식: 아휴~ 추접스러워요, 진짜. 별 이야기를 다 합니다. 창피해서 말을 못하겠네요. 하하하.

Q. 참. 최근 ‘올드보이’가 비할리우드 명작스릴러 1위로 선정됐더군요.
최민식: ‘올드보이’를 아직도 이야기해요? 사골도 아니고 참 오래도~ 허허허허. 아마 낙지 때문에 그럴 거예요. 낙지 씹어 먹는 장면 때문에 잔상이 남아서.

Q. ‘올드보이’는 매해 해외에서 명작으로 거론됩니다. 시간을 이겨낸 작품인 셈인데, 그런 소식을 들으면 어떠신가요?
최민식: 양날의 칼인 것 같아요. 인정받은 작품에 출연했다는 우쭐함이 있지만, 그 이미지가 배우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것도 그리 좋은 건 아니죠. 새로운 이미지와 창작에 집중해주길 바라는데, 잔상이 남아 있으면 그렇잖아요.

# “만드는 사람이 먼저 자체검열…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Q. ‘쉬리’ ‘명량’처럼 대중의 ‘응답’이 크리라 예상되는 작품도 있었지만, ‘헤피엔드’ ‘올드보이’ ‘악마를 보았다’처럼 과감한 선택도 많이 해 오셨습니다.
최민식: 대중이 좋아하는 트렌드를 쫓아 영화를 만든다? 참 어리석은 짓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올드보이’가 어떻게 나왔는지. 당시 박찬욱 감독하고 나하고, 지금은 ‘용필름’ 대표가 된 임승용하고 셋이서 ‘올드보이’ 원작만화를 보고 만났어요. ‘짱개방’에서 빼갈 마시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 서로 그랬어요. “이게 셰익스피어야 뭐야? 오이디푸스야?”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 “더군다나 상업영화판에서, 친딸하고(근친상간을)?” “누가 이런 영화에 돈을 대냐?”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데 어느 순간 화가 나는 거예요. ‘우리가 자체검열을 하고 앉아 있네?’ ‘우리가 스스로 통제를 하네?’ 이건 문제가 가장 심각한 거거든요. 만드는 사람이 자유롭지 못한 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올드보이’는 실제로 어려움을 겪었죠. 투자가 잘 안 됐어요. 돈을 댔던 사람도 빼 버릴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제가 왜 ‘올드보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최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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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트렌드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최민식: 아, 트렌드! 죄송해요. 제가 요즘 자꾸. 하하.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게 ‘트렌디하냐, 트렌드에서 벗어났냐’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핵심은 어떤 소재를 얼마나 진정성 있고 완성도 있게 만드느냐 인 것 같아요. 그래서 ‘올드보이’ 비유를 든 겁니다. ‘올드보이’는 전혀 트렌디한 소재가 아니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그 소재에 매료됐고 빠져서 열심히 만들었단 말이에요. 그게 소통이 된 거고요.

Q. 결과도 좋았고요
최민식: 그렇죠! 저는 그게 기본인 것 같아요.

Q. 머리보다 주먹이 앞서는 ‘양아치’도 연기하셨고, 잔인한 악역도 연기를 하셨습니다. 반면 ‘대호’의 천만덕은 삼류도 일류도 아닌, 자연의 순리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인물입니다. 쉰다섯을 앞둔 최민식의 삶은 어떤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 것 같나요.
최민식: 하, 술 마시면서 이야기해야 하는 걸. 하하하. 글쎄요. 모르겠네요. 아직은 제 삶을 돌아보며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여유는 없는 것 같아요. 대중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욕심이 자꾸 생겨요. 하고 싶은 일들이 자꾸자꾸 생각나고,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점점 많아지고 그래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래요. 그런 건 있습니다. 이를 테면 스스로에게 자꾸 질문은 하게 돼요. (혼잣말)아, 그게 나를 돌아보는 건가…. (탄식하며)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가다가 딱 멈춰 설 때가 있어요. ‘가만 있어봐.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뭣 때문에 이걸 하려고 했던 거지?’ 그럼 ‘여태까지 해왔잖아’는 것 밖에 답이 없더라고요. 괜히 합리화도 하게 되고, 의미부여도 하게 되고, 반성도 하게 되고, 우쭐하게도 되죠. 그러다보면 이야기를 만드는 것! 어떤 인물을 표현하는 것! 직업 자체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제대로 만들자!’는 강박도 생기고요. 그리고 ‘대중이 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하자는 마음이 생기죠.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는데, 내가 원하는 것들이 더 절실해집니다.

Q. 그렇다면 이전엔 어떠셨나요. 원하는 작업을 해 오지 않으셨나요?
최민식: 이전에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1년-2년 쉴 때도 있었죠. 제가 한 해에 다작은 안 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걸 제대로 해내고 싶거든요.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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