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윤준필 기자]
장희진02
장희진02


1956년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 OST로 사용된 노래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 이 스페인어 문장을 간혹 ‘될 대로 되라’고 번역하지만 정확한 의미는 조금 다르다. 노래 ‘케 세라 세라’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소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케 세라 세라.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진단다. 미래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야.”

2003년 MBC ‘베스트극장’을 통해 연기자로 데뷔한 배우 장희진은 꽤 오랫동안 대중에게 ‘신인 연기자’처럼 보였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좀처럼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 그랬던 장희진이 SBS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이하 마을)의 김혜진을 선택한 것은 ‘신의 한수’였다. 등장하는 신마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며 자신의 연기력을 과시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른 캐릭터에 비해 김혜진의 분량이 적다는 이유로 장희진이 ‘마을’을 고사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장희진은 자신의 진가를 보일 기회를 또 한 번 미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희진은 ‘마을’의 김혜진과 만났다.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진다고들 하지 않나. 케 세라 세라. 장희진은 언젠가 빛날 배우였다. 그리고 이제 막 지난 10여 년간 담아둔 빛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Q. 비슷한 시기에 방송된 MBC ‘그녀는 예뻤다’에서도 김혜진이 등장했다. 그 김혜진은 남자 주인공들한테 넘치는 사랑을 받았는데, ‘마을’의 김혜진은 굉장히 외로운 사람이었다.
장희진 : 다른 김혜진이 부러웠다. (웃음) 촬영하면서 ‘그녀는 예뻤다’에도 김혜진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그녀를 예뻤다’를 종종 봤다. ‘마을’ 기사 댓글에도 이름이 같단 말을 많이 하더라. ‘김혜진’이란 이름이 유행이냐고.

Q. MBC ‘밤을 걷는 선비’가 끝나기 무섭게 바로 차기작을 골랐다.
장희진 : 2014년에 SBS ‘세 번 결혼하는 여자’를 끝내고 본의 아니게 1년을 쉬었다. 연기에 대한 욕심이 많아진 탓에 다음 작품을 고르기가 쉽지 않더라.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니 나에 대한 관심도 수그러들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폭도 점점 좁아졌다. 쉬지 않고 작품을 빨리 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밤을 걷는 선비’를 하면서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는데, 끝날 때쯤에는 빨리 다른 작품을 하고 싶었다. 나한테 들어온 대본 중에 가장 내용이 좋고, 캐릭터가 좋은 작품이 ‘마을’이었다.

Q. 그런데 현장에서는 ‘카메오 배우’, ‘특별출연 장희진’이라고 불렸다던데? (웃음)
장희진 : 신이 많이 없다 보니 일주일에 한두 번 촬영장에 갔다. 일주일동안 다른 배우들에 비해 스태프들을 많이 못 보니까 다들 ‘카메오 배우’라고 장난을 치시더라. (웃음)

Q. 출연 분량은 ‘카메오 배우’ 급이었지만, 존재감은 어느 캐릭터 못지않았다.
장희진 : 내가 한회에 한두 신 밖에 안 나왔다고 하면 다들 “아닌데, 많이 본 것 같은데”라는 말을 해줬다. 적은 분량에 최대 효과를 보기는 했다. ‘마을’을 통해 분량보다 캐릭터가 좋으면 각인이 많이 되고, 많이들 사랑해주신다는 것을 느꼈다.

Q. 혹시 범인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장희진 : 워낙 감독님이 극비에 부치셔서 혜진을 죽인 범인은 나도 16회 대본을 받고나서 알았다. 대신 감독님께서 내 감정을 위해서 1회 때 윤지숙(신은경)이 엄마라는 사실만 저한테 알려주셨다. 그 외엔 전혀 몰랐다.

Q. 김혜진이란 캐릭터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
장희진 : ‘밤을 걷는 선비’를 끝내고 이 대본을 받았는데 내가 너무 좋아하는 작가님의 작품이기도 했고, 4회까지 스토리가 굉장히 신선했다. 장르물을 좋아하기도 했고. 사실 초반부 대본에 그려진 혜진의 모습은 기존에 내가 보여줬던 이미지의 연장선상이라 좀 망설였다. 하지만 연기 변신을 하겠다는 욕심보단, 좋은 배우들과 함께 작품을 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부담 없이 시작했다.

Q. 아무래도 김혜진이 앞뒤 설명 없이 과거 회상에서만 등장하다보니 시청자 입장에서는 혜진의 감정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알 길이 없다보니까.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그런 부분들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장희진 : 쉽지 않았다. 배우들은 다음 촬영을 위해 카메라 밖에서도 캐릭터의 감정을 유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혜진은 매 신이 회상으로 나오고, 매 순간이 반전이고, 사건이 벌어지고, 중요한 감정을 내비치다보니까 내게 어떤 신이 던져졌을 때, 이 신에서는 이런 감정을 취하는 것이 맞는지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혜진이 등장하는 장면은 중요한 장면이기 때문에 공들여서 촬영을 했다.
장희진03
장희진03
Q. 윤지숙이 엄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감정을 잡기가 애매했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엄마한테 하는 말 같고, 어떻게 보면 언니한테 하는 말처럼 보이려면 말이다.
장희진 : ‘애매하게’를 기준으로 잡았다. 내가 다음 대본을 받아보지 못한 상황에서 혜진의 어떤 사연이 담긴 신을 찍어야 했기 때문에, 그 신을 나중에 다시 돌아봤을 때 혜진이가 잘못된 감정을 잡고 있으면 안 되잖아. 그래서 신은경 선배와 촬영할 때는 이렇게도 느껴지고 저렇게도 느껴지게끔, 최대한 애매하게 보이는 것에 초점을 두고 촬영에 임했다.

Q. 11회에서 파브리병 합병증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안 혜진이 계단에 주저앉아 우는 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 장면에서 장희진이란 배우가 지금 김혜진에 젖어들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장희진 : 혜진의 상황이 극단적이고 딱하지 않은가. 나 역시 혜진이 처한 상황을 상상하면서 찍어야 했지만, 내가 일부러 어떤 감정을 만들진 않았다. 자연스레 촬영장에 가면 혜진이가 됐다. 혜진이의 안타깝고 불쌍한 상황들이 신 안에 잘 드러나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혜진이에 몰입이 됐던 것 같다.

Q. 마지막 회에서 윤지숙에게 떠나겠다고, 이별을 고하면서 “안녕, 엄마”를 말하는 장면도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장희진 : 엔딩에서의 그 대사는 내뱉는 것만으로도 너무 슬펐다. 일부러 슬프게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장면에서 윤지숙을 보고, 그동안 쌓아왔던 감정들을 섞고, 대사를 뱉는데 감정이 만들어지더라. “안녕, 엄마”를 말했을 때는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김혜진이란 인물에 나도 모르게 많이 몰입이 돼 있었나보다.

Q. 이런 명장면들을 보면서 “장희진이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연기자였나”하고 많이 놀랐었다. ‘마을’을 하면서 이런 말들 많이 듣지 않았나?
장희진 : 주변에서 연기가 는 것 같다는 말들을 많이 해주셨다. 하지만 내 연기가 늘었다기보다는, 혜진이란 캐릭터가 가진 다양한 매력들과 그 외로운 상태가 대본에 잘 드러나 있었다. 내가 한 번도 감정을 굳이 만들지 않아도 몰입이 될 수 있게끔 대본이 잘 쓰여 있었다.

Q.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장희진의 눈이 혜진의 슬픔을 더 돋보이게 만든 것은 아닐까?
장희진 : 혜진이 언제든 울 상황이기도 했고, 나도 이전에 했던 다른 캐릭터에 비해 많이 동화된 것도 있었다. 상황은 너무 다르고, 내가 겪어보진 않았지만 혜진의 외로움이 잘 느껴졌다. 내가 맡은 역할이었지만 위로해주고 싶었다.

Q. 왜 다른 캐릭터에 비해 많이 동화됐을까? 혹시 외로웠나?
장희진: 내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좋은 일을 하면서 지내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외롭지 않나. 또, 여배우로 살면서 느끼는 외로움도 분명히 있고. 그런 점에 있어서 혜진이의 극도로 외로운 마음과 통했던 것 같다.

Q. 왜 이제야 이렇게 좋은 캐릭터가 장희진을 찾아온 걸까? (웃음)
장희진 : 그러게 말이다. (웃음) 사실 그런 마음보다 ‘밤을 걷는 선비’를 하면서 힘들었다는 이유로, 분량이 적다는 이유로 ‘마을’을 고사했더라면 어쩔 뻔했나 싶다. 굉장히 후회했을 것 같다.
장희진01
장희진01
Q. 김혜진 뿐만 아니라 ‘마을’에는 빼놓을 캐릭터가 하나도 없었다.
장희진 : 작가님이 소중하게 쓰신 그 캐릭터들을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이 맡아서 연기하니 그렇다. 감독님이 오직 연기력만 보고 각 캐릭터를 뽑으셨다고 그러더라. 그래서 그런지 배우들이 다들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분들이었다.

Q. 그런 좋은 배우들과 극중에서 많이 마주치지 못해서 아쉬움이 클 것 같다.
장희진 : 아쉽다. 선배님들이 쫑파티때 내게 연극을 해볼 생각 없냐고 권유도 많이 해주시더라. 나도 물론 기회가 된다면 연극이나 뮤지컬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다. 그런데 내가 아직은 무대 공포증이 있다. 생방송처럼 무대에서 서서 해야 하는 연기는 무서워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같이 하자고 말씀드렸다.

Q. 적은 분량에도 워낙에 큰 활약을 하지 않았나. 혹시 질투하는 사람들은 없었나? (웃음)
장희진 : (웃음) 나조차도 이렇게 좋은 환경과, 김혜진 같은 캐릭터를 또 만날 수 있을까 싶다. ‘마을’의 이야기 자체가 혜진을 죽인 범인을 찾는 내 존재감이 없을 순 없었다. 작품을 선택하기 전, 분량은 없어도 어느 정도 존재감은 있을 거란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내가 한두 신밖에 나오지 않아도 1시간 내내 날 본 착각들을 할 진 몰랐다.

Q. 혜진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다들 김혜진만 찾으니까.
장희진 : 맞다. (웃음) 내가 선택하길 잘했다.

Q. ‘마을’이 가족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보니 가족 생각도 많이 났을 것 같다.
장희진 : 난 엄마 아빠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자랐다. 화목한 가정 안에서 살고 있고. 그래서 가족의 소중함을 잘 몰랐었는데, 이번 작품을 통해 엄마 생각도 많이 하고, 가족에 대한 소중함도 많이 느꼈다. 나중에 엄마 아빠의 잔소리를 들을 수 없으면 되게 슬퍼지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앞으로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Q. ‘마을’ 시청률이 높지 않았던 이유로 ‘귀신 김혜진’을 지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희진 : 실제로도 내가 귀신으로 등장하면 순간 시청률이 뚝뚝 떨어졌다고 한다. 감독님도 “우리가 장르물이긴 하지만 네가 나오면 사람들이 채널을 돌리는데 어떡하냐”고 하시더라. 그런 반응들이 충분히 이해됐다. 그래서 수위가 좀 조절된 부분들이 있다. 처음엔 피도 묻히고, 귀신 분장도 했었는데 그냥 하얀 원피스를 입고 나오는 걸로 바뀌었다. 덕분에 신비스러워지고, 서정적인 부분이 가미돼서 난 좋았다. (웃음)

Q. 윤지숙이 운전하는 차 창문 밖으로 갑자기 등장했을 때 정말 무서웠다.
장희진 : 보통 그런 무서운 장면들은 음향으로 예고를 해주는데 그 장면은 그런 것도 없이 갑자기 내가 튀어나온 것 아닌가. 그 장면에선 나도 놀랬다. 내가 찍은 거였는데 까먹고 있었다가, 내가 내 모습에 정말 크게 놀랐다.
장희진04
장희진04
Q. 시청률은 높진 않았지만 ‘마을’ 출연진들을 모두 의미 있는 드라마에 출연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
장희진 : 시청률은 처음부터 내려놓고 해서 오히려 시청률이 잘 나오면 우리가 놀랐다. 대본 리딩 때부터 감독님이 “처음부터 시청률에 연연하기 보단 얼마나 잘 만들고, 얼마나 새로운 것을 시도를 하느냐에 의의를 두고 작업하는 거에 만족하자” 이야기하셨다. 배우들도 그런 것들을 알고 시작했고, 지금에 와서는 시청률보다 더 큰, 그 이상을 얻은 것 같다.

Q. ‘그 이상’이 무엇이고, 어떤 것들을 얻었는지 설명해줄 수 있을까?
장희진 : 미디어나 인터넷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더라면 시청률이 낮았던 것을 아쉬워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시청률에 비해 큰 관심을 가져주시고, 기사 댓글을 보면 좋은 말들이 가득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한 번 ‘마을’을 보신 분들은 끝까지 드라마를 놓지 않고 계속 보시는 걸 보면서 시청률이 작품의 전부는 아니란 것을 알았다.

Q. ‘마을’은 여러모로 배우 장희진의 연기 인생에 기점이 되는 작품이 될 것 같다.
장희진 : 소중한 작품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랑을 주실 거라 예상을 못했는데, 너무나 큰 사랑을 주셔서 감사드린다.

Q. 케이블채널 올리브TV ‘아바타 셰프’에 출연해서 굉장히 승부욕 넘치는 모습도 보여주던데, 예능에 출연해 볼 욕심은 없나?
장희진 : ‘아바타 셰프’는 혜진이가 워낙 분량이 없고, 노는 날이 많아서 잠깐 찍고 온 거였다. (웃음) 예능은 필요하다고 느끼긴 한다. 나를 솔직하게 보여줄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하지만 아직은 예능이 좀 낯설고, 또 출연하게 되면 잘해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다. ‘아바타 셰프’처럼 내가 뭔가를 하지 않아도 어떤 상황 안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는 예능이라면, 또 출연할 수 있을 것 같다.

Q. ‘마을’에서 혜진은 유나와 바우랑 같이 소원을 담은 타임캡슐을 만들었다. 지금 장희진의 소원을 담은 타임캡슐을 만든다면 어떤 것을 그 안에 담고 싶은가?
장희진 : 20대에는 일이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크게 남는 게 없더라. 주변을 살피고, 서로 챙기면서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일에 대한 집착을 많이 내려놨다. 이제는 나를 괴롭히면서 살지 않고, 죽을 때까지 열심히, 행복하게 살고 싶다. 타임캡슐을 만들면 소중한 사람들과의 행복한 기억을 담겠다. 내 미래의 남편이라든가, 친한 친구들과의 모습을 혜진이처럼 사진에 담아 타임캡슐에 넣으면 좋을 것 같다.

윤준필 기자 yoon@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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