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뢰한’ 전도연-김남길
‘무뢰한’ 전도연-김남길
‘무뢰한’ 전도연-김남길

[텐아시아=정시우 기자](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영화 ‘무뢰한’은 김남길의 뒷모습으로 시작해서, 그의 앞모습으로 닫는 영화다. 영화는 남자의 뒷모습을 통해 물음표를 던지고 클로즈업된 앞모습을 통해 느낌표…가 아닌 말줄임표를 남긴다. 영화는 끝끝내 이 남자의 진심을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뢰한’은 엔딩 크레딧이 올랐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영화인지도 모른다. 극장의 어둠 밖으로 나왔을 때 더더욱 시린 감정에 사로잡히는 영화인지 모른다.

# 서로에게 약점인 사랑

이야기는 복잡할 게 없다. 검거를 위해 접근한 살인자의 여인에게 흔들리는 형사의 이야기다. 줄거리만 보면 ‘빤한’ 통속극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영화 속 주인공들(형사들)이 금기의 문(살인자의 여자) 앞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던가. 여자는 난처해지고, 남자는 비참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무뢰한’은 하드보일드 멜로라는 장르의 태생적 본능에도 불구하고 ‘어깨에 과한 힘’을 주지 않는다. 스스로가 허용한 음습한 공기 안에서 숨죽이며 고요히 거닐다가, 기어코 보는 이의 마음을 흠뻑 적시고야 만다. 스산한 새벽, 여민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잔잔한 가을바람 같다.

이 영화에서 그 여자 김혜경(전도연)과, 그 형사 정재곤(김남길)의 마음은 배회하고 떠돈다. 정재곤이 김혜경의 곁에서 염탐해야 하는 것은 살인자 박준길(박성웅)이지만, 정작 그는 김혜경의 마음을 해독해내려 전전긍긍한다.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땀, 그녀가 손에 쥔 소주 잔, 미묘하게 흔들리는 눈빛, 어쩐지 나를 원하는 듯한 말투. 젠장, 도대체 이 여자가 궁금하다. 정재곤에게 김혜경은 ‘나와 너무 닮아서 끌리지만, 또 그래서 밀어내고 싶은 여자’다. 이성과 마음의 괴리 앞에서 정재곤은 머뭇거리다 분노하다 한숨짓는다.

어쩌면 그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반짝이다-부식되고-소멸하는 흔한 사랑이 아닌, 끝까지 자기 자신을 속이며 어슬렁거리는 사랑. 정재곤의 첫 등장 장면을 영화 맨 마지막에 가져다 배치해도 이상하지 않겠다고 느낀다면 이 때문일 아닐까. 도돌이표 같은 삶을 살아내는 정재곤은 김남길을 만나 더 고독해지고 더 깊어졌다. 이 영화에서 김남길은 과한 에너지를 발산하기보다는 누르고 누르고 누르다가 필요한 순간 슬며시 단도를 꺼낸다. 삐딱하게 거리를 걷고, 초점 잃은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고. 그의 팬이라면 10년 전 세상에 나온 ‘후회하지 않아’의 재민(김남길)을 호출하게 될지도 모른다.

# 전도연, 주름마저 아름다운!

그리고 전도연이다. 아니, 그러니까 전도연이다. 이 영화의 중심에 전도연이 있다. 전도연은 김혜경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듯 보인다. 조금만 더 오버하거나, 조금만 더 순수해도 설득력을 잃을 혜경이라는 인물을 전도연은 몸으로 껴안아 살아내는 듯 보인다. 전도연은 눈코입뿐만 아니라 얼굴근육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뺨에 들러붙은 젖은 머리카락마저도 그렇다. 무엇보다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그 나이 때 여배우들이 인위적으로 지우는, 입가에 살짝 그어진 주름이 전도연의 존재감과 아름다움을 오히려 부각시킨다. 배우란 이런 것이다. ‘밀양’ 당시 ‘연기의 절정을 찍었다’ 평가받았던 이 여배우는 그러한 시선을 뒤로한 채 여전히 새로운 연기기 영역을 탐험하는 중이다.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또 한 명, 오승욱 감독이다. 사실 대중적으로 아주 잘 알려진 감독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충무로에서 존경받는 감독이다. 자신만의 색깔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고, 그것을 밀어붙이는 몇 안 되는 연출자이기 때문이다. 15년 전 내놓은 그의 영화 ‘킬리만자로’가 아직도 회자되는 이유일 것이다. 이 영화에는 오승욱 감독의 소유격으로 보이는 은유들이 넘실거린다. 재곤이 혜경에게 남기고 간 귀걸이, (혜경의 남자)준길과 재곤이 야밤에 벌이는 흡사 ‘동물의 싸움’과도 같은 몸 부딪힘 하나하나엔 이유들이 다 있다. 자칫 빤할 수 있는 이야기를 인물의 정서에 밀착해 집중력 있게 밀고나가는 것은 배우들의 역량과 감독의 저력이라 생각한다. 단언컨대 ‘무뢰한’은 얄팍한 상업영화들과 결이 다르다. 사실, 지금 우리에겐 이런 영화가 필요하다.

글. 정시우
사진. ‘무뢰한’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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