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현 미술감독
박일현 미술감독
[텐아시아=정시우 기자]한국영화 프로덕션 디자인의 역사는 아마도 박일현 미술감독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할 것이다. ‘프로덕션 디자이너’라는 이름조차 생소한 시절에 충무로에 입성한 박일현 감독은 한국영화 미술과 함께 성장했다. 아니, 영화의 빈 공간에 감성을 불어넣으며 한국영화 미술의 발전을 이끌었다. 박일현 미술감독의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디어와 집념은 20년 여년이 지난 지금도 들끓는다.

‘무뢰한’ ‘허삼관’(2014) ‘군도:민란의 시대’(2014) ‘감기’(2013) ‘타워’(2012) ‘알투비’(2012) ‘아이들’(2011) ‘방자전’(2010) ‘화려한 휴가’(2007) ‘열혈남아’(2006) ‘조폭 마누라3’(2006) ‘싸움의 기술’(2005) ‘주먹이 운다’(2005) ‘슈퍼스타 감사용’(2004) ‘맹부삼천지교’(2004) ‘오! 브라더스’(2003) ‘일단 뛰어’(2002)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 ‘봄날은 간다’(2001)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0) ‘킬리만자로’(2000) ‘쉬리’(1999) ‘박하사탕’(1999)

Q. 어떻게 이 길에 들어서게 됐나.
박일현:
90년대 중반에 무대미술에 관심 있는 친구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 모임을 통해 공연무대 및 CF 관련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나는 영화미술에 특히 관심이 있었는데, 그 모임에서 같은 비전을 꿈꾸는 동지를 한 분 만났다. 할리우드 영화와 일본 애니메이션, 그리고 프랑스 누벨이마주에 심취했던 우리는 그 영화들의 미술을 이야기하고 동경하며 함께 충무로 영화미술에 발을 담그게 됐다. 내가 미술감독을 꿈꾸게 된 데에는 그 분의 영향이 컸던 셈이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 분은 얼마 뒤에 비극적인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무겁고 아프다.

Q. 일을 시작하고 예상했던 것과 달랐던 것도 많았을 텐데.
박일현:
내가 충무로에 들어선 당시가 영화에 프로덕션디자인 시스템이 도입된 초기였다. 노하우 부족의 한계와 충무로의 영화미술에 대한 이해 부족, 열악한 제작환경 속에서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일 정도였다. 그러나 초창기 미술감독들이나 구성원들의 열정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영화미술의 고민들을 풀어나갔고, 그와 함께 한국영화미술도 조금씩 실험되고 발전되어 나갔다. 그런 것들을 바라보며 나 또한 이 일을 계속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허삼관’ 마을광장(위), 평화의원채혈실
‘허삼관’ 마을광장(위), 평화의원채혈실
‘허삼관’ 마을광장(위), 평화의원채혈실

Q. 미술감독으로서 성장하는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작품 혹은 사람이 있다면.
박일현:
‘킬리만자로’(2000년)와 이를 연출한 오승욱 감독님.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 당시 이 분은 시나리오를 작가셨다. 그때 인연으로 ‘킬리만자로’를 함께하게 됐다. ‘킬리만자로’는 그 당시에나 지금이나 미술로 표현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작품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 등장인물들의 실존적이며 황량한 정서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다. 다행히 미술을 전공한 오승욱 감독님이 예술과 문학에 굉장히 박식하시다. 그 분과 나눴던 바로크미술과 독일표현주의, 고전영화 이야기들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작품을 하며 한국영화미술의 관습적인 부분들에 대해 많은 생각하게 됐고, 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시절 나에게 가장 영향을 준 선배님이다. 올해 개봉하는 감독님의 두 번째 연출작 ‘무뢰한’(전도연, 김남길 주연)도 함께 작업했다.

Q. 여러 감독님들과 작업 했는데, 역시 가장 자극이 됐던 분은 오승욱 감독님인가.
박일현:
모든 감독들은 미술감독에게 자극을 준다. 그 중 ‘감기’(2013)의 김성수 감독님을 특별히 언급해야 할 것 같다. 내가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느낀 시기에 만난 작품이 바로 ‘감기’다. 사실 오래전 김성수 감독임의 데뷔작 ‘런어웨이’(1995)에서 내가 세트디자인을 했었다. 당시 그 분은 엄청난 열정과 카리스마가 넘치셨고, 후배들에게는 무척 어려운 분이셨다. 특히 내 경우엔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어설펐던 실력으로 이래저래 혼나기도 많이 혼났다.(웃음) 세월이 지나고 영화 ‘감기’의 미술 의뢰가 왔을 때 전설적인 선배님과 작업한다는 게 너무 뿌듯하고 기쁘면서 한편으론 예전 기억에 두려웠다.(웃음) 다시 만난 그 분은 여전히 열정과 카리스마가 넘쳤다. 그리고 미술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감기’를 통해 다시 한 번 이 일을 리마인드 할 수 있었다.

Q. 최근 작업한 ‘허삼관’ 하정우 감독의 경우, 본인이 화가이기도 하고 미술에 관심이 많은데 어땠나.
박일현:
하정우 감독은 아티스트로서 감각과 표현이 매우 뛰어난 분이다. 미술 스타일에 항상 열려있기 때문에 미술감독의 방향을 주의 깊게 받아들이고 본인의 원하는 바를 명확히 전달하는 보기 드문 감독이다. 표현하고자 하는 지점의 눈이 매우 높다. 현장에서 포착한 순간의 느낌을 중시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기에 미술감독 입장에서는 까다로운 감독이기도 하다. 하지만 덕분에 표현의 결과가 언제나 멋지게 나온다. ‘허삼관’은 개인적으로도 매우 즐겁게 작업한 영화다.

‘군도’ 산채 본부(위) 산채마을전경 컨셉아트
‘군도’ 산채 본부(위) 산채마을전경 컨셉아트
‘군도’ 산채 본부(위) 산채마을전경 컨셉아트

Q. 감독의 니즈와 예산상의 제약이 충돌할 때 어떻게 풀어나가나.
박일현:
다각적으로 풀어간다. 먼저 감독이 원하는 방향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린다. 이것을 토대로 관련 파트와의 회의를 통해 규모를 정하고 프로듀서와 이야기 하는데, 이때 종종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럴 땐 영화상 비중 있는 부분과 덜 비중 있는 부분을 고려해서 절충안을 만들기도 한다. 그 이후 다시 감독과 협의를 하고, 협의된 사항을 가지고 세트 제작 파트, 소품 파트 등과 조율해 나간다. 이 과정은 항상 겪는 일이지만 매번 매우 고통스럽다.

Q. 작업물 중에 ‘잊기 힘든 장면’이 있다면.
박일현:
너무 많지만 그 중 하나를 뽑으라면 ‘군도: 민란의 시대’(2014)의 산채를 잊을 수 없다. 산채는 영화에서 군도무리들이 지내는 마을인데 현실세계의 핍박과 수탈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어온 군도 무리들의 이상향 같은 공동체다. 군도무리의 연대와 삶을 보여주는 공간이고 나중에는 지배세력에게 처참히 파괴되는 공간이기에 영화 속에서 매우 중요했다. 산채에 어울리는 공간을 찾는 게 관건이었고, 전국을 찾아 헤맨 끝에 강원도 영월의 산속 폐광 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5개월에 걸친 공사를 거쳐 영화 속 산채가 완성됐다.

Q. 영화에서 산채가 처음 등장할 때, 흡사 그림 한 폭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박일현:
신세계 같은 공간으로 표현하려고 공을 많이 들였다. 깊은 산중 거친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최대한 경사지게 마을을 구성했다. 토목공사를 통해 약 45도 경사의 150m 길이로 난 마을길과 광장을 만들고, 양 옆으로 30여 채의 건물들을 돌을 쌓아 만든 축대위에 앉혔다. 사방 100m 연병장과 취사건물들은 또 따로 만들었다. 약 열흘 동안의 산채 습격장면을 찍을 때는 경사면 때문에 모든 출연진과 스태프들과 말들이 힘들어했지만, 그로인해 역동적이고 멋진 액션 장면이 담겼다고 생각한다.

‘감기’ 탄천수용캠프(위) 살처분장 컨셉아트
‘감기’ 탄천수용캠프(위) 살처분장 컨셉아트
‘감기’ 탄천수용캠프(위) 살처분장 컨셉아트

Q. 미술디자인에는 시대고증-장소찾기-디자인-실계 등 다양한 과정이 있을 텐데, 어느 과정이 가장 고통스러운가, 혹은 가장 재미있나.
박일현:
시대극과 사극의 경우, 자료조사를 통한 시대적 고증과 이를 반영한 현실적 상상이 작업의 기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미술을 어떤 방향으로 바라볼 것인가’이다. 이 방향성을 정할 때가 가장 어렵고 신중하며 까다롭다. 미술의 방향이 정해지면 이후 디자인 및 실제 시공에 들어간다. 어려움도 많지만 결과물들을 통해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

Q. 빅일현만의 ‘비장’의 무기가 있다면.
박일현:
함께 일하는 팀원들이다. 그들에게 미술적 관점을 제시하고 그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며 미술에 반영한다.

Q. 미술감독에게 가장 요구되는 자질은 뭐라고 생각하나.
박일현:
보편적인 감성을 남다른 관점으로 표현해 낼 줄 아는 것.

Q. 현장에 가장 먼저 나와서 가장 늦게 들어가는 게 미술팀이지 않을까 싶다. 이런 현장에서 오랜 시간 버틴 비법은?
박일현:
처음부터 이 일이 놀이처럼 무척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계속 이 일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앞으로도 그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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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아시아=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허삼관’ ‘군도’ ‘감기’ 컨셉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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