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직장인의 일상은 고리타분하고 빤한 것이라 여겨져왔다. 드라마는 실장님에서 재벌2세, 전문직 급기야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외계인이나 초능력자들에 스포트라이트를 주기 바빴지만 정작 우리 주변에 그렇게나 많은 월급쟁이, 즉 회사원들의 일상은 구태여 공들여 묘사하지 않았다. 그것은 틀에 박혀있으며 따분하고 늘 쳇바퀴를 맴도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침내 tvN 드라마 ‘미생’이 열어젖힌 회사원들의 일상은 결국 연애나 하는(물론 연애가 세상 가장 어려운 일이 된 세상이지만) 재벌2세나 전문직, 외계인의 그것보다 더 스펙타클했다. 평범한 밥벌이는 그토록이나 치열하더라. 매일 얼굴을 맞대 지겨울 것이라 여겨졌던 회사 동료 선후배들과의 관계 속에도 규정할 수 없는 수천개의 감정들이 피어났다. 그 일상을 자근자근 쪼개어 건져올린 ‘미생’은 마치 공기의 소중함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순간처럼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무겁고 고단하며 또한 신성한 것인지를 돌이키게 해주었다. 그러니 대한민국 샐러리맨들이 이 드라마에 환호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내 밥벌이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었으니.
최귀화
최귀화
그의 축 처진 두 어깨만큼 애잔한 장면도 없었다. 직장인의 애환을 현실감 있게 그렸다는 평을 듣는 케이블채널 tvN 드라마 ‘미생’에서 배우 최귀화는 보통의 샐러리맨들의 마음에 잔잔한 위로를 안겼다.

마냥 사람만 좋은, 그래서 거래처 사정에 다 맞춰주고서도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는커녕, ‘그래도 되는 사람’ 취급을 받고 회사에서는 무능력하다 낙인찍히고 만 박대리. 안락한 휴식이 되어야 할 가정 또한 가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목을 옥죄어 온다. ‘과연 내 인생이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문득문득 고민들이 불거져 나오지만, 도무지 내려올 수 없는 레일 위에 놓인 듯 한 인생을 사는 박대리는 꿈도 자존감도 잃어버린 채 무작정 하루를 버텨야하는 샐러리맨들의 공감을 얻는 캐릭터였다. 여기에는 박대리의 애잔함을 고스란히 표정과 두 어깨에 담아낸 배우 최귀화의 공도 컸다.

최귀화.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 ‘해무’, ‘마담 뺑덕’까지 최근의 화제작들이 모두 포함된 그의 필모그래피는 꽤 화려하지만, 소같은 애잔한 두 눈동자가 대중의 뇌리에 박힌 것은 역시 드라마 ‘미생’이다. 영화에서 주로 단역을 맡아왔던 최귀화는 ‘미생’에 캐스팅된 이야기를 하며 잔잔한 음성 가운데서도 흥분감을 온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스스로는 갈팡질팡 삶에 자신이 없는 박대리와 자신이 많이 닮아있다고 말하지만, 매일 밤 잠들기 전 이루지 못한 꿈을 되새기며 행복하게 잠든다는 최귀화는 박대리와 다른 당당한 어깨를 갖고 있었다. 드라마 속 박대리가 극 말미 비로소 갖게 된 날개는 배우 최귀화의 어깨에서도 당당하게 돋아날 준비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최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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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미생’의 박대리 편 방송 이후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체감했나.

최귀화 : 아직 실감이 안 난다. 다만 전화를 많이 받았다. 식구들도 참 많은데, 4남 3녀 중 막내다. 누나가 직장에서 나 때문에 스타됐다고 고맙다고 전화가 왔다.

Q. ‘미생’ 이전까지는 많은 대중이 알지 못하는 배우였다. 캐스팅 과정을 들려달라.
최귀화 :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에서 감사하게도 큰 역할에 캐스팅 돼 준비 중인 상태였는데, 캐스팅 디렉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가 출연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일대일’을 보고 연기가 좋았다며 보자고 하셨다. 막상 보시더니 할 만한 것이 없겠다고 하시기에 단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전까지는 원작도 몰랐고 드라마가 어떤 내용인지도 알지 못했는데 대본을 보고 난 순간 너무나 간절해졌다. 대본이 굉장히 좋더라. 하지만 할 수 있다고 또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니니 기다릴 밖이었다. 이후 박대리 역에 캐스팅이 확정되고도 ‘곡성’ 촬영 스케줄과 겹치면서 또 한 번 포기해야하는 상황이 왔다. 하지만 촬영 며칠 전 급작스럽게 연락이 왔고, 결과적으로는 할 수 있게 됐다.

Q. 그렇다면 ‘곡성’ 촬영 와중에 ‘미생’ 촬영에 들어간 것인가.
최귀화 : 우여곡절이 있었다. ‘곡성’ 때문에 머리를 기르고 있엇는데, ‘미생’ 감독님은 머리를 자르라고 하시더라. 난감했는데, ‘곡성’ 쪽에서 양보를 해주셨다. 너무 감사하고 너무 죄송하다. 그렇게 겹치게 되면서 일정은 빠듯해졌다. ‘곡성’ 일정을 소화하고 곧바로 ‘미생’을 찍으러 가는 스케줄이었다. 산속을 뛰어다니다가 ‘미생’ 현장에 오니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갔다. 잠도 못자서 비몽사몽 하는 와중에 연기를 해서 그런지 많이 아쉬웠다. 시선처리도 엉망이고, ‘조금만 정신차릴걸’ 후회가 들더라.

Q. ‘미생’은 대중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연기력이 대단한 연극배우들이 조단역에 캐스팅이 되어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아주 작은 역할의 배우들의 연기에도 깊이가 느껴진다.
최귀화 : 그렇다. 캐스팅이 어마어마하다. ‘미생’의 최길홍 캐스팅 디렉터분이 주로 섭외를 해서 감독님의 컨펌을 받고 투입시켰다 들었는데, 이 분이 드라마 쪽에서 캐스팅 잘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얼굴 알려진 사람들 외에 실력 있는 배우들에 대한 정보가 상당한 분이다.

Q. 박대리 이야기를 해보자. 그의 이야기에 공감을 했나. 사실 직업 배우로서는 회사원의 심정을 디테일하게 알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최귀화 : 오히려 100% 공감했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어떤 역보다 몰입은 잘 됐다. 드라마에는 편집된 신이 다섯 신 정도가 있는데, 박대리의 입장에서는 큰 이야기였다. 아이 학원비로 인한 아내와의 갈등, 이직에 대한 고민, 새로운 삶을 살아보느냐 마느냐에 대한 심적 갈등들이 있었는데 편집이 많이 됐다. 아무튼 그 장면이 지금 딱 내 상황과도 맞닿아있어 공감됐다. 나 역시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이고, 아이 교육에 대한 고민도 커지는 시기다. 또 이렇게 살면서 배우로 계속 살아가도 되는 것인가 고민도 하던 시기였고.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해본 사람 중에 한 명일 것이다. 작년에 ‘군도’ 촬영 끝나고는 지하철 역 안에서 군고구마도 팔았다. 새벽에는 주먹밥 팔면서 몇달을 나기도 했다. 그러니 늘 삶에 치여 있고 주눅 들어 있고 을의 상태인 나와 박대리의 상황은 맞닿아있는 면이 넓었다.

최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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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배우로 살아왔다는 것은 당신 자신에게 주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텐데.

최귀화 : 글쎄, 만족감이라고 해야할까. 배우로 유명해지고 안 유명해지고가 아닌, 인정을 받느냐 못받느냐의 부분에 있어서 만족감은 있었다. 그러니까 업계 안에서는 결국 능력있는 사람들을 찾게 되는데 누군가 나를 찾아주고 연기 잘 한다 이야기를 해줄 때 만족감이 들고 계속 이 삶을 이어나갈 용기를 받게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내가 계속 할 수 있을까’, ‘한 작품 끝나고 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해야하는데, 이제 곧 마흔인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라는 고민을, 실은 매일 매 순간 한다.

Q. 데뷔한 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최귀화 : 1996년도에 경기도 부천의 믈뫼극단에 들어갔다. 이후 1997년도 연극으로 데뷔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을 하다 늦깎이로 대학을 가게 됐다. 돈도 없고 해서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때에 장학제도가 좋은 대진대에 특기장학생으로 선발이 됐다.

Q. 데뷔작으로 연극제에서 수상도 했다. 시작이 좋았다.
최귀화 : 데뷔작으로 단체상도 받고, 신인상도 받았다. 그때는 참 내가 뭘 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늘 극단에 있었다. 오래된 극단이라 고서도 많았는데 늘 책보고 청소했다. 선배들은 늦게야 오니까 밥도 해놓고 찌개도 끓여놓으며 기다리기도 했다. 해 넘어가면 연습하고 새벽에 끝나면 집에 가는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고 그렇게 살았다.

Q. 훨씬 더 이전, 배우가 되기까지의 학창시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달라.
최귀화 : 고등학교 때 시골에서 서울로 전학을 왔다. 원래는 전라도 법성 출신이다. 누나가 시집을 부천으로 갓다. 중학교 졸업하고 무턱대고 누나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시골에서만 자랐기에 대도시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냥 시골이 싫었다. 누나에게 피해가 된다며 말리는 부모님 반대에도 올라오게 됐다.

Q. 그러다 그 시절 연극을 접하게 된 것인가.
최귀화 : 정확하게는 연극이 아니라, 극단이었다. 학교 끝나고 걸어가는데 전봇대에 단원 모집 포스터가 붙어있더라. 성격이 소심해서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보고 번호를 외워 집에 가서 전화했다. ‘나이가 어떻게 되냐’고 하기에 답했더니 ‘학생은 안 뽑는다’ 하셨다.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하니 또 와보라더라. 다음 날 갔다. 아직도 생생한 장면이다. 한 겨울 극단의 대표님은 화가들이나 쓰는 동그란 모자를 쓰며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난로에는 찌그러진 노란 주전자가 놓여 있었고 김이 올라왔다. 목소리를 깔며 ‘어서 와요’ 하시더라. 그렇게 시작됐다. 특별한 계기는 지금 생각해보아도 없었다.

Q. 낯선 환경이 주는 자극도 있었을 것이다. 전학을 오고난 뒤, 인생의 막대한 선택을 한 셈이니.
최귀화 : 전학 오고 얼마 되지 않아 외롭기도 하고 친구도 없어서 그랬던 것도 있다.

Q. 누나의 반대도 심했을 텐데. 어린 동생의 장래에 책임감을 느꼈을 법한 상황이다.
최귀화 : 하지만 공부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익히 알고 계셨기에(웃음). 그렇지만 누나도 매형도 걱정을 참 많이 했다. 극단에서 집까지 6~7km의 거리를 늘 걸어 다녔는데 어느 날은 누나가 가로등 밑에 서서 나를 기다리며 ‘너 왜 걸어 다녀!’ 라고 하더라. (최귀화는 이 말을 하던 중 순간 울컥,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그는 감정을 추스른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 누나는 연극하는 것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 하라고 말해주었다.

Q. 그 누나는 지금 당신의 열렬한 팬 1호가 되었다.
최귀화 : 정말 그렇다. 누나가 인터넷 기사들을 보면서 ‘내 동생, 스타됐다’며 너무나 좋아한다.

Q. 짐작건대, 부천으로 와서는 말수가 줄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지방출신들이 사투리 때문에 그렇게 변한다.
최귀화 : 나는 전라도에서도 말이 없었다(웃음). 워낙 소심하고 말이 없어서 극단에서도 별명이 ‘안녕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였다.

Q. 그런데 무대에 서고 연기를 하게 된다.
최귀화 : 처음에는 1년간 스태프로 일하면서 청소만 열심히 했다. 그러다 대표님이 모노극을 하는 것을 극장에서 보았다. ‘이런 것이 있었구나’ 싶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연극이다. 조명, 음향에 대한 개념도 그때야 알게 됐다. 그렇게 어깨너머로 연기를 배웠다. 아니, 어깨너머가 아니다. 관객이 별로 없었기에 늘 객석 중앙에 앉을 수 있었다(웃음).

최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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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렇게 연극무대에 주로 서오다 영화와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하게 된다.

최귀화 : 지금의 대학로는 주로 연애 이야기를 하기에 내가 설 무대가 많지 않다. 오디션 자체에 나가봐도 부르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몇 달을 놀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배우로 살면서 고정적인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없는 것이 잠깐 오디션을 다녀오려면 역시 일용직 밖에 선택이 없다. 그나마 마음은 그게 편하니까 말이다.

Q. 영화는 언제부터 하게 됐나.
최귀화 : 내 첫 상업영화는 옴니버스 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서 김지운 감독님이 연출하신 ‘천상의 피조물’이다. 2006년에 촬영을 했는데 개봉이 되기까지 시간이 꽤 흘렀다. 안타까운 것은 병상에 오래 누워있던 어머니에게 꼭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개봉이 미뤄지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도 너무 속상하다.

Q. 그 슬픔을 극복하고서 여기까지 왔다.
최귀화 : 그렇지만 어머니가 돌아간 순간에는 정말 연기를 그만두고 싶었다. 부산에서 연극할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제작진에 이야기를 해 부랴부랴 내려갔는데 그 길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전라도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부모님 마지막 가시는 길도 못 지켜드리면서 할 만한 대단한 것인가’ 싶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버스타고 올라와서는 한 달 정도 그냥 있었다. 공연에 다시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를 웃기는 역할로 무대에 설 자신도 없었다. 연극하면서 선배들이 ‘부모님 가시는 것도 못보고 무대에 섰다’라는 말을 많이 하셨는데, 그런 일이 내게 생길 줄은 상상도 못했다. 가슴이 아팠다.

Q. 그럼에도 연기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분명 많았을 것이다.
최귀화 : 아직 갈 길이 멀고 할 것이 많지만 나는 자기 전에 눈을 감고 생각한다. 대종상 레드카펫을 걸어가는 꿈도 꿔보고 시상식에서 어떤 말을 할까라는 생각도 한다. 믈뫼 대표님 생각부터 내 모든 필모그래피들에 대한 기억이 스쳐지나가면서 행복하게 잠든다.

Q. 결국 동력은 꿈이다.
최귀화 : 계속 할 수 있는 에너지는 그런 꿈들, 내가 아직 이루지 못한 것들, 앞으로 해나갈 것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직은 지칠 수 없다.

글. 배선영 sypova@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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