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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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타석 중 한 타석 정도는 19금(禁)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요. 지금처럼 너도나도 15세 영화만 찍다가는 큰일 날 거에요 자기가 만들고 싶은 영화가 19금이라면 그걸 만들어야 해요. 조금 피하고 싶은 이야기라도, 현실을 직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 배우의 진심.(*아래 인터뷰에는 ‘해무’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Q. ‘해무’는 인간 본연의 욕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전작 ‘화이’와 유사한 화두를 지닌 영화입니다. 연극적이고 상징적인 구조도 그렇고요. 이런 작품들에 유독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김윤석: 작가주의적인 정신이 들어간 영화들이 점점 사라지는 추세에요. 그에 비해 ‘화이’나 ‘해무’는 메시지가 매우 명확한 영화들이죠. 제가 그런 작품들에 끌리는 건 사실이에요. 이런 작품들이 제가 출연함으로서 투자가 된다면 언제든지 출연할 의사가 있고요. 좋은 작품이 투자 파워가 있는 배우가 출연을 고사했다고 해서 무산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요즘 흥행에 유리한 15세 영화 만들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듯한데, 저는 이럴 때에 용기 있게 19금 영화를 만들어내는 영화인들을 지지해요. 우물은 안파고 맛있는 물만 길러 먹다 보면 그 우물은 고갈될 거라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이런 작품이 나와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Q. 그래서인지, 필모에 19금 영화들이 빼곡합니다.
김윤석: 세 타석에 한 타석 정도는 19금 영화를 해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감독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조금 피하고 싶은 이야기라도, 현실을 직면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Q. ‘해무’는 심리적인 측면에서 수위가 강하게 느껴지는 영화에요. 원작을 본 입장에서, 캐릭터들도 연극보다 영화가 더 세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연극의 경우 선원들 간의 정이 도드라졌는데, 영화에서는 충돌하는 모습이 더 부각돼 있더군요.
김윤석: 맞아요. 그래도 어떤 부분에서는 연극이 더 세죠. 연극은 참혹한 상상을 하게 하잖아요. 그 상상들을 영상으로 모두 옮겼다면 정말 끔찍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김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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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배에 집착하는 선장 철주(김윤석), 홍매(한예리)에게 집착하는 동식(박유천), 여자에 환장하는 창욱(이희준) 등 인물들이 하나같이 휘몰아치더군요.
김윤석: 해석이 분분할 수 있는 영화에요. 과연 극한의 상황에서 가장 이성적인 인간이 누구일까. 저는 선장이 가장 이성적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미친놈은 동식이라고 보고요. 아니, 여자 하나 때문에 몇 년을 함께 한 동료들을 버리려하다니! 홍매를 안고 갈 때는 ‘저 놈이 제대로 미쳤구나’ 했다니까요.(일동웃음)

Q. 이전 인터뷰에서 ‘황해’의 면가(김윤석)는 본능보다 이성으로 움직이는 인간이라고 하셨는데, 이번 캐릭터도 그렇게 잡고 연기를 하셨네요.
김윤석: 철주는 (배의) 가장이잖아요. 만약 우리 집에 놀러 온 손님들을 방에 재웠는데, 연탄가스를 마시고 다 죽었다고 해봐요. 가장은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도덕, 윤리, 양심을 다 빼고 생존자체로 볼 때,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우왕좌왕하는 아이들을 달래서 가장 이성적으로 판단해야죠. 철주도 그래서 끝까지 정신을 붙잡고 있으려 했던 것인데, 결국은 본인도 무너지죠. 어떤 의미에서는 배와 함께 수장됨으로써 속죄를 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Q. 철주의 판단이 옳았다고 보시나요?
김윤석: 어땠을 것 같아요? 당신이 선장이었다면? 왜, 소설가 이문열이 쓴 ‘필론의 돼지’라는 단편이 있지요. 그리스 철학자 필론이 배를 타고 여행을 하는데,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큰 폭풍우를 만납니다. 그러자 배 안은 우왕좌왕 하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죠. 그런 상황을 보면서 필론은 굉장한 지식을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못하겠는 거예요. 그때 필론의 눈에 선창에는 여유롭게 자고 있는 돼지 한 마리가 포착돼요. 그걸 보고 필론이 내린 결론은 ‘내가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돼지 옆에서 자는 것이다’ 이랬죠. (웃음) 그걸 이문열 씨는 제대하는 군인들이 탄 기차 속 이야기로 풀어서 방관자, 회색·기회주의자들을 비판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누구 한 명이라고 정신을 차리고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것이 바로 선장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선장이 그나마 가장 이성적인 인물이라고 판단을 한 거고요.

Q. 얘기를 듣다보니 ‘해무’는 선택에 관한 영화라는 생각도 드네요. 그럼 의미에서 질문 드리자면, 배우는 매순간 선택에 놓여있는 존재잖아요? 배우로서 많은 선택을 해 오면서 후회되는 순간은 없으셨나요?
김윤석: 저도 사람인지라 후회를 하죠. 그렇다고 해서 딜레마에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다음에는 조금 더 좋은 선택을 하자’ 하면서 경험을 통해 배워 나갔던 것 같아요.

Q. 기자 간담회 때 철주라는 인물에 대해 ‘집으로 갈 수 없어서 배가 집일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김윤석: 우리는 촬영에 앞서 뱃사람의 리얼한 모습이 담겨 있는 다큐멘터리를 수십 편 보고, 실제로 그들을 만나다보니 그들의 삶이 쑥 들어왔어요. 철주의 행동을 두고 돌발적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배 안에서의 선장의 권력이라든가 영향력은 배 타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것들인 거죠. 조선족들이 반발을 일으킬 때 철주가 한방에 기선제압을 해 버리는데, 그것은 그들 입장에서는 필요한 부분이에요. 안 그러면 그 좁은 배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거든요. 선상반란은 굉장히 큰 위험이에요. 그래서 외국의 경우 선상반란의 조짐이 보일 때 선장에게 생살여탈권이 주어지기도 하죠.

김윤석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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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를 향한 철주의 집착은 무서울 정도로 뜨겁게 다가와요.
김윤석: 철주에겐이 배를 살릴 수 있다’는 맹목적인 믿음, 그거 하나 밖에 없어요. 마누라는 백주대낮에 외간 남자와 통정하고, 폐선을 막기 위해 담보대출을 받으려 하지만 그마저도 은행으로부터 거절당하고… 배를 어떻게든 살려내야만 이 사람의 삶도 살아나는 거예요. 배가 없어지면 나도 없어진다는 생각으로 달렸던 것 같아요.

Q. 철주에게 배가 그런 존재라면 배우님에게는 어떤 게 그런 존재인가요.
김윤석: 가장 쉬운 대답은 가족일 텐데, 그걸 빼고 말하면 ‘흥’인 것 같아요. 흥미를 잃는 순간, 연기에 대한 열정도 호기심도, 모든 게 다 옅어져버리겠죠. 그 흥이 사라질까봐 겁이 나요. ‘나이 들면서 피가 식어버리면 어쩌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 둘 씩 놓아버리면 어떻게 하나’ 최근, 그런 것들을 경계하는 중이에요.

Q. 현장에는 흥을 주는 요소가 많잖아요. 그게 상대배우일 수도 있고, 작품자체일 수도 있고, 감독의 디렉션일 수도 있고. 배우님에게는 어떤 게 가장 큰가요?
김윤석: 상황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함께한 배우들과 흥을 주고받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여러 요소 중엔 카메라도 있어요. 어떤 장면을 찍고 모니터를 봤는데, 우리가 못 보는 걸 촬영감독이 기막히게 잡았을 때, ‘헉! 카메라가 이걸 잡았어? 아, 이걸 잡고 싶어 했구나. 오케이, 알았어!’ 하면서 흥이 달아올라요.

Q. 카메라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마지막 씬에서 카메라가 철주를 클로즈업으로 잡을 때의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내가 만약 배우라면, 이 한 컷 하나 때문에라도 출연하겠다’ 싶을 정도로요.
김윤석: 사실 그 씬은 카메라가 망원으로 당겨서 찍은 거예요. 굉장한 테크닉이죠. 가까이에서도 카메라 포커스를 잡기가 어려운데, 그 어마어마한 망원으로 흔들림 없이 잡아내다니. 그건 홍경표 촬영감독 팀의 대단함이에요. 깜짝 놀랐어요. 오죽하면 촬영하다가, 포커스 잡는 스태프 얼굴을 다시 쳐다봤다니까요? 그럴 때 정말 흥이 나죠.

Q. ‘해무’는 극단 연우무대의 창립 30주년 기념작품입니다. 연우무대 출신으로서, 연우무대 30주년 기념 작품을 영화화한 작품에 출연한 것도 상당히 의미 있을 것 같아요.
김윤석: 흥미롭죠.웃기고. ‘살인의 추억’은 송강호 씨가 했고, ‘해무’는 제가 출연 했고…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연우무대 작품 중에 영화화 된 작품들이 많아요. ‘왕의 남자’야 너무 유명하고.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들이 몇 개 더 준비 중인 걸로 알아요. 영화 제작하는 분들이 연극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더라고요.

김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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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번 박유천도 그렇고, 여진구 유아인 등 많은 젊은 배우들이 김윤석과 작업을 하고 나면 배우라는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연기적으로 따로 도움을 주는 게 있으신가요?
김윤석: 그런 거, 없어요. 제가 그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게 있다면, 촬영장에서 슛이 들어갈 때 형성되는 어떤 기운이겠죠. 온갖 잡생각들은 버리고 온전히 맡은 캐릭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거? 그것이 제가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인 것 같아요. 희희낙락하며 놀다가 ‘슛’ 들어가면 집중하고, 또 나와서는 선후배 관계없이 장난 치고 놀다가 촬영 들어가면 다시 바짝 긴장하고. 이번 ‘해무’에는 그런 훈련이 잘 된 선배가 특히 많았어요. 유천이가 거기에서 또 잘 놀았고요. 박유천은 정말 스폰지 같은 친구에요. 적응력이 굉장해요.

Q. 배우님에게도 그런 선배들이 있었겠죠?
김윤석: 오래전 연극을 할 때, 극단 목화나 연우무대의 작품을 보며 느낀 게 많아요. 무대 위에서 가장 연극적인 언어로 가장 연극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배우들을 보면 “그래, 헛생각 집어치우고 집중 하자”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어요. 그 자체가 공부였죠.

Q. 도제시스템을 거쳐서 실력을 쌓아 온 배우와 연기학원 출신으로 현장에 투입 된 배우. 많은 차이를 느끼시나요?
김윤석: 배우들끼리는 쉽게 홍길동이 도술을 배우기 위해 걸레질부터 한다고 표현하는데, 그런 도제시스템에서 배운 배우들과 그렇지 않은 배우들과의 갭이 굉장히 컸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땐 치장만 하고 예쁜 척 하는 애들, 연기의 기본도 안 된 애들이 너무나 많았어요. 그런데 점점 그런 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요. 배우려고 노력하는 자세도 잘 돼 있고요. 그런 과정 속에서 도제시스템의 꼿꼿함도 부드러워지고 있고요.

Q. 제작자로 만난 봉준호 감독님은 어떻던가요?
김윤석: 그 분은 정말로 영화를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설국열차’를 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거제도까지 내려와서 옆에 있어 주고, 배우들 술도 사 주고.(웃음) 배우들에게는 정말 좋은 제작자인데, 제작사로서는 글쎄요. 하하. 그분은 그냥 감독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가령 제작자 입장이라면 “이걸 3회 차에 찍으세요. 더 이상의 제작비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딱 딱 자르는 게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 분도 감독인지라 감독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는 거예요. 결국 “3회차 어떻게든 만들어볼게요. 찍으세요~” 이러고 있으니.(웃음) 비즈니스를 할 분은 아닌 것 같아요. 허허허허.

김윤석
김윤석

Q. 제작자가 아닌 감독 봉준호와 함께 협업을 해 볼 계획은 없나요?
김윤석: 우리야 언제든 좋은 작품으로 만나자고 하는데, 문제는 캐릭터죠, 캐릭터. 그런데 봉준호 감독과 작업해 보고 싶지 않은 배우가 누가 있겠어요.

Q. 아까 흥 이야기를 했는데, 많은 이들이 흥을 찾으려고 여러 분야에 도전하고 있어요. 배우님도 연기 외에 다른 것들에 관심이 있는 걸로 아는데, 그건 언제 보여 주실 건가요.(웃음)
김윤석: 하하하. 시나리오가 제 손에서 써 지는 날이겠죠. 탈고가 딱 되는 날.

Q. 쓰고는 계시나요?
김윤석: 네. 여러 가지를 하고 있어요. 작품도 쓰고, 카메라도 공부하고. 그런데 이러다가 나이만 드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Q. 작년 ‘화이’ 인터뷰 때 ‘마스터’의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을 좋아한다고 하셨죠?
김윤석: 그런데, 그 양반 가셨죠.

Q. 그렇게 유능한 재능을 가진 배우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올해 2월 2일)… 같은 배우로서 어때요?
김윤석: ‘아, 쉽지 않구나. 연기라는 게 정말 쉽지 않구나’ 싶죠. 그 분은 연기 후에 오는 황폐함을 이기지 못하고 약에 의존해서 살았던 사람이더라고요.

Q. 누군가 그걸 보면서 그러더군요. 한국배우들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김윤석: 한국배우들의 경우 제약이 더 많죠. 벗어나서는 안 되는, 지켜야 하는 규율들이 참 많아요. 극단적인 예로 여기서는 배우가 바람 한 번 피우면 끝나잖아요. 그런데 할리우드는 허용되는 것들이 많다보니,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고, 자유롭기도 하고 그런 것 같아요.

김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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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만약 할리우드에서 태어났다면 어떤 배우가 됐을 것 같아요?
김윤석: 외국에서 태어났다면, ‘비포 선라이즈’의 에단 호크 처럼 살지 않았을까.(웃음) 에단 호크는 글도 쓰고 배우도 하잖아요. 그런 작업을 조금 더 일찍 했을 것 같아요. 우리는 그럴 경우 “감히!” “너 따위가!” 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가수가 배우를 하고 배우가 감독을 하고 기자가 시나리오를 쓰는, 그런 부분에서 유연해지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편견을 가지고 봤는데, 너무 잘 해! 그래도 외면할 건가요? 잘 하면 인정을 해줘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왜곡시키는 순간, 그 사람은 점점 작아질 거예요.

Q. 조금 민감한 질문일 수 있는데, ‘해무’를 보고 세월호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엔 이미지 적으로 겹치기도 하고요.
김윤석: (먹먹한 듯)하… 영화를 찍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죠. 일단 그 일이랑 이 영화는 시기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었고..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전혀요. 그 사건 자체가 너무나 어마어마해서 영화까지 갈 엄두가 안 나잖아요. 그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짜 그 자체이니.

Q. 마지막 질문입니다. ‘해무’를 통해 얻은 게 있다면요?
김윤석: 1년에 한번 정도는 이런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지금 처럼 15세관람가 영화만 찍다가는 정말 큰일 날 거예요. 자기가 만들고 싶은 영화가 19세관람가라면 그걸 만들어야 해요. 수위를 낮춰서 15세로 가면 안돼요. 그런 의미에서 ‘해무’처럼 제한 없이 쭉쭉 가는 영화들이 가끔씩 나와 줘야 한다고 보고요.

글. 정시우 siwoorain@tenais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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