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_5649 copy
JUN_5649 copy
매주 주말 밤 12시 KBS 클래식 FM을 틀면 케니 도햄의 ‘올드 폭스(Old Folks)’와 함께 재즈를 소개하는 한 남성 디스크자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남자의 이름은 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50). 재즈에 순정을 바친 남자다. 1999년에 첫 전파를 탄 ‘황덕호의 재즈수첩’이 어느덧 15주년을 맞았다. 그의 방송은 기본에 충실하다. 말보다는 음악을 우선하고,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기보다는 재즈라는 음악이 가진 매력을 전하는데 충실하다.

15년을 바지런히 방송해온 덕에 이제는 ‘올드 폭스’의 투명한 피아노 전주만 들어도 황덕호의 낮은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방송이 익숙지 않다고. “‘올드 폭스’는 제가 워낙 좋아하는 곡이라 시그널로 정했죠. 지금은 이곡을 들으면 방송 경보음이 울리는 것 같아 긴장하게 되요. 제가 그만큼 방송을 편하게 못한다는 거겠죠. 하하”

한국에서 재즈 프로그램이 15주년을 맞는다는 것은 기념비적인 일이다. “제가 참 어눌한 진행자예요. 그럼에도 이렇게 오래 했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감사한 일이예요.”
JUN_5546 copy
JUN_5546 copy
황 씨는 1992년 소니뮤직에 입사한 후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대학원 시절인 1989년에 윈튼 마살리스의 앨범 ‘핫 하우스 플라워스(Hot House Flowers)’의 라이너노트를 쓴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재즈앨범의 소개 글을 썼다. 1995년부터 전업 칼럼니스트로 활동한 황 씨는 ‘재즈 글쟁이’로 이름을 날리다 1999년에 KBS 측의 제의로 DJ로 변신했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재즈 수요가 정말 적었어요.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반들을 라이선스로 내면 반품이 뭉텅이로 들어오곤 했죠. 그런데 차인표가 드라마에서 색소폰을 한 번 부니까 재즈 붐이 일어났어요. ‘모 베터 블루스(Mo’ Better Blues)’와 같은 곡이 히트하고, 빌리 홀리데이, 데이브 브루벡의 판들이 엄청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객석’ ‘음악동아’와 같은 클래식 잡지에 재즈 코너가 생겨났어요. 그때를 ‘재즈 거품’으로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런 거품들이 기본이 돼 재즈를 향유하는 층이 형성된 것이 재미있어요.”

‘재즈수첩’이 전파를 탈 무렵 한국에서 재즈를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CBS ‘0시의 재즈’ 정도밖에 없었다. 처음 방송을 시작했을 때는 청취자들이 재즈를 낯설어하기도 했다. “클래식FM에서 재즈를 틀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볼멘소리들도 있었어요. 존 콜트레인, 찰리 파커만 틀어도 난리가 났죠. ‘나팔소리가 시끄럽다’는 반응부터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죠. 비밥(Bebop)과 같은 재즈가 심야시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데 이걸 아침에 틀수도 없고.(웃음) 클래식과 비교했을 때 재즈는 우아하지 않고, 엄선된 멜로디가 흐르지 않죠. 록은 록대로, 재즈는 재즈대로 나름의 미학과 가치가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재즈의 미학이 일반 대중에게 어렵게 느껴졌던 거겠죠. 그래도 나중에는 청취자들이 응원이 담긴 장문의 엽서, 직접 구운 파이도 구워 보내주셔서 참 기뻤어요.”
JUN_5634 copy
JUN_5634 copy
황덕호는 푸근한 인상의 소유자이지만 재즈 DJ로서는 ‘강골’ 기질이 있다. 듣기 편한 감미로운 재즈보다는 재즈의 본질을 잘 살린 정통 재즈를 주로 튼다. 그만큼 재즈를 순수하게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실 저는 선곡을 할 때 편안한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았어요. 방송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 최대한 좋은 신보를 소개하고, 재즈의 고전을 들려드리려 하죠. 그런데 최근에 세월호 참사 이후 차분한 음악들을 틀었더니 청취자 분들이 아픈 마음에 위안을 얻었다는 글들이 올라왔어요. 그래서 그동안 제 선곡이 너무 일방적이지 않았는지 반성도 하게 됐어요.”

황 씨는 라디오 전파를 통해 재즈의 역사를 다루고 작품에 대해 심층적인 접근을 시도해 마니아들 사이에서 열렬한 지지를 얻기도 했다. 신뢰가 쌓이다보니 황덕호가 소개를 하면 음악이 달리 들릴 정도. 그의 건조한 음성을 듣다보면 ‘전설의 DJ’ 전영혁이 떠오르기도 한다. “재즈가 단순히 술집 배경음악이 아니잖아요. 정말 집중해서 감상해야 하는 음악이에요. 클래식의 경우 작곡가, 연주자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는 라디오 프로그램들이 있는데, 재즈도 충분히 그런 이야기를 던질 수 있는 음악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JUN_5661 copy
JUN_5661 copy
최근에는 재즈 페스티벌이 성황을 이루고, 소위 재즈 마니아들도 생겼다. 한국에도 본격적인 재즈 시장이 형성된 것일까? “글쎄요. 카페에서 재즈가 흐르고, 대규모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어서 재즈가 대중화됐다는 말도 하는데요. 정말 재즈를 좋아서 듣는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는 의문이에요. 음반 정보, 접촉하는 양은 늘었지만 재즈를 찾아서 감상하려는 열정은 옅어진 느낌을 받아요. 가령 바우터 하멜을 재즈라고 소개하면 일반인들이 재즈를 작정하고 들을 이유가 없죠. 그걸 들으며 재즈를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웨인 쇼터를 들을 이유가 없는 거죠. 리턴 투 포에버가 와도 티켓이 안 팔리잖아요. 결과적으로 재즈 시장이 커진 건 아니라고 봐요.”

황 씨는 마니아들이 특정 음악에 쏠려 있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토로했다. “간혹 제가 방송할 때 왜 ECM의 음악은 틀지 않느냐고 문의가 와요. 저도 나름대로 ECM 소속 아티스트들을 틀긴 하는데요. 사실 국내 재즈 팬들이 생각하는 만큼 전체 재즈에서 ECM이란 레이블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아요. 특히 팻 메시니, 키스 쟈렛이 너무 재즈를 과잉 대표하는 경향이 있죠. 재즈라는 음악이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정착하려면 재즈의 중심적인 미감, 즉 스윙, 임프로비제이션과 같은 요소가 팬들에게 수용돼야 합니다. 팻 메스니 팬들도 펫 메스니 그룹의 듣기 편한 음악은 좋아하면서, 펫 메스니 트리오의 정통적인 재즈는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재즈를 그저 멜로디와 감미로움으로 접근하면 듣는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최근 한국 연주자들의 재즈 앨범 발매가 늘고 있는 것에 대해 황 씨는 “매우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정말 끝내주는 일이죠. 최근 몇 년 사이에 20~30대 젊은 연주자들이 좋은 앨범들을 내고 있어요. 그런 분들이 어린 시절 ‘재즈수첩’을 들었다고 말해줄 때 보람을 느낍니다.”

디스크자키로서 황덕호 씨는 재즈 입문자들을 위한 순서도 고민 중이다. “초심자들의 시각에 맞춘 재즈 에이 투 지(A to Z)라는 코너를 하고 있어요. 초심자들에게 재즈의 매력을 알게끔 해주는 순서죠. 가령 재즈 스탠더드 100곡을 선정해 여러 가지 버전을 비교해 들려주는 순서도 생각 중이에요. 재즈가 어려운 음악이 절대 아니에요. 스탠더드 몇 곡만 알아도 충분히 흥얼거리면서 즐길 수 있는 음악입니다.”
L1018942
L1018942
‘재즈수첩’은 15주년을 맞아 5월 한 달간 영화감독 박찬욱, 팝 재즈 그룹 윈터플레이, 소설가 김중혁,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게스트로 나오는 특집을 진행한다. 다양한 문화 예술인들이 직접 골라온 재즈곡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박찬욱 감독은 굉장한 음악 마니아에요. 록, 재즈, 클래식 등에 대한 지식이 매우 풍부한 분이죠. 재즈를 좋아하는 분들을 초대해서 프로그램 15주년을 축하할 수 있게 돼 매우 기쁩니다.”

황덕호에게 가장 아끼는 재즈 아티스트, 재즈 앨범을 물었다. “글쎄요. 아마 무인도에 간다면 듀크 엘링턴이나 찰리 파커 음반 한 장 갖고 들어가지 않을까요. 애착이 가는 연주자들은 너무 많은데… 트롬본 연주자 잭 티가든, 그리고 클라리넷 연주자 피 위 러셀이 떠오르네요. 원래 클라리넷은 단아한 음색을 가지는데 피 위 러셀은 탁한 소리를 내는 연주자예요. 생전에 엄청난 술꾼이었는데 거의 죽기 전까지도 술을 마셨다고 해요. 그의 연주를 들으면 이 사람이 몸이 아프다는 게 느껴지죠.”

황덕호에게 재즈란 뭘까? 그는 “밥벌이”라고 말하며 크게 웃었다. “좋은 음악 많잖아요. 재즈와는 끈끈한 정이 생겼어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나에게는 피붙이이지만, 사람들은 잘 안 알아주는 못난 형 같아요. 외로운 음악.”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 팽현준 pangpang@tenasia.co.kr

[나도 한마디!][텐아시아 뉴스스탠드 바로가기]
[EVENT] 뮤지컬, 연극, 영화등 텐아시아 독자를 위해 준비한 다양한 이벤트!! 클릭!
[EVENT] 와우, 비투비의 봄날 5월 구매 고객 이벤트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