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오랫동안 수많은 영화의 리뷰를 수타집에서 면을 뽑듯이 신속하게 써 왔지만, 그럼에도 가끔씩 당황할 때가 있다. 2011년 전주영화제의 메인 카탈로그를 위해 리뷰를 쓸 때도 그랬다. 주앙 보텔료 감독의 ‘불안의 영화’가 그런 경우였다. 연속해서 2번이나 봤지만, 도대체 이 영화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포르투갈에서 온 이 미지의 작품은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1982)을 영화로 옮긴 것이었다. 심지어 보는 영화가 아니라 읽는 영화에 가까웠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자욱한 안개처럼 서서히 퍼져 나가는 이 영화는 나를 서서히 불안에 빠지게 만들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책을 먼저 읽었다면 이해의 폭이 더욱 넓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행운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1년이 흘러, 2012년 3월에 이 책이 드디어 국내에 소개되었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난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는 ‘오르페우’라는 평론지에 주요 논객으로 활동했으며, 70개가 넘는 이명으로 시를 발표했다. 1935년 11월 29일, 지나친 과음 습관 탓에 간질환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다음날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죽기 전 유언처럼 쓴 마지막 문장은 놀랍게도 영어였다. 그는 “내일이 무엇을 가져올지 난 모르겠다(I know not what tomorrow will bring.)”는 짧고 강렬한 문장을 남겼다. 이 문장만큼 그의 작품세계를 정확히 보여준 것도 없으리라. 페소아는 사후에 출판된 ‘불안의 책’에서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라는 이명을 쓰고 있다. 페소아는 그의 분신 소아레스를 ‘할 일도 많지 않고, 갈 곳도 없고, 찾아갈 친구도 없고, 독서에 대한 열정도 없어서 세 든 방에서 평소에 글을 쓰면서 저녁 시간을 보내는 남자’라고 소개한다. 20세기 가장 아름다운 일기로 평가받는 이 ‘불안의 책’은 매일매일 조금씩 읽고 싶은 책이다. 언젠가 페소아가 오가던 리스본의 도라도레스 거리를 찾아갈 수 있다면, 태평하게 거닐면서 그의 책을 낭독하고 싶다.

“모두가 춤추는 무도회에서 누군가는 소외되는 법. 안 가는 것이 낫다. 있어도 없느니 못한.”

(위) 주앙 페드루 호드리게스, 성안토니오, 4편의 영화를 사용한 비디오 설치, 2013 (아래) 에두아르두 소투 드 모라, 파울라 헤구 미술관 - 역사의 집, 사진 제공: 에두아르두 소투 드 모라
(위) 주앙 페드루 호드리게스, 성안토니오, 4편의 영화를 사용한 비디오 설치, 2013 (아래) 에두아르두 소투 드 모라, 파울라 헤구 미술관 - 역사의 집, 사진 제공: 에두아르두 소투 드 모라
(위) 주앙 페드루 호드리게스, 성안토니오, 4편의 영화를 사용한 비디오 설치, 2013 (아래) 에두아르두 소투 드 모라, 파울라 헤구 미술관 - 역사의 집, 사진 제공: 에두아르두 소투 드 모라

얼마 전,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 갔다가 우연히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 ‘포르투갈 통속적 사행시’를 ‘성 안토니오’의 영상에서 발견했다. ‘성 안토니오’는 주앙 페드루 호드리게스와 주앙 후이 게하 다 마타의 공동 전시 프로젝트로, 비디오 설치작과 드로잉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호드리게스가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서 상영된 단편 ‘성 안토니오 축일 아침’(2012)을 촬영하면서 수집했던 이미지들을 네 개의 스크린에 영사한 작품이다. 작은 방처럼 생긴 사각형 공간 안에 들어가면, 영상이 관객을 에워싼다. 전시장 안에 길게 나열된 85점의 드로잉은 마타의 작품으로, ‘성 안토니오 축일 아침’에 등장한 인물들을 모델로 했다. ‘성 안토니오’ 프로젝트는 특정한 날짜와 공간이 아니라, 인물의 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전시는 ‘불안: 포르투갈적 표현 양식들 전’(2월 9일까지) 중 하나다. ‘전통은 혁신이다: 포르투갈 현대 건축’과 ‘결합하는 미학’이 동시에 진행 중이다. 전자는 제9회 상파울로 건축 비엔날레에서 소개된 프로젝트다. 알바루 시자의 전통을 잇는 포르투갈 건축 사무소와의 인터뷰를 통해 15개의 프로젝트에 대해 묻고, 포르투갈의 독특한 건축 미학을 설명한다. 후자는 동서양의 표현 기법으로 통합의 미학을 추구한 작가 마리오 로페즈의 조각 및 회화를 소개한다.

연극 ‘하녀들’
연극 ‘하녀들’
연극 ‘하녀들’

아쉽게도 포르투갈에 관한 공연이 없는 관계로, 다소 파격적인 연극 ‘오시비엥침 기록극’과 ‘하녀들’을 추천한다. ‘오시비엥침 기록극’은 1965년작으로, 독일 극작가 피터 바이스가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을 참관하고 당시의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기록극이다. 이 작품의 원제는 ‘수사(Die Ermittlung)’이며, 오시비엥침은 폴란드어로 아우슈비츠를 뜻한다. 아우슈비츠 재판은 아우슈비츠 범죄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재판으로, 전후 20년 뒤에 열렸다. 재판은 20개월 동안 진행됐으며,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211명의 생존자들과 54명의 전직 아우슈비츠 친위대원들이 법정에 섰다. 이런 기록극(다큐멘터리 연극)은 정치 연극의 선구자 피스카토르가 주창했고, 피터 브룩의 ‘유에스’(1966)나 피터 바이스의 ‘베트남 디스커스’(1968)를 통해 실현된 바 있다. 극단 그린피그의 작품(연출 전성현)으로,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서 2월 2일까지 공연된다. 혹시 아우슈비츠의 증언이 부담스럽다면 장 주네의 부조리극 ‘하녀들’을 이윤택 연출로 만나 보자. 남창과 도둑질을 하며 밑바닥 인생을 산 장 주네는 자전적 소설 ‘도둑일기’(1949)를 쓰기 전에 희곡 ‘하녀들’(1947)을 완성시켰다. 마담이 외출한 빈 집에서 두 하녀가 마담을 흉내 내는 연극놀이를 하다가 결국 마담을 살해하기로 결심하는 이야기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블랑쉬 역)에서 숨막히는 연기를 펼쳤던 김소희가 5년 만에 음산하고 퇴폐적인 마담으로 돌아온다. 장 주네에 대해 잘 몰라도, 김소희의 미친 존재감에 푹 빠질 수 있다. 연희단거리패의 레퍼토리 공연으로, 게릴라극장에서 2월 2일까지 마담의 광기가 울려 퍼진다.

글. 전종혁 대중문화 평론가 hubul2@naver.com
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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