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석 (6) (1)
유연석 (6) (1)
여운을 남기는 칠봉이의 말투 만큼이나 느릿느릿 천천했다. 던지는 질문마다 곱씹어 보듯 특유의 선량한 말투로 답변을 이어가는 유연석의 모습에서는 ‘서울남자’ 칠봉의 모습이 아직 짙게 배어 있었다. 데뷔 10년만에 만난 케이블채널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는 그를 좀더 대중적인 스타덤에 올려놓았지만 영화 ‘늑대소년’ ‘건축학개론’ ‘혜화, 동’ MBC 드라마 ‘구가의 서’까지 ‘아 그 배우 누구였지?’라는 물음이 나오는 자리에 그는 항상 있었다.

말투만큼이나 천천히 큰 욕심 없이 쌓아온 필모그래피는 현재의 유연석을 다양한 진폭의 표현이 가능한 배우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아직 ‘응답하라 1994′가 남긴 설렘과 흥분은 간직한 그의 얼굴에는 다음 행보에 대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Q. 마지막 장면은 칠봉이가 새로운 사랑을 만나면서 여운을 남기며 끝났다.
유연석: 옛사랑에 대한 추억과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감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재미있게 표현된 것 같아 개인적으론 맘에 든다.

Q. 최근 명동에서 프리 허그 행사를 진행하다 인파가 몰려 장소를 옮기는 해프닝도 겪었다.
유연석: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몰릴 거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인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칠까 봐 걱정이 되더라. 나중에 세종대로 장소를 옮겨 200분 정도 안아드리는 걸로 행사를 마무리했는데, 200명째쯤 안을 때 마음 속에서 뭔가 뭉클했다. 그 추운 날 나를 보러 와준 데 대한 고마움이 밀려왔던 것 같다.

Q. 촬영이 진행되면서 칠봉이가 나정이의 남편이 아님을 알게 된 후 아쉽진 않았나.
유연석: 언젠가부터는 남편이 되고 안 되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정이에 대한 칠봉이의 마음을 진심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가 중요할 뿐. 칠봉이가 나정이의 행복을 위해 용기 있게 떠나주는 것도 남자로서 멋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말 부분에 칠봉이에게도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감을 열어줬기 때문에 만족스럽다.

Q. 결론은 촬영 내내 정말 몰랐나.
유연석: 배우들도 모두 몰랐고 마지막 대본을 받고 나서야 알았다. 다들 스스로 남편이라는 생각으로 찍었다.(웃음)

Q. 그래도 칠봉이와 나정이의 해피엔딩을 조금은 바라지 않았나.
유연석: 작품 자체가 처음부터 쓰레기와 나정이 남매로 나오고 그 둘에게 집중되는 구도였다. 그 안에서 서울 남자와 경상도 남자의 상반된 매력이 부각됐던 건데, 어느 순간부터 예상보다 칠봉이를 응원해주는 분들이 많아져서 내 입장에선 감사했을 따름이다.

유연석 (10)
유연석 (10)
Q. 칠봉이는 그야말로 여성들의 시선에서 ‘저런 남자였으면 좋겠다’는 모습을 담은 캐릭터였다. 짝사랑하는 모습이 특히 그랬는데 실제로 짝사랑을 해 본 경험이 있나?

유연석: 칠봉이만큼 오랜 기간은 아니지만 스무 살 때 9개월 정도? 굉장히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 연기하면서 그 때 감정이 문득 기억 나더라. ‘아, 나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하는 생각을 오랜만에 했던 것 같다.

Q. 연기할 때 신원호 PD가 구체적인 연기 지도를 하지 않고 배우들을 자유롭게 놔뒀었다고.
유연석: 맞다. 배우들을 어떤 선에 가둬두지 않고 편하게 연기할 수 있게 마련해주셨다. 사실 난 촬영 전에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이 많았다. 실제로는 경상도 사람인데 서울 토박이 역할을 하다 보니 사투리가 오가는 촬영장에서 어색할 때도 있었다. 그 때마다 감독님이 ‘너의 원래 모습을 보고 생각하고 대본을 쓴 부분이 많으니 편하게 생각하라’는 얘기를 많이 해 주셨다. 처음에는 그게 더 어색했는데, 계속 하다 보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 좋았던 것 같다.

Q. 아 ‘서울 남자’가 아닌 경상도 출신이었구나.
유연석: 여섯 살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진주에서 살았다.

Q. 그럼 ‘어색한 사투리 연기’가 정말 어색했겠다.
유연석: 그렇다. 난 (경상도) 네이티브인데.(웃음) 스타일리스트 중에 서울 토박이가 있는데 대본 읽어봐 달라고 했더니 정말 어색하게 경상도 사투리를 하더라. 처음엔 그걸 보고 흉내내는 식으로 연기했다.

Q. 서울 토박이를 연기하면서 서울 사람에 대해 새롭게 발견한 점이 있나.
유연석: 신원호 PD님이 서울 토박이인데 감독님에게서 힌트를 얻었다. 지방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서울 사람들만의 귀여운 구석이 있다. 예를 들면 ‘딸딸이’(슬리퍼의 경상도 사투리) 같은 말을 못 알아듣고 반문할 때 그 모습이 굉장히 순수해보일 때가 있다.

Q. 칠봉이가 대사를 할 때면 중간에 여백이 많았다. 특히 나정이에게 뭔가를 얘기하는 호흡 같은 데서도 그렇고. 일부러 그렇게 한 건가? 아니면 평소 습관인가?
유연석: 음…. 사실 감정이라는 건 대사가 아니라 대사와 대사 사이의 호흡과 여백으로 전달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간 중간 간격을 두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실제로 말 할 때도 뜨문 뜨문 얘기하기도 하고 좀 어눌할 때도 있다.(웃음)

DB
DB
Q. 다른 캐릭터들이 자신의 감정을 비교적 많이 표출했던 것과 달리 절제하는 연기가 많았다.

유연석: 아무래도 멜로의 중심에 서 있다 보니 빵 터지는 장면이 많진 않았다. 성동일 선배나 도희를 보면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 칠봉이가 주는 잔잔한 재미가 있다. 허당기 있는 모습들…. 그런 게 귀여웠다.

Q. 칠봉이 자체가 외로움이 많은 아이라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요소가 있었다.
유연석: 가족의 부재가 칠봉이가 나정이를 사랑하고 하숙집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던 것 같다. 항상 시끌벅적하고 티격태격하지만 정이 오가는 친구들이나 때로 과할 때도 있지만 엄마처럼 사람을 챙길 줄 아는 나정이에게 칠봉이가 빠진 건 이면에 있는 가족에 대한 외로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Q. 촬영장에서 귀여운 모습을 많이 보여서 팬들 사이에서는 ‘비글’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유연석: 다들 힘드니까 장난도 쳐 가면서 재밌게 하는 게 좋더라. 그리고 칠봉이는 유독 싹싹하게 웃는 장면이 많아 내가 기분을 업 시켜놔야 촬영이 편해서 일부러 더 그러려고 노력했다.

Q. 근육이 돋보이는 몸도 방송 내내 꽤 화제가 됐다.
유연석: 캐릭터다 보니 다른 때보다 역기 운동도 열심히 하고 체력 관리나 투구연습도 했다. 원래 키 크고 왜소한 체격이었는데 군대 다녀온 후 확실히 건장해지더라.

Q. 중간중간 칠봉이가 보여준 날카로운 눈빛도 인상적이었다.
유연석: 순간 순간 눈매가 매섭게 보일 때는 PD님과 얘기해서 다시 가다듬곤 했다. 나는 날카로운 느낌으로 연기한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보일 때도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전 작품에 대한 잔상이 있으니까. 그래서 초반엔 이렇게 저렇게 많이 바꿔봤다. 칠봉이가 순정파이긴 하지만 직업적으로는 운동선수라 남자다운 면이 있고, 투수라는 특성상 포커페이스에 능하고 판단력도 좋아야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내가 지닌 날카로움도 캐릭터를 만드는 데 한 몫했던 것 같다.

Q. 이렇게 순수한 느낌의 훈남은 처음 연기하지 않았나.
유연석: 지금까지 해 본 역할 중 가장 긍정적이고 밝은 캐릭터였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면서도 마인드 자체가 긍정적인. 본인의 아픔이 있으면서도 친구들 앞에서는 웃어주는 모습을 연기하다 보니 촬영하면서 나도 긍정적으로 변해가더라.

유연석 (7)
유연석 (7)
Q. 칠봉이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유연석: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결혼 해서 잘 지내고 있을 것 같다.

Q. 친구 부탁이라면 전세금 5,000만원도 깎아주고?
유연석: 메이저 리거의 수입이 몇백억인데 20년 지기 친구를 위해 그것도 못 해주겠나. (웃음)

Q. 앞서 영화 ‘늑대소년’ ‘화이’ 등에서 강렬한 인상의 악역을 소화했다. 이번 작품으로 이미지 변신에 확실히 성공한 것 같나
유연석: 악역만 했던 건 아닌데 유독 각인됐던 게 그런 작품이었다. 내 생각엔 그동안의 역할도 악역은 아니었다. 사랑의 방해꾼이었을 뿐?(웃음) 악역만하는 배우는 아닌데 그런 선입견이 게 알게 모르게 굳어진 것 같다. 그러다 ‘응답하라 1994′로 순정남 역할을 하고 나니 배우로서 양쪽의 캐릭터를 모두 소화한 것 같아 의미가 깊다.

Q.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과 대사가 있나.
유연석: 터미널에서 나정이에게 고백하면서 ‘해피 뉴 이어’라고 했던 장면이 왠지 모르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Q. 배우 유연석에게 1990년대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유연석: 아무래도 어릴 때니 큰 고민없이 지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 때 노래들을 들어보니 추억도 떠오르면서 ‘여러모로 즐기면서 지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되새겨 생각하니 더 아련하고. 가사가 들리는 노래를 좋아해서 90년대풍 노래가 내게 잘 맞는다.

Q. 지난해 말 데뷔 10주년을 맞아 데뷔작이었던 ‘올드 보이’ 개봉 10주년 포스터도 찍었다.
유연석: 10년 전 개봉한 날과 같은 날 재개봉해서 그런지 의미가 남다르더라. 포스터 촬영하면서 오랜만에 함께 출연한 선배들을 만나뵀다. 스무 살 때 아무것도 모르던 친구가 많이 성장했다며 다들 대견해하셔서 뿌듯했다.

Q. 독립영화와 멜로, 스릴러 등 작품을 장르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해 왔다.
유연석: 조금이라도 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줄까라고 고민했던 게 시간이 지나고 작품이 쌓이면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아 좋다.

Q. 마스크가 여러가지를 표현할 수 있는 얼굴이란 점도 다양한 작품을 하는 데 강점이 된 것 같다.
유연석: 다른 배우들은 굉장히 잘 생겼거나 독특한 개성을 지닌 분들이 많고 또 그런 분들이 사랑받지 않나. 나는 처음엔 심심하단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내가 봐도 그렇더라. 딱히 잘생긴 것도 못생긴 것도 아닌.(웃음) 이제 그런 심심함이 긍정적으로 보여지니 다행이지. 초창기 연기할 때는 내 얼굴에선 뚜렷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얘길 많이 들어 오히려 콤플렉스일 때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자신감있게 하다 보니 내 장점이 되더라. 지금은 내 모습이 여러가지를 담을 수 있는 얼굴이라고 얘기해주시니 고마울 따름이다.

글. 장서윤 ciel@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