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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머리’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캐이블채널 tvN ‘빠스껫 볼’에서 친일파 귀족의 자제로 창씨개명에 앞장선 다케시 역을 맡았던 하용진은 곱게 빗어 넘긴 머리를 풀어헤치자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빠스껫 볼’이 끝나자마자 머리를 잘랐다”고 말하며 수더분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에게서는 극 속 ‘모략의 화신’으로 강산(도지한), 민치호(정동현), 최신영(이엘리야) 등의 인물을 곤경에 빠뜨렸던 악인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작품과 상반되는 이미지, 그에게 처음으로 마음이 갔던 순간이다.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단역으로 연기자 인생에 첫 발을 내딛은 하용진의 인생은 굴곡도 참 많았다. MBC ‘주몽’(2006), KBS2 ‘대왕세종’(2008)을 통해 이름을 알렸지만, 연기자 생활을 그만둘 결심을 할 정도로 심한 슬럼프를 겪기도 했다. 이후 몇 편의 작품을 거쳐 마주한 ‘빠스껫 볼’ 곽정한 PD와의 인연으로 악역을 맡게 된 그는 “이제야 정말 연기에 대한 간절함을 느끼게 됐다”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데뷔 8년 차 ‘빠스껫 볼’ 다케시가 만든 ‘중고 신인’이라는 수식은 그에게는 연기자로서 한 단계 발돋움하기 위한 디딤돌로 자리할 것만 같다.

Q. ‘빠스껫 볼’을 통해 생애 첫 악역을 맡게 됐다. ‘일본의 앞잡이’라는 설정도 그렇고 연기하기가 쉽지 않았겠다.
하용진: 다케시는 정말 순수 악에 가까웠다. 보통 악인도 이야기가 전개되며 착해지기 마련인데, 다케시는 초지일관 악역이었다. 초반에는 ‘다케시’와 ‘하용진’이라는 사람이 너무 다르다 보니 배역에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나의 내면에 있는 악을 이끌어내는 게 다케시를 연기하기 위한 숙제였다.

Q. 처음에는 해코지하는 정도로만 표현되던 ‘악’이 후반부로 갈수록 납치, 폭행 등으로 극대화되더라. 특히 악랄한 짓을 일삼으며 광기 어린 눈을 치켜뜬 당신을 보며 ‘아 정말 저 사람은 악역을 즐기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웃음).
하용진: 정확히 봤다(웃음). 힘겹게 캐릭터가 자리를 잡고 나니까, 이후에는 연기할 때 모종의 쾌감마저 느껴지더라. 사람마다 모두 내면에 작든 크든 악이 존재한다. 그 내면의 악을 카메라 앞에서 자유롭게 표출하는 게 악역을 맡은 배우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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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다케시를 연기하기 위해 어떤 부분에 집중했나.
하용진: 연기하기 전에 먼저 다케시를 이해하는 게 급선무였다. ‘다케시는 어떻게 살아왔을까’를 고민했다. 대본 리딩도 다양하게 해봤다. 술을 먹거나, 혹은 아주 시리도록 냉정한 상태에서도.

Q. 악인이 꼭 개과천선할 필요는 없지만, ‘다케시’라는 인물에 대한 설명이 적었던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연기를 하며 더 풀어보고 싶었던 이야기는 없었는가.
하용진: 물론 다케시의 가정사, 환경 등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었다면 설득력을 높아졌을 거다. 하지만 워낙 주인공들의 분량이 많다 보니 다케시까지 그러기에는 여건이 안 좋았다. 다만 지금에 와서 내가 아쉽다고 느끼는 부분은 내가 더 악랄해지지 못했었다는 것이다. 악역으로서 끝을 보여줬으면, 오히려 착한 캐릭터들에게 정당성이 부여됐을 텐데 처음 맡는 악역이고 캐릭터를 푸는 데도 시간이 걸리다 보니 그러지 못했다.

Q. 아무래도 작품의 스케일이 워낙 크다 보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시청률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빠스껫 볼’은 여러모로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하용진: 분명 ‘빠스껫 볼’은 의미 있는 드라마로 기억될 작품이다. 하지만 너무 실험적이고 다소 진부한 부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농구 경기 장면만 하더라도 당시에는 한 손 슛이나 레이업이 없었기에 모두 양손 슛을 쐈다. 근데 이게 현대 농구에 익숙해진 분들에겐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고증이 너무 철저했던 것도 독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CG, 카메라워크 등 곽정환 PD다운 새로운 시도가 많았는데, 일찍이 시청자들에게 외면받아 그런 부분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은 지금도 뼈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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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곽정환 PD의 제의로 다시 연기를 시작하게 됐다고 들었다. 어떤 인연이 있었나.
하용진: ‘빠스껫 볼’에 들어가기 2~3년 전에 우연히 공현진 선배와 곽정환 PD가 자리한 조촐한 술자리에 참석하게 됐다. 그때 나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연기를 포기하려고 했다. 근데 PD와 배우가 아니라 형, 동생으로 만난 자리에서 곽정환 PD가 내게 “연기 계속해라. 되든 안 되든 끝까지 살아남으면 언젠간 될 거다”고 했다. 그 말에 힘을 얻어 신인의 마음으로 돌아가 다시 연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1년 전, 곽정환 PD가 “농구드라마를 한 번 해보려고 하니 대한민국의 농구 역사를 공부해라”고 하더라. 물론 전체 오디션을 통해 내가 연기로도 충분히 준비돼있다는 것을 증명해냈지만, ‘빠스껫 볼’에 출연하기까지는 곽정환 PD의 힘이 컸다.

Q. 배우를 꿈꿔왔던 사람이 ‘연기를 그만둬야 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면 꽤 큰 사건이 있었나보다. 한 번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마음을 뒤집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하용진: 연기자가 워낙 많고 경쟁이 치열해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는 일이 많았다. 그게 결정적인 계기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의 나는 간절함이 부족했다. 이후 쉬면서 그런 나의 나태한 마음가짐을 반성하고 혼자 생각도 많이 했다. 곽정환 PD와 공형진 선배에게 조언도 들었지만, 혼도 많이 났다(웃음).

Q. 연기자는 언제부터 꿈꾸게 됐나.
하용진: 사실 고등학교 때부터 막연히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쉽사리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었다. 부산(하용진은 부산 출신이다)에서 고등학교를 마칠 때쯤에는 부산대학교 무역학과에 들어가며 평범한 삶을 그리기도 했다. 근데 1년 공부를 해보고 나니 역시 하고 싶은 걸 하지 않고는 못 버티겠더라. 아버지에게 그런 생각을 털어놨더니 “넌 기초가 부족하니까 정 연기를 하고 싶다면 연극학과에 가서 제대로 배워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그래서 1년 공부하고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들어가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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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달콤한 인생’의 단역 이후 드라마에 출연한 건 ‘주몽’이 처음이다. 배우로서 자신의 모습을 TV를 통해 보니까 느낌이 어떻던가. 대부분 배우는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고 말하던데(웃음).
하용진: 물론 나도 그랬다. 가족과 같이 보는데 나는 못 보겠더라. 혼자서 재방송으로 봤는데도 정말 못 봐줄 수준이었다(웃음).

Q. 배우로서 ‘이 길을 걷길 잘했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은 언제였는가.
하용진: ‘대왕세종’ 때다. 명나라 사신 역할이었는데, 어린 시절 사업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생활했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원래 6회분만 출연하는 작은 역할이었는데, 중국어에 이어 한국어까지 하게 되고 결국 최장수 캐릭터가 됐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일은 어느 날 최명길 선배가 나를 부르더니 “너 특채니, 공채니?”하고서 “너 눈빛이 정말 좋다. 연기 계속해라”고 칭찬해줬다. 물론 최명길 선배는 기억도 못하시겠지만(웃음). 선배에게 칭찬을 받았다는 점도 그렇고 뭔가 나의 능력으로 작은 배역을 끝까지 살려냈다는 점에 정말 기분이 좋았다.

Q. ‘빠스껫 볼’을 통해 다시 한 번 조명 받았다. 어렵게 잡은 기회인 만큼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하용진: 간절함이 생겼다. 지금까지의 나는 게으르고 나약했다. ‘빠스껫 볼’을 촬영하면서 생각과 행동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지금은 일정이 없어도 아침에 눈 뜨면 바로 밖으로 나와서 운동하고, 사람들도 만나면서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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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차기작에서는 어떤 역할을 맡고 싶나. ‘빠스껫 볼’에서 악역을 맡았으니 그 반대 역할도 욕심날법하다.
하용진: 아니, 그 반대다(웃음). 악역으로 끝을 보고 싶다. 누구나 멋진 역할을 하고 싶어 하겠지만, 악역은 이미지에 대한 부담도 있고 접근 자체가 쉽지 않다. ‘빠스껫 볼’을 찍으며 제대로 된 악역 연기를 펼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정말 제대로 된 악역으로 악역 계에 획을 긋고 싶다.

Q. 악역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당신은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나.
하용진: 믿고 볼 수 있는 배우? 작품을 떠나 ‘하용진이 출연하니 꼭 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할 정도의 힘이 있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 물론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웃음).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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