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M: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전 포스터
‘ECM: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전 포스터
‘ECM: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전 포스터

사실 누구나 자기만의 BGM을 갖고 있다. 무심코 동원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중요한 순간에는 늘 음악의 힘을 빌린다. 어느덧 11년이 넘게 마감을 하면서 키스 자렛의 음악을 들었다. 그의 피아노와 중독성 높은 신음소리(감탄 혹은 외침!)는 나에겐 원고의 신이 주는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ECM의 음악을 들었다. 지난 10월 중순에는 키스 자렛과 미셸 마카르스키의 ‘바흐: 6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음반을 구입했다. 그저 습관처럼 키스 자렛의 음악을 욕망한 덕분에 얼마 후 기대하지 않았던 소포를 받았다. ECM전의 티켓이었다. 로또에 뽑힐 행운은 없어도, ECM전 초대권을 받을 정도의 운은 있었나 보다. 9월 초에는 ECM 뮤직 페스티벌에 가서 랄프 타우너와 신예원의 공연을 봤지만, 전시에 관해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photo by Kyungsub Shin
photo by Kyungsub Shin
photo by Kyungsub Shin

독일의 세계적인 음악 레이블 ECM의 음악세계를 다룬 ‘ECM: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전이 호평 속에 11월 24일까지 연장됐다. 딱 한 마디로 평가하자면, 시간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놀라운 전시였다. 미술관에 3시간 이상 머문 것은 파리의 루브르, 오르세, 퐁피두 미술관을 방문한 이후 처음이었다. 인사동 아라 아트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앉아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전시가 시작되는 지하 4층에는 올 여름에 안토니오니의 헌정앨범 ‘La Notte’를 낸 케틸 비외른스타트의 음악(‘The Sea’)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때부터 뭔가 느낌이 좋았다. 1인용 카우치에 누워있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슬쩍 살펴보니, 각자 이곳에서 자기를 충만하게 만드는 음악을 발견한 것처럼 보였다. 타인에게 전혀 방해받지 않고 음악에 흠뻑 빠져 있었다. 이 전시를 처음에 오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동안 ‘음악을 전시한다’는 전시에 여러 번 갔지만, 제대로 음악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ECM전은 확연히 달랐다. 3시간 동안 음악을 들었지만, 아직도 부족하다는 아쉬움만이 남았다. 동행했던 지인은 아르보 페르트의 ‘타불라 라사’를 발견한 기쁨을 즐겼고, 난 만프레드 아이허가 키스 자렛과 탁구 치는 사진을 유심히 쳐다봤다. 친절한 지인은 아이허의 인터뷰가 담긴 mono.kultur #26권을 구입해 건네주기도 했다.

‘투사를 위한 철학’ 표지
‘투사를 위한 철학’ 표지
‘투사를 위한 철학’ 표지

ECM 전시만큼이나 최근 나를 놀라게 만든 인물은 프랑스 좌파 철학자 알랭 바디우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이 노학자는 “현재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공고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가짜 민주주의다. 자본과 금융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완전히 새로운 정치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사실 바디우의 글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정치와 철학의 관계를 다룬 ‘투사를 위한 철학’이나 현대 프랑스 철학에 대한 헌사 ‘사유의 윤리’는 초심자들에게도 어렵지 않고, 논리가 명확하다. 전자는 젊은이들을 타락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겐 기존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규범 질서의 창조가 사명이나 다름없다. 사유가 패배했다고 믿는 이들에게 ‘실천적 사유를 지켜나갈 것’을 촉구한다. 후자는 프랑스 철학자 13명에게 바치는 추도사다. 그의 스승뿐만 아니라 들뢰즈나 데리다처럼 불화의 관계에 있던 친구들에게도 경의를 바치는 글이다. 철학자에게는 죽음조차 잠재울 수 없는 특별함(진리를 향한 열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흔(2008년)에 출판된 책인 걸 고려하면, 역시 오래 살아남아야 이런 책을 쓸 권리가 주어지는 것 같다. 오늘날 그의 글을 읽어야 하는 것은 상식을 늘리거나 유행하는 철학을 에스프레소처럼 즐기기 위함이 아니다. 여전히 바디우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예술과 철학이 필요한 것은, 우리의 침체된 생활방식을 바꾸고 새로운 삶을 창조하기 위해서다.

연극 ‘천국으로 가는 길’
연극 ‘천국으로 가는 길’
연극 ‘천국으로 가는 길’

끝으로, 소개하는 연극은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위선을 고발하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다. 스페인의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다윈의 거북이’, ‘영원한 평화’)의 희곡 ‘힘벨베크(Himmelweg)’를 김동현이 연출했다. 후안 마요르가는 마드리드 왕립드라마예술학교 극작과 교수로, 발터 벤야민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철학은 연극과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위대한 작가들은 사고에 몸을 입혀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며, 철학하는 연극을 선보이고 있다. 막스 상을 3번이나 수상한 스페인을 대표하는 극작가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수용소에서 행복한 일상을 연기할 것을 강요당했던 유대인들의 이야기다. 실제로 나치는 그들이 자행한 살육을 은폐하기 위해 조작된 선전 영상을 만들었다. 수용소의 유대인 중 일부를 선발한 후, 평화로운 일상을 찍어 적십자 같은 국제 NGO 단체에 보내기도 했다. 극은 나치 강제수용소를 방문했던 한 여인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녀의 방문에 대비한 독일 사령관의 책략 때문이다. 그곳은 유대인을 동원해 만든 거대한 세트이자 한 편의 연극 무대에 불과했다. 강제수용소(조작된 공간)에 대한 기억을 제3자(적십자 대표)의 고백 및 유대인과 나치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무섭도록 잔인한 놀이가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11월 24일까지만 재연되니, 조금 서두르자.

글. 전종혁 대중문화 평론가 hubul2@naver.com
편집. 이은아 domino@tenasia.co.kr
사진. Kyungsub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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