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10] 영원한 인디뮤지션 한대수
[인디10] 영원한 인디뮤지션 한대수
1968년 한국대중음악계는 의미심장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그때까지 기성세대가 주도했던 대중음악의 판도에 청년세대들이 저항의 몸짓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 당대 청년들은 자신들을 대변해줄 뜨겁고 새로운 문화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미8군을 통해 팝과 포크 그리고 록이 물밀듯이 유입되어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구심점을 찾지 못했던 그들에게 한줄기 서광이 비쳤다. 대한민국 최초의 보헤미안 한대수가 장발을 치렁치렁 날리며 통기타 한 대를 둘러메고 미국 뉴욕에서 돌아와 한국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것.

한국 최초로 창작 록 앨범을 발표했지만 대중적 외면으로 생계마저 힘들어진 신중현은 쇼 단을 결성해 월남으로 떠나려 했다.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발표한 <펄시스터즈> 데뷔앨범이 예상치 못한 엄청난 반응을 불러와 사단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도 1968년의 일이다. 그리고 1969년. 더욱 강력한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영국의 미남가수 클리프 리차드가 내한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던 것. 이어 송창식, 윤형주로 구성된 남성듀오 <트윈폴리오>도 달콤한 화음으로 포크송의 대중화를 시작했다. ‘세상 말세’라는 극단적 반응을 보였던 기성세대들에게 문화적 충격을 안겨준 이 모든 일들은 당대의 청년들이 주도했다. 이 사건들은 사회적 통제가 극에 달해 숨 막힐 듯이 암울했던 1970년대를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로 대변되는 청년문화시대로 견인한 전조들이었다.

한국 모던 포크의 창시자 한대수는 1970년대 청년세대의 독립과 치열한 의식을 진정성 가득한 음악으로 표현한 시인이자 음악적 자립을 이룬 최초의 인디뮤지션이다. 날 것 그대로의 거친 소리였지만 차별적 음악을 구현한 그는 도전적이며 실험적인 작품 발표에 목말라하는 진정한 대중예술인이다. 그는 모두가 가려하는 편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자신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미래가 보이지 않는 고난의 길을 걷는 바람 같은 나그네가 되었다. 그 결과, 70년대 청년들의 고민을 대변했던 그의 처절한 외침은 영원한 시대정신으로 각인되었다.

사실 한국 대표 포크송 ‘행복의 나라로’를 비롯해 그가 빚어낸 수많은 명곡들은 단 한 번도 인기가요 차트에 오른 적이 없다. 김민기와 더불어 금지의 대명사로 각인된 그는 활동다운 활동을 해본 적도 없다. 그런 그가 지금의 인디뮤지션들에게 무한 존경을 받으며 음악적 뿌리로 추앙받는 이유는 대자본과 결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음악여정을 묵묵히 걸어온 인디뮤지션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음악과 사진을 통해 사랑과 평화를 외치며 자유로운 영혼에 온 몸을 내맡겼던 그는 자유분방한 한국 최초의 보헤미안이다.

지금도 그럴까?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그는 환갑의 나이에 얻은 딸 양호의 아버지로 알콜 중독에 시달리는 아내 ‘옥사나’를 돌보는 남편으로 가장의 본분에 충실한 착한 삶을 살고 있다. “제가 대수지 예수는 아니잖아요. 지금의 상황은 평생을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형벌이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6살이 된 양호가 너무 예뻐 지금의 삶을 견뎌내고 있습니다(웃음)” 한대수는 딸과 아내를 부양하기 위해 5년 전부터 CBS라디오 ‘손숙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의 진행자로 매일 아침 방송국으로 출근하고 있다. 진행자 교체에 있어 인정사정없기로 소문난 방송가이지만 그는 이번 봄 개편에도 끄떡없이 살아남아 질긴 생존력을 과시하고 있다.
[인디10] 영원한 인디뮤지션 한대수
[인디10] 영원한 인디뮤지션 한대수
1968년 기타 하나를 메고 이 땅에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늘 ‘열외인생’이었다. 동시대 젊은 엘리트의 상징으로 추앙 받던 김민기와는 달리 지나친 자유분방함으로 히피스타일의 기인으로 삐딱하게만 비쳐졌다. 사랑, 자유, 평화를 갈망하는 히피문화에 매료되었던 그가 유교적 군사독재국가의 지독한 보수적 사회 분위기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당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핵 물리학자였던 아버지 한창석과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박정자의 외아들로 부산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집안이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던 그는 3년 후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경남중학을 졸업하고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기타를 접한 것은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 김형수를 통해 ‘목포의 눈물’ 첫 소절을 배웠다. 이 시절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에 푹 빠져있었다. 17세 때 행방불명된 부친을 찾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가정과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불량서클에 가입하는 방황 기를 보냈다. 이때 상담교사의 도움으로 예술적 재능을 살려 시와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고교 졸업 후 할아버지의 권유로 1966년 New Hampshire 대학 축산과에 진학했지만 중도에 때려치우고 New York에서 사진을 전공하며 프로 사진가로 변신을 했다.

당시는 반전을 부르짖는 록과 포크의 전성시대. 미국을 뒤엎었던 반문화운동 속에서 히피즘에 중독되었다. 1968년 미국에서 ‘바나나 보이스’라는 이름의 듀엣 활동을 했던 한대수의 귀국 첫 무대는 무교동의 ‘세시봉’. 사회는 이백천이었고 함께 무대에 섰던 가수는 트윈폴리오와 조영남. 첫 공연을 이후 이백천의 주선으로 김동건이 사회를 본 ‘명랑백화점’에 첫 TV출연을 했다. 하모니카를 불며 기타를 치는 장발 한대수의 모습을 본 당대 최고 작곡가이자 악단 장이었던 이봉조는 “미국 히피들이 기타를 치면서 하모니카 분다고 들었는데 실제로는 처음 봅니다.“라고 놀라워했었다.
[인디10] 영원한 인디뮤지션 한대수
[인디10] 영원한 인디뮤지션 한대수
튀는 외모는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불러왔다. ‘주간 중앙’에서 ‘최초의 히피, 한국에 등장하다’는 기사를 내보내자 ‘우리나라를 떠나라’는 비난여론이 비등했다. 아무도 그를 진지하게 세상을 고민하는 진지한 싱어송라이터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 “당시 처음 TV에 나온 제 모습에 어머니가 부끄러움에 울음을 터트렸어요. 세상은 온통 제가 여자냐 남자냐에 관심을 보였죠. 노래를 하긴 했지만 마치 화성인이 된 듯 했습니다. 관객들은 음악보다는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듯 저의 긴 머리에만 관심을 뒀었습니다.” 장발 때문에 TV출연에 제동이 걸리자 자식을 이해 못한 어머니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와 명륜동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당시 성균관대 체육부장이었던 서유석은 “당시 동네깡패들로부터 기타 잘 치는 한대수를 지켜주기 위해 친하게 지냈고”고 회고하고 웃는다.

1969년 9월. 그는 두 여대생의 도움으로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톱을 켜는 전위적인 공연을 열었다. 10월에 내한한 클리프 리차드에 앞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먼저 들쑤셔 놓은 가수는 한대수다. 공식무대 활동이 금지된 그는 입대 전 대학가와 다운타운에서 주로 활동했고 명동 ‘오비스 케빈’에서 홍익대 미대출신 명신과 만나 동거에 들어갔다. 생활을 위해 디자인포장센터에 취업을 했지만 1971년부터 해군 수병으로 복무하며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1974년 돌아왔다. 그는 가수가 아닌 김민기의 ‘바람과 나’, ‘양희은의 ‘행복의 나라’ 작곡가로 변해있었다. 국내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데뷔음반을 내기에는 무려 6년이 걸렸다.

1974년 역사적인 데뷔음반 <멀고먼-길>은 당대 젊은이들에게 충격파를 날렸다. 맑고 고운 음색의 번안곡이 판치던 시기에 전주 없이 소리를 지르며 시작하는 그의 창작곡 ‘물 좀 주소!’의 불협화음은 파격이었다. 방랑하는 보헤미안이 자유와 사랑을 타는 목마름으로 호소했지만 끝내 암울한 현실에 절망했던 절규의 목소리였다. 한대수는 창작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던 한국대중가요계에 인식의 전환을 불러왔다. 자신의 이야기를 시로, 음악으로 읊조리는 절규에 가까운 그의 노래는 군사정권의 감시에 숨 막혔던 청년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단 8시간 만에 끝낸 4트랙 동시녹음도 놀랍지만 셀프 촬영한, 거친 흑백사진 속의 자화상이 삐딱하게 클로즈업되어있는 앨범커버 이미지는 강렬했다. 앨범사진과 타이틀곡은 어쩌면 자신이 걸어 갈 암울한 미래에 대한 예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계를 위해 코리아 헤럴드 신문 기자로 일했다. 그때 한국일보 후원 제1회 한국가요제에 서 김명희에게 ‘나 혼자’라는 곡을 선사해 10대 작곡가상 수상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1975년 2집 <고무신>은 그의 기나긴 방랑생활을 알리는 장례미사곡이 되었다. 철조망에 걸려있는 흰 고무신 한 짝이 의미심장한 2집 <고무신>의 재킷 사진과 뒷면의 톱 연주 사진만으로도 기존의 가요음반들과 널찍한 간극을 둔다. 노랫말에 대사를 넣는 등 2집은 실험적 향기가 진동했지만 ‘체제전복적‘이라는 이유로 마스터테이프는 강제 회수되어 파기되었다. 덩달아 1집도 판금조치가 내려졌다. 이는 한대수의 정신적 사망을 의미했다. 유신군사정권의 압박은 그를 다시 미국으로 내몰았다. 1977년 미국 뉴욕으로 돌아간 그는 3인조 록밴드 ‘징기스칸 (Genghis Khan)’의 리더로 활동을 했다. 수많은 제3세계 밴드들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지만 백인사회의 벽은 높기만 했다. 그리고 정신적 안식처였던 아내와의 이별까지. 그에게 남은 건 음악뿐이었고 유일한 비상구였다.

1집 신세기(1974), 2집 고무신 (1975), 12집 욕망(2006) (왼쪽부터)
1집 신세기(1974), 2집 고무신 (1975), 12집 욕망(2006) (왼쪽부터)
1집 신세기(1974), 2집 고무신 (1975), 12집 욕망(2006) (왼쪽부터)

한대수는 싱어송라이터 시대를 열었다는 역사성과 시대를 앞서간 음악적 실험을 국내 대중음악계에 수혈했지만 유신정권만이 그를 금지와 탄압으로 대접했을 뿐이다. 1990년 이후 개성을 존중하는 사회풍토가 형성되면서 그의 모든 작업이 재평가되는 움직임은 환영할 만 일이다. 1988년 민주화의 훈풍과 함께 해금이 된 그는 1989년 3집 <무한대>, 1990년 4집 <기억상실>, 1991년 5집 <천사들의 담화>로 이어진 봇물 출반으로 음악에 대한 갈증을 해갈했다. 3집은 록밴드 외인부대 출신의 기타 손무현, 시나위, 카리스마 출신인 드럼 김민기, 베이스 김영진과 이병우, 송홍섭, 배수연으로 구성된 2팀의 비범한 음악후배들과 꿈같은 2주일간의 녹음작업을 시도했다. 전혀 새로운 감각적 연주시도로 한국 록 음악사에 새로운 편곡과 세션의 장이 그의 3집으로 인해 열렸다.

아내와의 이별의 아픔을 담은 4집 ‘기억상실’의 앨범재킷은 다분히 전위적이다. 황량한 바닷가 모래사장에 말라비틀어진 나무 한그루가 무심히 서있고 흐트러진 한대수가 엎어져있는 모습을 합성한 앨범커버는 정신적 황폐함을 담았다. 한대수의 마지막 LP음반인 5집 ‘천사들의 담화’는 응접실에서 낡아빠진 200년 된 피아노와 동원 가능한 모든 어쿠스틱 음악도구를 이용해 녹음했다. 5집은 너무도 전위적인 마니아 용 음반이지만 ‘목포의 눈물’은 독특했다. 한동안 홀아비 신세를 면치 못하던 그는 1991년 뉴욕에서 몽골계 러시아인 옥사나와 재혼을 했다. 안정을 되찾은 그는 1992년 사진집 ‘맨하탄 빛의 광장’, 1997년 시집 ‘대지의 새벽’, 1998년엔 자서전 ‘물 좀 주소 목 마르요’를 출판하며 표현영역을 넓혀 나갔다. 1997년. 무대에 설 마음이 없던 그는 ‘97 후쿠오카 라이브무대’에 이어 2000년엔 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며 대중과의 교감을 시도했다. 2003년에는 다큐멘터리 한대수 ‘Music & Life’출시와 더불어 음악 아우들인 이우창, 김도균과 ‘한대수, 이우창, 김도균’삼총사 공연을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했다.

2005년 CBS라디오에 출연한 그는 의외로 자신을 탄압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두둔하는 심경을 털어놓아 뜨거운 논란을 불러왔다. “30년 동안 작고 가난했던 나라가 세계 경제 10위권으로 급성장한 예는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내 노래 ‘물 좀 주소’보다 줄 물조차 없었던 가난극복이 더 절실했다. 박 전 대통령은 나쁜 일도 많이 했지만, 국론분열보다 밝은 국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 분이 이뤄낸 경제적 성과만은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펼친 32주년 공연 실황 앨범을 발표했다. 필자는 이 앨범의 커버사진을 제공해 그와 깊은 인연을 이어갔다. 그해 제2회 한국 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했고 음악인생을 집대성한 박스음반을 발표해 의미를 더했다.

2007년 8월 서울시청 앞 광장. 한대수의 대표곡 ‘행복의 나라로’는 ’2020人 통기타 합주 기네스 세계기록 도전’에 도전했다. 2007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1876명이 동시에 연주한 록 그룹 ‘딥 퍼플’의 ‘스모크 온 더 워터’가 세운 세계기록 경신에는 실패했지만 한국 최초, 최다 합주기록으로 인증되었다. 당시 한대수는 심각한 건강상태였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식을 본 그는 아이 돌보는 일 때문에 매일 3시간도 잠을 못자는 생활로 만성 피로감에 시달렸던 것. 더구나 행사 전 ‘심장마비로 언제 사망할지 모르는 위중한 상태라 빠른 시일 내로 심장이식수술을 해야 된다.’는 청천 벽력같은 진단을 받았다. 행사 다음 날 심장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한 그는 “심장이 고장 나 바로 입원을 해야 될 상황이지만 무대 위에서 쓰러져 죽더라도 많은 대중과 한 약속을 지키려 무리해서 참석했다”고 말했다. 그의 도전은 그래서 세계기록 경신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인디10] 영원한 인디뮤지션 한대수
[인디10] 영원한 인디뮤지션 한대수
방송을 마치고 칼같이 귀가하는 한대수는 “다음 달에 신보 녹음에 들어갑니다. 신곡 3곡과 평소 제가 좋아하는 다른 가수의 노래 3-4곡을 리메이크해 년 말쯤 6년 만에 미니앨범을 발표할 계획입니다. 그동안 주위에서 차기 앨범발표에 대한 성화가 많았지만 가정을 돌보느라 시간도 없고 건강이 좋지 않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살아있을 때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앨범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차기 앨범은 국내는 물론 전 세계의 상황이 좋지 않기에 사랑과 평화를 전파하는 블루지한 노래로 준비하고 있습니다.”라며 반가운 소식을 전해준다. 어느덧 65세가 된 한대수는 건강상태가 최악이지만 새로운 앨범을 통해 뮤지션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지 않으려 죽을힘을 다하고 있다.

한대수 프로필

출생-1948년 3월 12일 부산

데뷔곡-1968년 옥이의 슬픔

대표곡-행복의 나라로, 물 좀 주소, 바람과 나, 호치민 등

경력수상-1970년 한국 디자인 포장센터 디자이너(3급 공무원) 근무

대한민국 국전 입상(사진부문)

1974년 코리아 헤럴드 사진기자

제1회 한국가요제 10대 작곡가상

1977년 뉴욕 Color Wheel, Chroma Copy사의 광고사진가

3인조 록밴드 징기스칸 결성

1991년 Nathaniel Lieberman Studio의 건축사진가

1993년 Speed Graphics사 매니저

1997년 국제 시인협회 Editor’s Award

2003년 KBS 가요대상 공로상

2004년 부산 국제 락 페스티벌 공로상

2005년 제2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출신학교-부산 경남고, 미국 뉴햄프셔대학교 수의학과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사진제공. C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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