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 사심으로 탐닉하기]엘르 패닝, 판타스틱한 소녀를 위한 눈물의 시
" />영화 <진저 앤 로사>

엘르 패닝은 제2의 다코타 패닝이 아니다. 할리우드 청춘 스타인 언니와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그녀는 꾸준히 자신만의 길을 찾고 있다. <진저 앤 로사>는 그 시작일 뿐이다.

“새침데기는 전혀 아니고, 아이처럼 진짜 해맑아요!”

우월한 패닝 자매가 국내에서 모 CF를 찍기 위해 방문했을 때, 그녀들과 인터뷰 약속을 잡은 패션지 후배에게 전화를 해서 부탁을 했다. 동생 엘르의 성격이 어떤지 한번 유심히 보라며, 사심 가득한 주문을 던졌다. 사실 내가 인터뷰 대신하면 안 될까, 하는 말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고 참았다. 친절한 후배는 인터뷰를 끝낸 후 약간 흥분한 어조로 자세히 설명했다. 예상대로, 엘르 패닝을 단숨에 정의하는 단어는 ‘천진난만’이었다. 언니 다코타 패닝은 이미 할리우드 스타의 기운이 넘친다면, 네 살 아래 동생 엘르는 너무 착하고 순진했단다. 그리고 패션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패션 에디터가 보기에도 유난히 귀여웠던 모양이다. 어쨌든 1998년생인 엘르 패닝은 어느새 키가 부쩍 자라서 170 센티미터에 육박했다. 후배는 “동생이 언니보다 얼굴이 더 작으면서도 팔과 다리가 길어서 사람 같지 않다”는 찬사까지 잊지 않고 착실하게 보고했다. “그래, 간지나네”라고 맞장구를 치면서 경청했다.

[여배우, 사심으로 탐닉하기]엘르 패닝, 판타스틱한 소녀를 위한 눈물의 시
(위)<썸웨어>(아래)" /><슈퍼에이트>(위)<썸웨어>(아래)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썸웨어>(2010)에서 깜찍한 엘르를 봤을 때는 언니 다코타의 걸출한 연기에 비해 약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미모 돋는 감독답게 소피아는 “역시, 예쁜 소녀만 잘 수집하네”식의 칭찬만 내뱉고 넘어갔다. 하지만 <슈퍼 에이트>(2011)의 앨리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열두 살 소녀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도도했다. 반항적인 끼보다는 강한 부드러움이 느껴졌다.1997년생 클로이 모레츠가 <킥 애스>(힛걸)에서 불온한 소녀의 귀여움이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준 적이 있다. 클로이와 비교하면, 엘르의 특이성은 다소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소녀로부터 내재된 여성성을 발견하는 즐거움은 오직 엘르의 몫이다. 하긴 그녀는 이름부터 엘르(그녀)니! <슈퍼 에이트>에서 인형처럼 진주 목걸이를 차고 나온 장면은 엄마 서랍장에서 슬쩍 한 것처럼 어색해서 웃음이 나왔지만, 그녀의 무표정에 우아함이 깃든 걸 놓칠 수는 없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트윅스트>(2011)에서 브이 캐릭터로 나올 때는 ‘십대 고딕녀’라는 애칭을 달아주고 싶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얀 코르셋 원피스에 눈과 입술만을 붉게 물들인 패션은 다크한 고스족과는 좀 달랐다. 유령이라서 고딕 문화의 불안과 욕망을 반영하기보다는 생명을 잃은 소녀의 순결을 상징했다. 누가 봐도 그런 패션은 인간계의 것이 아니었다. 얼굴이 후덕해지고 똥배가 나온 소설가 발 킬머 옆에서 나란히 걷는 그녀는 천상의 피조물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여배우, 사심으로 탐닉하기]엘르 패닝, 판타스틱한 소녀를 위한 눈물의 시
(위)<진저 앤 로사>(아래)" /><트윅스트>(위)<진저 앤 로사>(아래)

후배의 증언에 따르면, 엘르는 영락없이 진저다. 웃고 또 웃는다. 까르륵 웃음이 터지는 그녀와 접속하고 싶다면, <진저 앤 로사>(2012)를 놓칠 순 없다. 샐리 포터 감독의 이 영화는 1962년 런던을 배경으로 10대 소녀들의 사회 운동과 성적 해방을 다루고 있다. 이렇게 소개하면 여성들의 우정에 방점이 찍힌 것 같지만, 사실 엘르가 연기한 진저만 보인다. 아버지와 섹스하는 친구 로사에 대한 질투(일렉트라 콤플렉스)나 핵(전쟁) 공포가 그녀를 혼란에 빠트린다. 결코 내일(미래)은 오지 않을 것 같던 시절을 엘르의 눈물로 담아낸다. 아마도 샐리 포터는 자신의 아리고도 찬란한 10대 시절이 이렇게 흘러갔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최근에 본 영화 중에 여배우에 대한 집착(혹은 애착?)이 가장 큰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고 기억에 남는 것은 오직 엘르의 클로즈업뿐이다. 그녀에 대한 클로즈업으로 시작해 그녀를 위한 클로즈업으로 끝난다. 당혹스런 선택이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그녀와 영화를 찍는 누구도 굳이 다른 미장센을 만들 필요는 없었을 거다. 왜냐하면 그녀의 얼굴이 바로 미래를 위한 시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 외에는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다. 게다가 평범한 터틀넥 스웨터만 입어도 엘르의 패션은 충분히 완벽하다. 다소 엉뚱한 상상이지만, 훗날 엘르가 성장해 “남자에게는 선택인 것이 여자에게는 의무가 되죠!”라고 차분히 말하는 배우가 되면 어떨까? 스트린드베리보다는 이디스 워튼의 세계에 도착한 그녀의 연기를 보고 싶다. 그 전에, 소녀 엘르에게 푹 빠져들고 싶다면 당장 여성영화제로 가면 된다. <진저 앤 로사>는 24일 시작되는 올해 여성영화제의 개막작이다.

글.전종혁 (대중문화평론가) hubul2@naver.com
편집.홍지유 jiyou@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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