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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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 1990년대를 건강 미인이라는 타이틀로 살았던 그녀는 어느 새 건강한 사람의 대명사가 됐다. 말도 많고 사건사고도 끊이지 않는 연예계에서 김혜수에 대한 미담은 곳곳에서 들린다.

직접 대면한 김혜수는 그 미담의 완벽한 증거였다. 지난 21일 종영한 KBS2 월화드라마 <직장의 신>에서 그녀가 연기한 미스김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미처 못 다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는데, 미스김으로 지난 2달여의 시간을 살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애정이 가득한 동시에 객관적인 시각에서 슈퍼갑 비정규직 미스김과 사연 많은 김점순의 인생을 간파해낸 능력은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를 가슴으로 껴안아 사랑하는 것은 대다수의 배우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미처 보이지 않는 캐릭터의 인생, 그리고 그 캐릭터를 창조해낸 작가가 구태여 말로 설명하지는 않았던 행간의 의미까지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배우 김혜수가 부지런히 살아온 인생 속 스며든 지성은 자연스러운 감정적 동요 속에서도 객관적 통찰력을 갖게 했다.

그런가하면 다소 민감할 법한 논문표절의혹과 관련된 질문에 대한 답에서는 자신의 세계와 관련된 주변 사람들에게 어떠한 피해도 끼치고 싶지 않으려하는 그녀의 단정한 성품과 또 위기 속에서도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내려는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한 문장으로 축약하자면 김혜수는 우리가 익히 들었던 바로 그 ‘멋진 언니’ 김혜수가 맞았다는 말이다.



Q. 미스김이라는 캐릭터는 선뜻 선택할 수 있는 캐릭터였나. 배우이기에 당연히 할 수 있는 변신이었다고 말할 것 같지만.
김혜수 : 우선 나는 기본적으로 당연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주 두꺼운 시놉시스로 미스김을 처음 접했다. 캐릭터와 캐릭터간의 관계, 각 인물들 간의 연결고리, 아주 작은 배역까지도 신경을 쓴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보고 바로 하겠다고 했다. 제작사, 방송사, 작가의 전작, 연출자, 상대배우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처음 바로 그 퍼스트 클래스 신을 보고나서 ‘나 이거 하는 걸로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미스김이 이렇게 까지 사랑받게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다. 배우는 연기로 환호를 받기도 하고 냉혹한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그 역할을 시각적으로 선보이고 완성하는 것은 배우가 하는 일이 맞지만 사실은 많은 이들의 협업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글을 쓰고 또 다른 배우들과 조율해야하고, 연출자는 그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고. 그런 협업이 잘 맞아떨어졌을 때 시청자들은 캐릭터에 열광하게 된다. 이번 케이스가 그러했다. 물론 내가 주어진 떡만 먹었냐 한다면 그것은 아니지만.

Q. 드라마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마음을 흔들었나.
김혜수 : 최동훈 감독(영화 <타짜>와 <도둑들>로 김혜수와 함께 작업했다)의 영화를 하면서 느낀 것이 감독님은 정말이지 캐릭터를 표현하는 문장이 기발하다. 문학적으로 화려하게 글을 잘 쓴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익히 쓰는 단어인데 조합이 생경하다는 것이다. 바로 최동훈 감독에게서 느꼈던 부분을 드라마의 대본에서 느꼈다. 절묘하고 기발했다. 사실은 윤난중 작가와 최동훈 감독 두 분이 글 쓰는 방식은 정말 다르다. 그러나 같은 종류의 신선함을 느꼈다. 단어 자체가 대단히 기발한 것이 아니라, 그 활용법이 그러했다. 대중 매체에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간과할 수 있으나 자주 발견하기 힘든 재능인 것 같다. 센스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런 것이 너무나 좋았다.
김혜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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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예를 들자면.
김혜수 : 예컨대, 이런 것이다. 극중 대사에서 ‘아니, 어떻게 부장님 앞에서 그런 말을 해?’라고 장규직이 말하면 미스김은 ‘뒤에서 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만’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은 하지만 직접 그렇게 말은 못하지 않나. 너무 재미있었다. 웃기기만 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내포된 대사다. 그것이 캐릭터화 돼 전달되니까 어떤 변주를 줄 수가 있다. 그것은 결코 배우 혼자 해낼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다. 신뢰할 수 있는 대본을 만났고, 다소 낯선 유머를 캐릭터화 시켜 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겐 행운이었다.

Q. 작가에 대한 애정이 상당한 것 같다.
김혜수 : 정말이지 우리 작가 선생님 너무 좋았다. 사실 다루기 힘든 소재이기도 했다. 비록 원작이 있고, 원작 속 여주인공의 캐릭터 설정 역시도 놀랍지만 더 풍부하고 자유롭게 각색해 마음껏 영역을 확장했다. 경험도 별로 없는 작가 였는데 너무나 놀라웠다. 재능이 있으시고 필력도 있으신 분이다. 주인공 캐릭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배역 각각의 캐릭터가 다 있었다. 성공한 영화에서는 조연이나 단역 캐릭터가 읽히지만 드라마에서는 주변부 캐릭터는 주연 캐릭터를 위해 기능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다수다. 얼마나 놀라운 성과냐. 또한 이런 능력 있는 작가와 모든 것을 조율하고 객관적인 관점과 캐릭터 수위를 지켜줄 수 있는 연출자가 있었기 때문에 드라마가 산으로 가지 않았다. 단지 웃기고 까부는 드라마가 아닌 웃을 땐 웃지만 돌아볼 땐 돌아보고 그리고 진정성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공감하게 된 드라마였다. 내가 점쟁이도 아니고 결과적으로 어떻게 이런 구성원들이 적재적소에 모였을까 싶었다.

Q. 드라마 촬영 환경은 사실 무척 고된 곳일텐데, <직장의 신>의 분위기는 상당히 좋았다고 들었다.
김혜수 : 드라마를 제작하는 보편적인 환경이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시청자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이 맞지만, 때로는 눈도 뜨기 힘든데 촬영을 해야 한다. 그나마 배우가 힘든 것은 드러나지만 스태프들은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 장비도 무거운데. 그래도 우리 촬영장에서는 스태프와 배우가 서로 친했고, 배우들끼리도 너무 친했다. 배우가 연기를 하면서 시청자에게 검증받기 전 가장 힘이 되는 것은 현장에서 나를 믿어주는 이들이다. 배우도 작품을 하면서 확신을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직감을 따르고, 최대한 집중해 막연한 것들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이 때로는 엇나갈 때도 있으니까. 그런데 우리 현장에서는 다들 나를 아껴주고 믿어줬다. 그런 따뜻한 기운들이 용기가 됐다. 또 다들 나를 ‘미스김씨’, ‘미스김 선배님’, ‘스김형’, ‘김씨’라고 불러줬다. 혜수씨 혹은 혜수누나는 없었다. 현장에서 나는 당연히 미스김이었다.
김혜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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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미스김 엔딩을 이야기해보자. 장규직(오지호)과 러브라인이 이뤄질 가능성은 있다고 보나.
김혜수 : 미스김과 장규직의 관계는 사랑과는 무관하다. 그걸 염두에 두고 연기한 적이 없다. 5회 엔딩에서 키스를 하는데, 미스김은 아무 감흥 없이 가버린다. 1차적으로는 미스김이 따귀를 때려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가장 미스김다운 반응이었다. 그의 행동, 존재 자체를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미스김은 아마추어가 아니다. 따귀를 때리거나 하는 액션은 사회 초년생이나 용감한 사람은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미스김은 이미 많은 조직을 경험한 여자다. 아예 그런 식으로도 응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규직을 파리 정도로 치부해버린다.

Q. 장규직은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일까.
김혜수 : 나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사람의 모든 행동에 전조가 있거나 논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드라마니까 어떤 근거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데 장규직도 그렇게 말하지 않나. 자기의 행동을 자기도 믿을 수 없다고.

Q. 그런데도 미스김은 장규직을 살리려고 화재가 발생한 공장으로 찾아가긴 했다.
김혜수 : 남자주인공이 여자를 찾아가거나 여자주인공이 남자를 찾아가거나 하는 행동이 사랑 때문이라고 우리가 학습이 돼있기 때문에 흔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았다. 작가가 전형적인 로맨스에 대한 기대치를 부흥하기 위해서 그렇게 쓴 것도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보다는 미스김과 장규직은 다른 감정으로 연결돼있었다. 같은 시점에 같은 사고로 가장 소중한 누군가를 잃었고, 그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또 다른 삶을 결정한 경험이 이들의 공통점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길을 걷다 마주치게 되고 함께 그 비밀을 풀게 됐다. 이성적인 이끌림보다 더 큰 다른 차원의 동질감이 그들에게 있었고 그 정체를 풀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스김과 장규직은 엮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Q. 미스김의 인생에서 은행 화재사건은 큰 분기점이 됐다. 김혜수의 인생에서도 그런 분기점은 있었을 것 같다.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생각이 변화한 시점이 있었을 텐데.
김혜수 : 아마도 그 계기는 수없이 많았을 것이며, 무엇 하나 때문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고민들은 내가 배우이기 때문에 한 것은 아니었고 인생 전체를 두고 고민한 것이다. 나는 청소년기 일을 시작했고,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면서 과연 이 일을 하기에 나는 적합한 사람인가라는 고민을 끊임없이 했다. 결론적으로는, 내가 어떤 기간을 정했다. 인생에 있어 다른 것을 경험해보기로 생각하던 시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 일을 했던 이유는, 청소년기 인격적으로 형성되지 않았을 때 일을 시작했고 당시로서는 이렇게 오래할 지는 몰랐지만 결국은 내 세계관, 삶의 방식, 나의 취향들이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일과 나를 분리시키려고 했지만, 그것이 무의미해진 것이다. ‘한 때 내가 배우였어요’라며 떠나보내기에는 내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김혜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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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민감한 질문이 될 수도 있는데, 드라마 시작 전에 논문표절의혹 탓에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김혜수 : 시작하기 전이 아니라 촬영 도중이었다. 만약 드라마 시작 전이라면 안 했을 것이다. 내가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나도 사람이라 놀랐고 와 닿지 않았고, 또 기억이 잘 안 났다. 하지만 어떤 검증을 통해 그런 결과가 나왔다면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야 했다. 왜 그런 문제가 생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과가 중요했다. 없었다면 좋았을 일이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Q. 드라마 제작보고회가 열리기 직전 무대 위에 등장해 입장을 밝혔고, 그때부터는 긍정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김혜수 : 이미 소속사를 통해 입장을 밝히기는 했지만, 제작보고회라는 것을 통해 언론인들과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언론 쪽에서도 누군가가 총대를 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민망해하며 답을 했을 테고. 일단은 드라마 제작보고회는 내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런데 나로 인해 언론에 계신 분들도, 또 내 옆에 앉아있을 동료 배우 및 드라마 관계자들이 불편한 공기를 느끼고 서로 민망해해야만 하는 상황이 빚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제작보고회는 제작보고회 대로 하고, 그에 앞서 나의 입장을 말하고자 했다. 누군가는 김혜수답게 당당하다고 말했지만, 그런 불민한 일로 당당할 이유는 없었다. 실제로도 당당하지도 않았고, 불편했고 위축돼있었고, 그 자리에 계신 다른 관계자들께 민망하고 미안했다. 또 나는 나에 대한 어떤 실망감을 일을 통해 해소하고 내 영역 안에서 신뢰를 회복해야하는 것이 맞다 생각했다. 마음이 불편해도 가능하면 감정적으로 빠지지 않으려고 했다. 일부러 웃고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캐릭터에 몰두하려고 의도적으로 더 집중하기는 했다. 2주 정도의 시간은 매우 힘들었다.

글. 배선영 sypova@tenasia.co.kr
사진. 채기원 ten@tenasia.co.kr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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