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기울이면]내레이션의 변신, 방송에 색을 입히다
방송화면" />tvN <더 지니어스:게임의 법칙> 방송화면

TV 프로그램에 삽입되는 ‘목소리’의 역할은 대부분 비슷하다. 크게 튀지 않고 무난한 톤으로 장면과 장면 사이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 지금 방영되고 있는 프로그램 중에서는 MBC <일밤>‘아빠!어디가?’, ‘진짜 사나이’, KBS2 <인간의 조건>, SBS <정글의 법칙> 등이 그렇다. 모든 프로그램이 그런 건 아니다. tvN <재밌는TV 롤러코스터>의 인기 코너 ‘남녀탐구생활’의 주인공은 정형돈과 정가은이었다. 하지만 그들 못지않은 관심을 받았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내레이션을 맡은 성우 서혜정이다. 감정 없이 말끝에 ‘요’자를 붙여 짧게 내뱉는 말투는 <롤러코스터>의 상징이 됐다. 서혜정 성우는 얼굴 한 번 화면에 비추지 않고 오로지 목소리로만 유명세를 탔고, <롤러코스터>는 그 바람을 타고 시즌3까지 이어졌다. 지금도 TV프로그램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들린다. 몇몇 프로그램에서 그 목소리는 기본적인 ‘내레이터’의 역할을 넘어, 프로그램에 특별한 색깔을 입힌다. 음식 속 양념처럼 방송을 더 감칠맛나게 하는 목소리들에 대해 알아보자.

[귀를 기울이면]내레이션의 변신, 방송에 색을 입히다
방송화면" />tvN <푸른 거탑> 방송화면

<푸른 거탑>_‘찌질’했던 군생활을 회상하는 비장한 목소리
‘남녀탐구생활’로 재미를 봤던 tvN은 여전히 목소리를 영리하게 사용한다. <롤러코스터> 속 하나의 코너였다가, 인기를 얻어 따로 독립한 <푸른 거탑>도 그 중 하나다. 군대 에피소드를 콩트 형식으로 꾸민 <푸른 거탑>에서 내레이션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스타일이 독특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극중 막내 역할을 맡은 이용주. 그는 비장하고 음산한 목소리로 에피소드들을 정리한다. 한 줄씩 덧붙여지는 내레이션은, 겉으로는 대단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우스꽝스러운 <푸른 거탑>의 분위기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그렇게 초여름 밤의 괴담 배틀은 사단장님의 고추를 딴 말년 최병장의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났다.” “난 그렇게 대대장님에게 엄청난 미움을 사게 됐고, 제대하는 그날까지 포상휴가는 구경도 하지 못했다.” 이런 식이다.

[귀를 기울이면]내레이션의 변신, 방송에 색을 입히다
방송화면" />tvN <더 지니어스:게임의 법칙> 방송화면

<더 지니어스: 게임의 법칙>_목소리가 곧 룰이다
tvn의 또 다른 예능프로그램 <더 지니어스: 게임의 법칙>은 음성을 변조시킨다. 얼굴을 붕대로 감은 한 정체불명의 남자가 모니터를 통해 등장하는데, 그의 목소리는 악마나 사이보그를 연상케 한다. 주된 역할은 게임 룰을 설명하는 것. 그는 항상 “안녕하십니까, 지니어스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라는 말로 게임 시작을 선언한 뒤, 누가 탈락했고 몇 명이 살아남았는지를 공표한다. 그리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게임 규칙을 출연자들에게 알려준다. 목소리는 룰을 설명하는 것 외에도 <더 지니어스> 특유의 긴장된 분위기를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목소리가 주는 위압감은 게임 규칙의 엄격함을 상징한다. 가장 높은 인지도와 뛰어난 언변으로 항상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던 김구라도 “탈락하신 김구라 씨는 명찰과 가넷을 반납해 주십시오”라는 말에 순순히 따라야 했다. 변조된 기계음은 냉정할 수밖에 없는 서바이벌 게임을 진행하기 위한 최적의 목소리였다.

[귀를 기울이면]내레이션의 변신, 방송에 색을 입히다
방송화면" />KBS <직장의 신> 방송화면

<직장의 신>_현대극 드라마에 사극톤의 목소리가?
극중 인물들의 속마음이 내레이션으로 깔리는 것 정도가 전부이던 드라마에도 색다른 ‘목소리’가 등장했다. 얼마 전 종영한 KBS2 <직장의 신>에는 매회 오프닝 때 성우의 목소리가 삽입됐다. 목소리는 “IMF 이후 16년, 비정규직 노동자 800만 시대”로 시작해 ‘국내 최초 자발적 비정규직’인 미스김(김혜수)을 소개한다.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성우 김종성이다. 그는 MBC 라디오 <격동 50년>, KBS <용의 눈물>, <태조 왕건>, M.net <슈퍼스타K3>까지 굵직굵직한 작품에서 내레이션을 해온 ‘국민 성우’. 주로 사극에서 들리던 그의 목소리가 현대극 <직장의 신>에 삽입돼 어색할 법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매회 오프닝에 반복적으로 삽입되는 멘트는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짚는 내용이다. <격동 50년>과 각종 다큐멘터리 경력이 있는 성우의 목소리와 잘 어울릴 수밖에 없다. 또한 그의 목소리가 주는 비장한 느낌은 다소 과장된 미스김의 활약상과 겹쳐지면서 되레 코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원작 일본 드라마에서 옮겨온 설정이 ‘명품 목소리’와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이다.

“누구나 한때는 자기가 크리스마스트리인 줄 알 때가 있다. 하지만 곧 자신은 그 트리를 밝히던 수많은 전구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더 중요한 진실을 알게 된다.” <직장의 신>에 삽입된 정유미의 내레이션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으며 화제가 됐다. 방송에 삽입되는 독특한 목소리들은 굳이 자기가 크리스마스트리가 되려 하지 않는다. 대신 형형색색의 전구가 되어, ‘방송’이라는 나무를 밝힌다.

글. 기명균 kikiki@tenasia.co.kr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