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손님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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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펍’에서 일일 DJ를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DJ는 아무나 하나? 그냥 음악을 선곡해서 틀면 된다고 했다. 어렸을 때 DJ가 음악을 틀어주고 느끼한 입담을 들려주는 술집에는 가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이제 사라진 유물 같은 것이 아닌가? 도끼빗으로 한껏 멋을 낸 ‘DJ 권 오빠’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는 일이라 즐거울 것 같았다.

2009년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처음 문을 연 엠펍은 술과 음식, 라이브 공연이 어우러지는 ‘펍’ 형태로 운영이 된다. 3호선버터플라이, 윈디시티, 킹스턴 루디스카, 9와 숫자들 등 홍대 신(scene)의 밴드들이 이곳에서 공연을 했다. 홍대 밖에서 인디밴드를 상시적으로 만날 수 있는 괜찮은 공간이었다. 이후 작년 9월 여의도 IFC몰에 2호 엠펍이 문을 열고, 이어 타임스퀘어 엠펍은 문을 닫았다.

엠펍에서는 지난 5월부터 ‘The Music Strikes Back’이라는 제목으로 DJ가 선곡을 하는 라디오 쇼를 진행 중이다. 제목이 거창하다. 주최 측이 이런 기획을 하게 된 이유는 음악을 감상하는 분위기를 되찾기 위해서라고 했다. 영등포 엠펍에서는 술과 함께 음악을 즐기는 분위기가 형성됐는데 여의도로 넘어오면서 직장인 손님이 늘었고, 자연스레 보통의 술집과 다름없는 분위기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음악인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선곡해보자는 아이디어로 시작됐다. 이후 관계자들과 접촉을 넓히자는 의미에서 음악인 외에 다양한 사람들이 DJ로 나서게 됐다. 정원영, 이상은, 신사동호랭이 등 뮤지션들부터 영화감독 조원희, 만화가 김양수, 음악평론가 김작가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엠펍 일일 DJ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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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두 시간 동안 서른 곡 정도를 틀어야 했다. 선곡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호기롭게 잘난 체도 좀 해야겠고, 그렇다고 내 취향이 돈 주고 오는 손님들에게 소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계몽(?) 차원이 있는 기획이니만큼 양질의 음악을 골라야 한다. 순간 스타들이 좋아하는 음반을 다섯 장 고르는 텐아시아의 연재코너 ‘올댓뮤직’에 왜 어려운 음악만 소개되는지 이유를 알겠더라.

선곡의 테마를 정할까 했다. ‘술 권하는 음악’ ‘영화 음악’ ‘기타 연주 음악’ ‘소울 음악’ ‘블루스’ ‘오직 여성들을 위한 음악’ 등이 떠올랐다. 헤비메탈은 너무 시끄러울 것 같아서 지레 겁이 났다. 직업이 기자이니만큼 인터뷰했던 음악인들의 곡을 고르는 것도 뜻 깊을 것 같았다. 일단 박스 안에 들어있는 CD를 뒤졌다. 나도 잊고 있던 CD들과 오랜만에 재회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CD 속 음악들은 MP3 파일로 변환돼 컴퓨터 하드 안에 들어가 있다. 순간 내 자신이 한심해졌다. 음악기자랍시고 폼을 잡고 다니지만, 정작 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잊고 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엠펍에서 틀 음악을 고르면서 기분은 좋더라. 남에게 들려주기 위해 고르는 음악이니까. 처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면 괜찮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디제잉이 실시간 중계가 된다고 했다. 죽이는 곡을 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곡을 고르다 보니 사람이 많이 올지 걱정이 됐다. 유명인이 아니기에, 날 보러 엠펍에 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인을 모으는 것은 폼이 나지 않았다. 여성독자들이 보러 오길 기도했다.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DJ를 맡은 6월 5일, 다음날이 휴일이라 그런지 다행히 손님이 많았다. 부스 안에 들어가 DJ 장비를 다루는 방법을 간단히 배웠다. 왠지 첫 곡으로 어울릴 것 같은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Our Day Will Come’을 제일 먼저 틀었다. 이후 뭔가 있어 보이는 소울라이브의 ‘Breakout’을 들려줬다. 그런데 아무도 음악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나마 친숙할 것 같은 최우준과 웅산의 ‘매일 매일 기다려’, 타란티노 영화 〈재키 브라운〉에 삽입된 블러드스톤의 ‘Natural High’, 〈트레인스포팅〉 엔딩 크레디트에 흐르는 데이먼 알반의 ‘Closet Romantic’을 연달아 틀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영화들을 보긴 봤을까 하는 걱정이 엄습했다. 왜 난 음악을 틀며 눈치를 보는 것인가? 한편으로 여성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의연함을 지키려 했다.

고맙게도 텐아시아 동료기자들이 격려 차 방문했다. 그들이 부스 앞에 진을 치자 겉에서는 여성 팬들에게 둘러싸인 것인 것처럼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란다 커를 닮은 배 모 기자가 엠펍 매니저에게 자신을 여성 팬이라고 소개하자 믿는 눈치였다. 으쓱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기계를 계속 만져댔다. 맥주를 한두 잔 먹자 취기가 올랐다. 3호선버터플라이, 서울전자음악단, 슬로우 쥰, 퓨어킴 등의 음악을 들으니 그들과 인터뷰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마빈 게이의 ‘What’s Going On’을 틀자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빌리 홀리데이, 지미 스미스, 엘모어 제임스 등 재즈와 블루스를 마구 틀어댔다. 멘트도 해야 했지만 부끄러워서 할 수 없었다. 매 곡마다 곡에 대한 설명을 곁들인 이도 있었고, 음악만 튼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뭐, 모로 가든 좋은 음악만 들려주면 되는 것 아닌가? 디제잉이 막바지로 흐를 무렵 한 여성이 부스로 다가왔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긴장됐다. 그녀는 좀 전에 나온 노래 제목을 물어봤다. 마이클 잭슨의 ‘The Way You Make Feel’. 조금 김이 샜다. 내 연락처를 물어보지 않아서 김샌 것이 아니다. 이날 튼 서른 네 곡의 곡 중 유일하게 제목을 물어본 곡이 마이클 잭슨 곡이라서 김샌 것이다. 아직은 더 많은 구원이 필요한 걸까? 매일 밤 음악을 구하기 위한 정의의 사도들의 ‘The Music Strikes Back’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6월 5일 엠펍 선곡
01. Amy Winehouse ‘Our Day Will Come’
02. Soulive ‘Breakout’
03. 최우준 ‘매일 매일 기다려(feat.웅산)’
04. Bloodstone ‘Natural High’
05. Damon Albarn ‘Closet Romantic’(트레인스포팅 OST)
06. David byrne ‘Waters of March (Aguas de Mar?o)’
07. Lou Reed ‘Satellite Of Love’
08. 서울전자음악단 ‘고양이의 고향노래’
09. 슬로우 쥰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10. 롤러코스터 ‘Last Scene’
11. Janelle Monae ‘Wondaland’
12. 퓨어 킴 ‘요’
13. Marvin Gaye ‘What’s Going On’
14. Billie Holiday ‘I Wished On Moon’
15. Jimmy Smith ‘On The Sunny side Of The Street’
16. Pat Metheny ‘Au Lait’
17. Elmore James ‘It Hurts Me Too’
18. Vangelis ‘One More Kiss Dear’(블레이드 러너 OST)
19. Ennio Morricone ‘The scillian clan’
20. Sister Sledge ‘We Are Family’
21. Ohio Players ‘Love Rollercoaster’
22. Larry Carlton ‘Smiles And Smiles To Go’
23. Michael Jackson ‘The Way You Make Me Feel’
24. Earth Wind & Fire ‘That’s The Way Of The World’
25. Sioen ‘Crusin’’
26. 3호선버터플라이 ‘맥주’
27. 아소토 유니온 ‘Think About’ Chu’
28. RH Factor ‘Poetry feat. Q-tip & Erykah Badu’
29. 김윤아 ‘봄날은 간다’
30. 아시안 체어샷 ‘소녀’
31. Brad Mehldau ‘Where Do You Start’
32. Bernard Herrmann ‘A Reluctant Hero/Betsy/End Credits’(택시 드라이버 OST)
33. Skip James ‘Crow Jane’
34. Stan Getz & Kenny Barron ‘East of the Sun (And West of the Moon)’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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