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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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자면, 오기환 감독의 한중합작영화 <이별계약>을 그리 인상 깊게 보지 못했다. 호감을 가지고 보기엔, 지나치게 진부한 설정들이 내내 몰입을 방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에서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한 건, 배우들의 호연 때문이었다. 특히 병약한 연인을 바라보는 펑위옌의 슬픈 눈빛엔 사람을 잡아끄는 짙은 호소력이 있었다. 평소 관심에도 없던 펑위옌에게 덜컥 인터뷰를 신청한 것도 그 때문이다. 펑위옌이란 배우가 궁금했다.

인터뷰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펑위옌과의 만남이 그랬다. 그는 기대 이상으로 유쾌했고, 솔직했고, 속이 알찼으며, 매너도 좋았다. 유연한 사람, 자기 일에 프로인 사람. 그에게서 받은 인상이다.

인터뷰가 끝난 후,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이별계약> 배급사의 한 직원이 “인터뷰할 때 경직되는 한국배우들은 펑위옌의 유연함을 배워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에 100% 공감한다. 만약 아래의 인터뷰에서 펑위옌의 대답이 다소 가볍게 느껴진다면, 그건 활자가 담아내지 못한 분위기 탓이며, 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살리지 못한 기자의 탓이다.

Q. 초면에 실례인데, 굉장히 동안이다.(그는 1982년생이다.)
펑위옌:
오늘 화장이 잘 먹어서.(웃음) 그리고 사실 마스크를 하나 붙이고 그 위에 화장을 해서 좋게 보이는 거다. 하하하. 농담이다.

Q. (웃음) 몇 번째 한국 방문인가?
펑위옌: 세 번째 방문이다. 2003년에 추자현 씨와 함께 한 드라마로 처음 내한했었다. 두 번째도 일 때문에 왔고. 이번에는 영화 <이별계약>을 들고 오게 됐는데, 중국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돼 더욱 영광이다.

Q. 말한 대로 추자현 씨와 <연향>에서 호흡을 맞췄었다. 유하나 씨와 한국-대만 합작영화 <6호출구>도 찍었고. 이번 <이별계약>은 한중합작 영화인데, 합작품과 인연이 깊은 것 같다.
펑위옌:
‘합작 왕’으로 불러 달라.(웃음) 배우라는 직업이 즐거운 이유는,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과 함께 작업할 기회가 있다는 게 아닌가 싶다.

Q. 중국, 홍콩과의 합작품에도 여럿 출연한 걸로 안다. 나라마다 분위기가 다를 텐데, 한국 스태프들과의 작업은 어땠나?
펑위옌:
합작 영화는 소통 면에서 어려움이 있지만, 그만큼 배우는 것도 많다. 나라마다 촬영 방식에 차이가 조금씩 있는데, 한국 스태프들은 섬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령, 촬영 시간이나 진행 방식에 있어서 한국 분들은 엄격하고 정확한 것을 선호하더라. 최상의 상태에서 촬영에 임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 같았다.

Q. 의외의 대답이다. 사실, 한국영화의 현장스타일이 그렇지 않거든.(웃음) 시간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작업하는 건, 미국 스타일이다.
펑위옌:
아, 그런가?(웃음) 몰랐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든다. 합작품이다 보니 한국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고 자존심을 걸고 작업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서로 더 조심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 보니 그랬을 것도 같고. 또 그런 마음으로 만든 작품이라, 더 좋은 결과가 있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이별계약>은 중국에서 개봉 이틀 만에 제작비 3,000만 위안(한화 약 54억 원)을 모두 회수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현재까지 <이별계약>이 중국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1억 9,000만 위안(한화 약 350억 원). 역대 한중합작영화 중 최고의 흥행 기록이다.)
펑위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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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별계약>은 한국 관객들에겐 굉장히 익숙한 스타일의 영화다. 초반에 발랄하게 웃기다가, 후반에 울음을 쏟게 한다는 점에서 ‘한국형 멜로’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연기하면서 다른 멜로 영화와 어떤 차이를 발견했나?
펑위옌:
사람의 마음이나 감정은 전 세계 어디를 가나 비슷한 것 같다. 멜로라는 장르는 어느 정도 정해진 이야기 전개 방식과 틀이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어떤 점을 변환하고 보완해 나가느냐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이별계약>이 한국관객들에게 얼마나 익숙한 패턴의 영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배우로서 작업에 임할 때 ‘현재를 사는 젊은이들의 삶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연기했다.

Q. 사실 이 포맷은 한국에서는 10여 년 전에 유행했던 스타일이다.
펑위옌:
관객의 입장에서 이별계약이라는 소재가 진부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모르는 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커플들은 “우리 이런 계약을 해 보자”라고 말하고 있을지. 그리고 사랑과 연애에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몇 가지 법칙들이 있잖나. 그런데, 잠깐. (슬픈 표정으로) 혹시 내 연기가 10년 전, 연기 같다고 느꼈던 건가?

Q. 아, 그렇게 느꼈다면 오해다. 나는 이 영화가 배우들 덕분에 빛을 발했다고 생각한다.
펑위옌:
사실 청혼하는 장면을 찍을 때 “프로포즈를 꼭 이렇게 해야 하나” 싶긴 했다.(웃음) 하지만 다르게 생각했을 때, 여성들이 그런 프로포즈를 좋아하긴 하잖나. 무릎을 꿇는다거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고백하는 이벤트 성 프로포즈를 말이다. <이별계약> 속 장면들을 너무 진부하게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Q.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프로포즈를 하고 싶은가?
펑위옌:
생각나는 프로포즈는 다 영화에서 봤던 것들이라… 케이크를 자르면 반지가 나온다든지 하는, 그런 거.(웃음) 이건 어떨까 싶다. 예전에 출연한 <점프아쉰>에서 체조선수 역을 했는데, 그걸 이용해서 하는 거다. 뒤로 공중제비를 세 번 한 후 프러포즈를 하면 어떨까 싶다. 너무 바보 같아 보이려나.(웃음)

Q. 오기환 감독이 중국에서 다시 작업한다면, 당신과 바이바이허와 함께 하고 싶다고 했더라.
펑위옌:
그럼 <이별계약2>인가? 여자주인공이 알고 보니 죽지 않았다, 이런 설정의? 아니면 (<사랑과 영혼> OST를 흥얼거린 후) <사랑과 영혼>처럼 귀신과 사람의 사랑 이야기여도 좋을 것 같다.

Q. 오늘 보니 굉장히 유머러스한데, 평소에도 그런가?
펑위옌:
오~ 평소엔 진중한 사람이다.(웃음) 다만 (작품)홍보는 재미있게 하자는 주의다. 기자 분들이 이렇게 힘들게 일하시는데 재밌는 이야기라도 해드려야 조금 덜 피곤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홍보는 유연하게 하는 편이다.
펑위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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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현지에서는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맡은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는 배우’로 평가받더라.
펑위옌:
(기분 좋은 말에, 컵을 들어 올리며) ‘cheers!’ 고맙다. 평상시의 나는 잘 모르겠지만, 작업할 땐 정말 열심히 한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숙제도 꼼꼼하게 하고. <이별계약>의 경우 작업했던 멜로영화들 중에서는 감정을 쏟아내야 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그거 빼고는 전체적으로 즐겁게 작업했다.

Q. 대만에서 한국영화나 드라마의 인기가 높다고 들었다. 혹시, 당신도 즐겨 본 게 있는지.
펑위옌:
많다. 일단, 처음 본 한국 드라마가 <가을동화>다. 캐나다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봤다. 데뷔 후에 본 첫 번째 한국 영화는 전지현 씨 주연의 <엽기적인 그녀>다. 여러 장르를 좋아하는데, 박찬욱 감독님의 <올드보이>와 <스토커>도 재미있게 봤다. 그리고 (엄지를 치켜들며) 최민식 선생님을 존경한다. 이영애 씨의 경우엔 중화권을 통틀어 정말 많은 팬을 소유한 배우고. 아, 정우성 씨! 정우성 씨도 빼 놓을 수 없지.

Q. 정우성 씨, 잘 생겼지!
펑위옌:
좋아하나?

Q. 그럼! 대한민국 모든 여성들의 로망이 아닐까 싶다.(웃음)
펑위옌: (놀라며)오~! MAMA 시상식 때 봤는데, 정말 젠틀맨이더라. 함께 작업해 보고 싶은 배우? 너무 많다. 당신이 생각하기엔 내가 누구와 어울릴 것 같다. 나보다 더 정확하게 볼 것 같은데.

Q. 글쎄. 가장 처음으로 봤다는 드라마, <가을동화>의 송혜교 씨가 어떨까?
펑위옌: 송혜교 씨, 많은 연락 바랍니다.(웃음)

Q. (웃음)캐나다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배우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지 듣고싶다.
펑위옌:
캐나다에서 유학생활을 하다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대만으로 돌아왔다. 상을 치르던 중, 외할머니를 알던 감독님이 조문을 오셨는데, 그 분이 대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의 감독님이셨다. 그 분에게 캐스팅 되면서 연예계에 데뷔하게 됐다.

Q. 드라마틱한 데뷔기다. 연기에는 원래 관심이 있었던 건가?
펑위옌:
배우가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런데 어릴 때 광고에는 많이 출연했었다. 외할머니 장례식 때 오셨던 감독님도 사실은 내가 어릴 때 출연한 CF의 감독님이셨다. 성인이 된 나를 보고 같이 작업해 보자고 하더라. 원래는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연기를 시작했는데, 주위에서 “너, 잘 한다, 잘 한다” 하니까, 뭣 모르고 회사랑 덜컥 3년을 계약해 버렸다. 젊었을 때, 잘 생각했어야 하는데. 하하하하. 그렇게 연기를 시작한지, 벌써 11년이 됐다. 시간이 정말 빠르다.
펑위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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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원래 꿈은 뭐였나?
펑위옌:
농구선수. 그 꿈을 포기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캐나다에서 흑인 친구와 농구경기를 하는데, 그 친구가 자꾸 덩크슛을 하더라. ‘난, 안되겠다’ 좌절하고는 거기에서 바로 항복해 버렸다. 어릴 때 그림을 배워서, 화가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음… 갑자기 든 생각인데, 내가 아주 똑똑한 결정을 한 게 아닌가 싶다. 배우가 되면 이 모든 걸 할 수 있잖아.

Q. 꿈보다 해몽이 좋다.(웃음) 연기라는 것이 원래 원했던 것이 아니어서 초반에는 시행착오를 겪었을 텐데, 언제부터 내가 배우로 살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나?
펑위옌:
4~5년 정도 됐다. 계약문제가 생겨서 1년 정도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있었는데, 그때 나 자신과 많은 대화를 했다. ‘내가 좋은 배우가 되고 싶은 건가?’, ‘혹시 스타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닌가?’ 하는 반복적인 질문을 통해 배우라는 직업에 조금 더 진중하게 접근 해 나갔다. 그런 힘든 시기를 거치고 나서 만난 영화가 <청설>과 <점프 아쉰>이다. 두 영화를 하면서 예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많이 배우고 느꼈다. 연기가 나를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도 변화시킬 수 있는 거라는 걸 그 때 알았다. 내가 연기하는 어떤 인물이 누군가의 삶에 긍정적이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Q. 그 두 작품, <청설>과 <점프 아쉰> 이후 한국에도 당신 팬이 많이 생겼다.
펑위옌:
진짜? 전혀 모르겠다. (많다고 거듭 강조하자) 그런데 왜 아무도 반겨주지 않지?(웃음) 입국할 때 공항에서 아무도 우릴 반겨주지 않길래, “아, 한국에서 나는 인기가 없구나”라고 생각했다.(일동 폭소) 사실, 나름 예쁜 옷을 입고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하하하 (옆에 있던 매니저가 두 명의 팬이 나오긴 했다고 말한다.)

Q. 당신, 팬들. 정말 많다.
펑위옌 매니저:
두 명이 많은 건가?(일동 폭소)
펑위옌: 아, 자꾸 이러면(이런 이미지로 몰고 가면) 한국 감독님들이 날 불러주지 않을 것 같다.(웃음)”

Q. 한국에서 ‘대만의 닉쿤, 박태환’이라 불리는데, 그건 알고 있나?
펑위옌:
알고 있다. 두 분 다 유명한 분들이잖나.

Q. 그 자체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펑위옌:
그럼 당신을 믿고, 이따 레드카펫(중국영화제 폐막행사) 할 때 멋진 옷을 입고 가겠다. 가장 좋은 슈트에, 눈썹도 올리고. 아, 마스크도 하나 더 쓰고.(웃음)

글,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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