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시존스_포스터_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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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팝의 전설 퀸시 존스가 역사적인 첫 내한공연을 갖는다. 퀸시 존스는 내달 25일 서울 올림픽공원 SK올림픽핸드볼경기장에서 자신의 80세를 기념한 공연 ‘퀸시 존스 더 에이티스 셀레브레이션 라이브 인 코리아(Quincy Jones The 80th Celebration Live in Korea)’를 연다. 마이클 잭슨의 전성기를 가능케 한 프로듀서로 잘 알려진 퀸시 존스는 팝계에 뚜렷한 획을 그은 거인으로 평가받는다. 공연을 주최한 CJ E&M측은 “퀸시 존스를 손꼽아 기다리는 한국의 팬들을 위해 오랜 시간 정말 많은 공을 들였다. 이번 공연은 거장 퀸시 존스가 진두지휘하는 음악 세계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꿈의 무대”라고 설명했다.

퀸시 존스가 온다
퀸시 존스가 내한공연을 한다니 격세지감이다. 그는 재작년 4월 한국을 깜짝 방문한 적이 있다. 방한 당시 3박 4일 일정 동안 판소리, 퓨전 국악 등 한국문화 체험일정을 소화하고 가요 프로그램을 참관하는 한편 보아, 타이거JK, YG엔터테인먼트 소속 뮤지션들을 비롯해 김형석, 정원영, 박칼린 등 음악관계자들과 만났다. 귀국 후 존스는 자신이 후원하는 세계적인 재즈 페스티벌 스위스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에 한국인으로 구성된 ‘엠플렉스 밴드’를 세우는 등 한국에 애정을 보였다. 이제 퀸시 존스는 자신의 음악으로 한국 팬들을 만나러 온다.

퀸시 존스는 팝 역사상 최고의 커리어를 쌓은 프로듀서 중 한 명이다. 수상기록을 보면 ‘그래미 어워즈’에서 가장 많이 후보(79회)로 올라 클래식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31회 수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그래미상(27회 수상)을 탔다. 그러한 그의 음악세계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의문이다. 한국의 관객들은 퀸시 존스에게서 어떤 음악을 기대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퀸시 존스를 마이클 잭슨의 프로듀서로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마이클 잭슨의 앨범들은 퀸시 존스 전체 커리어에서 양적으로 봤을 때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는 재즈 트럼펫터, 작곡가, 빅밴드 지휘자 등 재즈뮤지션으로서 더 많은 커리어를 쌓았다. 영화음악감독, 팝 프로듀서로 활동할 때에도 재즈의 작법을 잃지 않았다.

재작년 4월 퀸시 존스의 첫 한국 방문을 기념해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했을 때 그에게 이렇게 물었더랬다. “당신은 모타운의 배리 고디 주니어와 함께 흑인음악을 팝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주인공으로 평가받는다. 본래 재즈 뮤지션으로 음악을 시작해 빅밴드 리더까지 했는데 팝으로 전환한 이유는 무엇인가?” 퀸시 존스는 “팝으로 전환한 계기가 딱히 있었다기보다 빅밴드에서 연주하다가 비밥에 빠져들고 이후 모든 장르의 음악을 소화할 수 있게 됐다. 레이 찰스와 마찬가지로 나는 장르를 넘나드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돈과 상관없는 비밥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밤새 비밥을 연주하고 즐기며 연습했다. 찰리 파커, 마일스 데이비스, 재즈 빅밴드는 나의 가장 중요한 음악적 백그라운드”라고 말했다. 그가 기자회견에서 비밥, 빅밴드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자 내심 반가웠다. 기자회견에 같이 간 한 지인은 퀸시 존스의 빅밴드 리더 시절 앨범 〈Quincy Jones Big Band Complete 1960 European Concerts〉를 그에게 내밀었다. 퀸시 존스는 제지하는 경호원을 안심시키더니 앨범에 손수 사인을 해줬다.

퀸시존스_티켓오픈_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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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시 존스의 음악여정
퀸시 존스는 대공황으로 미국이 몸살을 앓던 시기인 1933년에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시카고에서 보고 자란 것은 갱스터들의 무법천지였다. 이후 우연히 피아노를 만져본 것을 계기로 음악에 빠져들게 된다. 레이 찰스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레이〉에서도 볼 수 있듯이 14세 때부터는 자신보다 세 살 많은 레이 찰스와 함께 밴드를 하며 트럼펫을 연주했다. 버클리음악대학의 전신인 쉴링거 하우스를 졸업한 후에는 라이오넬 햄튼의 밴드에 트럼펫터로 합류해 미국, 유럽 투어를 돌았다. 여기서 편곡 실력을 인정받은 존스는 뉴욕에 정착 후 당대의 재즈 뮤지션들인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진 크루파 빅밴드의 프리랜서 편곡자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어 스물셋에는 디지 길레스피 빅밴드의 정식 음악감독으로 활약했고, ABC파라마운트 레코드와 계약 후부터는 비로소 자신의 밴드를 거느리며 레코딩 경력을 쌓아간다. 퀸시 존스의 데뷔앨범 〈This Is How I Feel About Jazz〉(1957)에서는 당시 그가 추구한 전통적인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미국의 주류 음악 트렌드가 재즈에서 로큰롤, R&B 등으로 변해가던 1950년대를 거쳐 60년대로 들어서면서 퀸시 존스는 영화, TV 스코어를 비롯해 팝스타들과의 작업을 늘려간다. 영화 〈전당포〉(1964)를 시작으로 수많은 사운드트랙을 작업했으며 프랭크 시나트라를 비롯해 유명가수들의 프로듀서로 활약하며 가장 잘 팔리는 프로듀서로 떠오른다. 퀸시 존스의 음악 스타일이 변화해가는 모습은 솔로앨범에도 잘 나타난다. 히트곡 ‘Killer Joe’가 실린 〈Working In Space〉(1969)에는 모던한 빅밴드 사운드가 담겨있다. 이 앨범에서 알 수 있듯이 존스의 스타일은 다분히 팝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Body Heat〉(1974)에서는 재즈와 소울, 훵크, 가스펠 등이 뒤섞인 그의 스타일이 잘 드러난다. 데이브 그루신과 함께 해 동시대 GRP 계열의 스무드재즈 느낌도 난다.

이러한 솔로앨범들은 특정 장르의 범주에 넣기보다 퀸시 존스의 ‘팝 월드’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장르를 나누는 것이 큰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퀸시 존스가 1970년대 중후반에 브라더스 존슨과 함께 했던 앨범들은 분명히 기존의 소울, 훵크, 디스코에서 진일보한 흑인음악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악곡 방식이 마이클 잭슨과 첫 합작품인 〈Off The Wall〉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퀸시 존스가 참여한 〈Off The World〉, 〈Thriller〉, 〈Bad〉는 마이클 잭슨을 세계적인 슈퍼스타로 올려놓게 된다. 퀸시 존스는 여러 팝스타들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작업해왔지만 항상 재즈의 기본, 재즈의 앙상블, 재즈적인 관점을 잃지 않았다. 이는 마이클 잭슨과 함께 한 마지막 앨범 〈Bad〉 이후에 1989년에 내놓은 솔로앨범 〈Back on The Block〉의 수록곡 ‘Jazz Corner of The World’과 ‘Birdland’에서 잘 나타난다. 1991년에는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에서 마일스 데이비스와 협연을 가졌으며 이 실황은 라이브앨범 〈Miles & Quincy Live at Montreux〉로 발매됐다.

퀸시 존스가 선택한 뮤지션들
이번 내한공연은 퀸시 존스가 후원하고 있는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을 한국에서 재현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퀸시 존스가 직접 선택한 재즈 보컬 계의 신동 니키 야노프스키, 쿠바 출신의 재즈 피아니스트 알프레도 로드리게즈, 올해 11세의 천재 피아니스트 에밀리 베어 등 신예들과 함께 제임스 잉그램, 패티 오스틴, 시다 가렛 등 존스의 작업에 참여해온 ‘퀸시 존스 사단’이 공연에 함께 한다. 퀸시 존스의 음악적인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제공. CJ 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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